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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85 : 예수와 세리 자캐오
  • 김근수
  • 등록 2017-08-29 11:05:23
  • 수정 2017-08-29 11: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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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께서 예리고에 이르러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2 거기에 자캐오라는 돈 많은 세관장이 있었는데 3 예수가 어떤 분인지 보려고 애썼으나 키가 작아서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4 그래서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길을 앞질러 달려가서 길가에 있는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다. 5 예수께서 그 곳을 지나시다가 그를 쳐다보시며 “자캐오여, 어서 내려오시오. 오늘은 내가 당신 집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하고 말씀하셨다.

 

6 자캐오는 이 말씀을 듣고 얼른 나무에서 내려와 기쁜 마음으로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셨다. 7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 하며 못마땅해 하였다. 8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은 갚아주겠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9 예수께서 자캐오를 보시며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입니다”하고 말씀하셨다. (루카 19,1-10) 




자캐오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대화, 예수와 적대자들의 논쟁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본문이다. 서로 다른 장르에 속한 두 이야기가 겹쳐진 것이다.(루카 5,17-26;6,6-11; 9,37-45) Zakkaios(에즈라 2,9; 느헤미야 7,14)는 죄없다는 뜻의 히브리어 단어가 그리스어로 바뀐 이름이다. 자캐오를 세관장arkitelones라고 표현한 고대 문헌은 루카복음 여기밖에 없다. 부자plousios는 루카에 여러 번 나온 단어다.(루카 ,24-26; 12,16-21;16,19-31) 예수는 세리의 친구(루카 7,34)라고 불렸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가 부자들의 친구라고 불린 적은 없다. 

 

자캐오의 회개는 사실 일찍 시작되었다. 예수가 어떤 분인지 보려고 애썼고, 지나가는 길을 앞질러 달려가서 길가에 있는 나무 위에 올라가기도 했다. 루카는 4절에서 뽕나무sukaminos(루카 17,6)가 아니라 돌무화과나무sukomorea를 말하고 있다. 이 나무는 평지에서 자라고 울창한 잎이 잘 떨어지지 않으며 가지가 짧고 옆으로 넓게 퍼져 있다.(Bovon, III/3, 274) 돌무화과나무는 유럽이나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잇지 않다. 잎이 무성한 돌무화과나무에서 잎을 이리저리 제치고 사람을 바라보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예수를 간신히 보긴 했지만 예수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았을까. 나무 위에 올라간 것은 예수가 자캐오를 알아보게 한 계기가 되었다. 자캐오는 예수를 우연히 마주친 게 아니라 예수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 간절한 노력을 예수는 알아본 것이다. 예수는 자청해서 초대를 당했다. 죄인도 예수를 초대할 수 있다. 회개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중요하다. 기다림은 믿음의 표현이다. 간절한 기다림이 없으면 기쁜 만남도 없다. 예수 뿐 아니라 연인을 기다림도 이미 믿음이다. 


군중은 예리고 길가에 서 있는 예리고 주민들뿐 아니라 예수를 계속 동행해왔던 사람들을 포함한다.(루카 14,25; 18,36) 돈 많은 세관장이라는 드문 표현까지 얻은 자캐오 아닌가. 6절에서 자캐오는 예수 혼자만 자기 집에서 초대(루카 10,38)하고 주무시게 했을까. 예수 제자들과 일행들도 함께 초대했을까. 알기 어렵다. 가난한 군중에게도 식사를 대접했다면 참 좋았겠다. 7절에서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 하며 불평한 사람들이(루카 5,30; 15,2) 누구인지 루카는 설명하지는 않았다. 두 가지는 드러났다. 1. 세리가 죄인으로 여겨졌다. 2. 죄인의 집에 숙박하는 것은 이상하게 여겨졌다.


예수가 자캐오에게 어떤 권고를 한 적은 없다. 먼저 자캐오가 자발적으로 자기 생각을 털어놓았다.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남을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네 갑절은 갚아주겠다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말이 떠오른다.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루카 3,11) 오늘은 당신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는 예수의 말에 자캐오가 감격해서 갑자기 회개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존경하는 분이 집을 방문해주신다니 얼마나 기뻤을까. 존경하는 분을 만나면 회개할 수도 있다. 존경받는 분이 많은 사회가 건강하다. 존경받는 신도와 성직자가 많은 종교가 건강하다. 자캐오의 태도는 성서 독자들에게 두 가지를 알려주고 있다. 1. 자캐오는 여전히 율법과 예언서 차원에 머물러 있다. 자캐오는 아직 하느님나라 메시지를 알고 있지 못하다. 2. 예수와의 만남은 종교 밖에서도 윤리적 회개를 일으킬 수 있다. 


8절 재산hyuparkonta는 수입이 아니라 재산을 가리킨다. 수입의 절반을 나누는 것도 힘들지만 재산의 반을 나누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겠다. 속여먹은 것sukopantein은 정치경제적 권력을 이용하여 정치경제적 약자를 착취하는 것을 가리킨다. 자캐오가 이미 착취를 해왔다는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는 것 같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군인들에게 착취하지 말라고 경고했었다.(루카 3,14) 당시 군인들이 가난한 백성을 착취했다는 말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군인들과 세금 공무원에게 착취당하며 살았다. 


8절에서 네 갑절tetraplous 갚아준다는 말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이 단어는 신약성서 전체에서 여기에만 나온다. 고대에 네 배 처벌poena quadrupli 규정이 있다.(Wolter, 614) 공동성서)에서 근거를 찾는 학자도 있다. “누구든지 남의 황소나 양을 훔쳐다가 잡아먹었거나 팔았을 경우에는 황소 한 마리에 다섯 마리를, 양 한 마리에 네 마리를 배상하여야 한다”(탈출기 21,37) 그런 인정머리 없는 짓을 한 놈을 그냥 둘 수는 없다. 그 양 한 마리를 네 배로 갚게 하리라."(사무엘하 12,6) 독일에서 재직 중에 횡령죄를 범한 공무원은 퇴직 후 연금을 받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도 그렇게 하면 어떨까. 횡령 액수의 네 배를 벌금으로 내게 하면 어떨까.



여기서 세례자 요한의 말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세리들도 와서 세례를 받고 ‘선생님, 우리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요한은 ‘정한 대로만 받고 그 이상은 받아내지 마라’ 하였다. 군인들도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요한은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러주었다”(루카 3,12-14)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라는 종교적 메시지만 말한 사람이 아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즘 말로 정치비판가요 사회운동가였다. 예수도 정치비판가요 사회운동가였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 문하생이었다는 사실을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9절에서 예수는 자캐오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자캐오를 보며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3인칭 명사를 쓴 것이다.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는 말을 자캐오에게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선언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준 것이다.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 구원받는다. 또 9절에서 예수는 루카 4,21 이후 처음으로 오늘semeron이란 단어를 썼다. 구원 역사가 지금 당장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루카는 에제키엘 예언서를 기억하고 있다. “헤매는 것은 찾아내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리라. 상처입은 것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힘 나도록 잘 먹여주고 기름지고 튼튼한 것은 지켜주겠다. 이렇게 나는 목자의 구실을 다하리라”(에제키엘 34,16)


자캐오의 말에 대해 성서학자들은 크게 두 설명을 내놓았다. 1. 8절 나누어주겠다didomi, 갚아주겠다apodidomi를 미래 시제로 해석하여, 자캐오의 회개를 드러낸 말이라는 해석이 있다. 2. 7절에서 사람들이 예수에게 불평하는 것을 보고 자캐오가 예수를 변호하기 위해 내놓은 제안이다. 어느 쪽 의견이든 반갑다. 자캐오 뿐 아니라 우리도 예수의 난감한 처지를 감쌀 수 있다. 본문 주제에 대해 역시 두 의견이 있다.(Bovon, III/3, 266) 1. 자캐오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이 강조되고 있다. 자캐오를 우선 죄인으로 보고 있다. 회개와 용서의 관점에서 보는 전통적인 해석이다. 2. 구원에 참여하는 인간의 노력이 중요하다. 선행이 격려되고 있다. 어느 쪽 해설이든 반갑다. 


자캐오는 세리 레위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나서는 제자(루카 5,28)가 되지는 않았다. 예수는 부자 청년에게 “아직도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시오”(루카 18,22)라고 했던 것을 자캐오에게 요구하지도 않았다. 서로 다른 세 이야기에 공통점이 하나 있다. 예수를 따르려면 적어도 재산의 절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자 그리스도인은 들으라. 한국의 서민들도 세계적으로 보면 중산층에 속한다. 


복음서에서 부자가 예수에게 칭찬받는 드문 이야기다. 돈이 많아서 칭찬받는 게 아니라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루카 공동체는 예수가 죄인들과 너그럽게 어울리는 모습을 잘 기억하였다. 예수의 말과 행동에서 감동받았다. 그러나 그런 예수의 언행이 차갑게 비난받는 경우를 또한 잊지 않았다. 오늘도 사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는 성직자나 평신도는 교회 안에서도 사상이 의심받곤 한다. 부자와 자주 어울리는 성직자가 교회에서 처벌받는 사례가 언제 있었던가. 부자들과 골프도 치고 헌금도 얻어내는 성직자가 유능한 사람으로 신자들에게 칭송받고 있지는 않는가. 


가난한 사람은 십일조도 내기가 버겁지만 부자들은 재산의 절반을 낸다 해도 적게 낸 것이다. 재산의 절반을 교회나 성당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 재산의 절반을 교회나 성당에 낸다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아주 적을 것이다. 부자 신도들은 교회나 성당에 헌금으로 내는 것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훨씬 좋다. 부자 신도들이 아무리 종교생활을 열심히 한다 해도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다면, 구원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예수 믿으면 부자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으려면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야 한다. 재산의 반을 교회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야 한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전에 할 일이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횡령해선 안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은 착취해선 안 된다. 횡령과 착취로 모은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헛일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돈을 모으기 위해 횡령과 착취를 한단 말인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더러운 헌금은 교회에 필요없다. 다시 가져가라”고 경고했다. 횡령 혐의로 감옥 가는 유명한 그리스도인들을 TV에 자주 보는 것은 지겹고 역겨운 일이다. 돈을 보려고 애쓰지 말고 예수를 보려고 애써야 한다. 


루카복음에서 예수를 따르려면 모든 재산을 버려야 했다.(루카 12,33; 14,33; 18,22) 성서무오설을 신봉하며 성서에서 한 점 한 획도 틀림이 없다고 우기는 성서 근본주의자들은 왜 모든 재산을 버려야 한다는 성서 구절 앞에서 조금도 떨고 있지 않을까. 그들은 낙타를 줄이고 바늘구멍을 키우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모든 재산을 기쁘게 버릴 자신이 있어서 그럴까. 부자들을 어떻게든 편하게 해줄 성서학자나 종교인들이 그들 뒤에 든든히 있어서 그럴까. 목사 신부는 성서에서 한 점 한 획도 바꾸지 못하는데 말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부자들이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해야 할 종교가 바로 그리스도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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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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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mem2017-08-29 12:00:21

    인간의 장기를 기증하면 다른 사람에게 이식돼서 원래 주인의 생명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잘 살아 간다. 그렇다면 인간은 하나의 주체에 의해서 통제되는 단일생명체인가 아니면 여러 생명체가 함께 살고 있는 집단생명체인가? 기존의 과학이론을 뒤집는 혁명적인 이론으로 우주와 생명을 새롭게 설명하는 책(제목; 과학의 재발견)이 나왔는데 과학자들이 반론을 못한다. 이 책은 서양과학으로 동양철학을 증명하고 동양철학으로 서양과학을 완성한 통일장이론서다.


    기독교인들이 비성경적으로 행동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그런 비판은 성경이 진리일 때만 성립된다. 성경이 진리가 아니라면 성경을 근거로 그들의 행동을 비판해야할 이유가 없다. 기독교인들이 수천 년간 비성경적으로 행동해도 왜 하나님이 그것을 방치하고 있을까? 세월호처럼 안전 규칙을 안 지키면 기독교인들도 사고가 난다. 기독교인들도 일반인들과 똑같은 확률로 암이 걸린다. 하나님은 공평한 건가? 아니면 기독교에 무관심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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