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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87 : 예루살렘 도착
  • 김근수
  • 등록 2017-09-12 10:5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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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29 올리브 산 중턱에 있는 벳파게와 베다니아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예수께서는 두 제자를 앞질러 보내시며 30 이렇게 말씀하셨다. “맞은편 마을로 가시오. 거기에 가보면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을 터이니 그 나귀를 풀어오시오.  31 혹시 누가 왜 남의 나귀를 푸느냐고 묻거든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하고 대답하시오”


32 그들이 가보니 과연 모든 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였다. 33 그래서 나귀를 풀었더니 나귀 주인이 나타나서 “아니, 왜 나귀를 풀어가오?” 하고 물었다. 34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고 35 나귀를 끌고 와서 나귀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고 예수를 그 위에 모셨다.  


36 예수께서 앞으로 나아가시자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놓았다. 37 예수께서 올리브 산 내리막길에 이르렀을 때 수많은 제자들은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에 대하여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 높여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38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이여, 찬미받으소서. 하늘에는 평화, 하느님께 영광!” 


39 그러자 군중 속에 끼여 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선생님, 제자들이 저러는데 왜 꾸짖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40 그러나 예수께서는 “잘 들으시오. 그들이 입을 다물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루카 19,28-40)




예수 삶을 마르코는 갈릴래아 시작과 예루살렘 완성이라는 큰 구도로 생각했다. 그 사이에 제자교육을 위한 예루살렘으로 여정이 있다. 갈릴래아에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고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선포한다. 하느님나라를 모르는 십자가는 공허하고 십자가를 모르는 하느님나라는 맹목적이다. 루카는 마르코의 의도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3부작 루카복음에서 3부 시작은 예수의 예루살렘 도착에서 시작된다. 3부인 루카 19,28-24,53에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의 가르침(루카 19,28-21,38)은 루카복음의 중요한 특징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예수 죽음과 부활(루카 22,1-24,53)을 독자들에게 준비시키는 역할이다. 


예수 죽음은 유다교 지배층이 예수를 반대하고 예수 가르침이 틀렸다는 근거로 즐겨 사용되었다. 예수 가르침을 전파하던 초대교회를 비난하는데 주요한 논리였다는 뜻이다. 이에 맞서 루카는 예수 가르침이 옳다는 해명을 유다교에게 하고 초대교회 신자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안심시켜야 했다. 그래서 루카는 예수 최후의 시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다른 복음서보다 더 강조하고 있다. 그것이 루카복음이 쓰여진 까닭이요 주제다. 1. 예수는 틀리지 않았고 옳았다. 2.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틀리지 않고 옳다.


예수 가르침의 서막으로 루카는 올리브산에서 사람들의 환호,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의 한탄, 성전 항쟁 세 가지를 소개한다. 본문은 네 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이야기다. 성전 방문(마르코 11,11), 베다니아에서 숙박과 다음날 예루살렘으로 돌아옴(마르코 11,15),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함(마르코 11,12-14) 부분은 루카에서 빠졌다. 39-40절 바리사이의 질문과 예수의 대꾸는 루카에만 있다. 루카에서 시간과 동기에 따라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행진은 도시 밖에서 시작된다. 예수는 나귀를 타고 온다. 옷이 길바닥에 깔려 있다. 사람들이 환호한다. 행진은 성전에서 끝난다. 사람들이 예수에게 환호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장면이 절정이다. 32-39절에서 예수는 말이 없다. 


예수는 앞장서서(마르코 10,32) 길을 떠났다. 예수는 제자들을 앞장세우고 나중에 천천히 나타나는 분이 아니다. 제자들이 먼저 죽고 예수가 나중에 죽은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보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떠났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았다. 예리고와 예루살렘의 높이 차이는 무려 1,000 미터에 달한다. 예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고 힘이 든다. 한라산을 앞장서 올라가는 예수 모습이 상상된다. 



벳파게는 자라지 않은 무화과나무가 있는 집이란 뜻이다. 성서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지명이다. 베다니아는 아나니야의 집이란 뜻이다. 느헤미야 11,32에 나오는 벤야민의 후손을 가리키는 단어 같다. 그 후손들이 모여 살던 동네 아닐까. 베다니아는 라자로, 마리아, 마르타가 살았고(요한 11,1), 예수가 승천하던 곳이다. 예루살렘에서 15 스타디온(=약 2,8킬로미터) 떨어진 동네다.(요한 11,18) 요르단강 건너편 베다니아(요한 1,28)와 혼동하면 안된다. 벳파게와 베다니아 순서보다 베다니아와 벳파게라고 쓰는게 지리적으로 옳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베다니아와 벳파게 마을이 올리브산에 있다는 사실이다. 메시아는 올리브산에서 예루살렘으로 온다.(즈가리아 14,4) 남의 소유인 나귀를 풀어오라는 말은 당시 군사적 정치적 이유에서 강제로 남의 재산과 인력을 징발하던 관행을 암시한다. 로마군대는 유다인을, 일본 군대는 우리 선조들을 그렇게 괴롭혔다. 예수가 권력자라서 남의 소유물을 함부로 대한 것이 아니다. 예수는 가난해서 나귀 한 마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Bovon, III/4, 32) 33절에서 나귀 주인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kyurioi로 표현되었다. 동네 사람들이 공동으로 소유한 나귀라는 뜻일까. 


아무도 탄 적 없는 어린neos 나귀는 예식 목적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 같다.(Kremer, 187) 흠없이 온전하고 멍에를 메어본 일이 없는 붉은 암소(민수기 19,2; 신명기 21,3; 사무엘상 6,7) 부분도 마찬가지로 예식 목적으로 그렇게 표현되었다. 예수 시신을 모신 무덤도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었다.(요한 19,41) 나귀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고 예수를 그 위에 모신 것은 행렬이 특별하다는 것을 뜻한다.(열왕기상 1,44) 지금까지 예수는 걸어서 이동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예수는 순례자요 노숙자요 가난한 분이었다. 


나귀에 아직 안장이 없어서 제자들은 겉옷을 얹은 것으로 대신했다. 지지자에 둘러싸여 동물을 타고 행진하는 것은 솔로몬 왕을 맞이하는 예식에 속한다.(열왕기상 1,33) 가난한 스승을 제자들은 왕처럼 모시고 예우했다. 솔로몬왕 만세라고 사람들은 소리높였다. 비바 파파라고 외치며 교황에게 환호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겉옷을 벗어 길에 펴놓은 것(열왕기하 9,13)은 승리의 길이라는 뜻이다. 공동성서(구약성서)를 잘 아는 유다인에게 이해하기 쉬운 표현이지만, 공동성서를 잘 모르는 한국 독자들에게 낯선 표현이다. 


36절 제자들의 찬양은 예수 탄생 때 천사들의 합창을 연상케 한다.(루카 2,13-) 메시아의 탄생을 천사들이 찬송했듯이, 메사아의 등장을 제자들이 환호하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이 기뻐한 이유는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pasai hai dyunameis이다. 이 단어는 예수의 치유, 마귀 추방, 죽은 자를 일으킴이 모두 포함된다.(루카 10,13; 사도행전 2,22) 예수가 한 일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경우는 루카에 여럿 있다.(루카 5,25; 7,16; 17,15) 예수의 말과 행동을 보면 곧 하느님을 보는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루카는 성서 독자들에게 하고 싶었다. 


37절 수많은 제자들이라는 표현은 복음서에서 보기 어렵다.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한 순례자들에게 인사하는 말인 시편 118,26이 제자들에 의해 38절에서 인용되고 있다. 하늘에는 평화, 하느님께 영광은 루카 2,14를 조금 고친 표현이다. 도와주세요라는 뜻의 히브리어 호산나hosanna는 루카에서 빠졌다. 예수는 하느님이 보낸 분이요 하느님이 즉위시키고 인정한왕(루카 9,48.49)으로 소개되고 있다. 나귀를 타고 오는 예수의 동화같은 장면은 군인들의 행진과 아주 다르다. 예수는 권력을 앞세우지 않고 약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어.”(즈가리아 9,9: 창세기 49,10-:열왕기상 1,33-40)



바리사이들의 불평어린 질문은 제자들의 환호와 대조되고 있다. 루카는 바리사이들을 군중 속에서 빼내어 제자들의 침묵을 요구하게 만들고 있다. 예수 제자들에게 조용히 있으라고 윽박지르는 악의 세력은 어느 시대에나 있다. 세월호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국가권력도 언론도 때로는 종교도 사람들에게 침묵을 권장하기도 한다. 나쁜 속셈이 있어서 그렇다. 예수는 하바국 2,11을 인용하여 제자들을 변호한다. 돌조차 진실의 증인이다. 판사가 판결을 올바로 내리지 않으면, 돌이 증인이 되어 소리칠 것이다. 무기도 악한 권력자에게 반항한다. 마땅히 기뻐할 일은 마땅히 기뻐하라. 마땅히 소리 지를 것은 소리 지르라. 


루카에게 구원은 단순히 말씀을 듣는 것만은 아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위대한 행위를 보는 것이기도 하다. 36절에서 제자들은 예수가 행한 모든 기적을 보았다eidon. 과거에서 지금까지 예수가 행한 모든 것을 보았다는 말이다. 구원은 말씀을 듣고 행동을 보는 것만이 아니다. 구원은 외치는 것이다. 예수의 기적을 소리 높여 세상에 외치는 것, 우리 애원을 큰소리로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말하는 것을 포함한다. 권력자들이여, 백성에게 침묵을 강요하지 말라. 부자들이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닥치고 있으라고 말하지 말라. 성직자들이여, 평신도의 입을 막지 말라. 침묵이 언제나 금은 아니다. 악에게 저항하지 않는 침묵은 악의 편이다. 침묵하지 말자. 일어나 말하자.


찬가, 이야기, 보도 등 여러 문학 장르가 섞여 있는 본문이다. 현장을 TV로 생중계하는 장면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의도를 가지고 쓴 글이다. 루카는 공동성서 여러 구절을 인용하여 예수가 독특한 의미에서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예수는 평화의 메시아요 희생하는 메시아다. 군대 사령관 같은 메시아가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탄 평화의 메시아다. 지상의 모든 권력자들은 평화의 메시아 예수 앞에 머리를 숙여라.


돈과 권력이 많은 사람을 승자로 숭배하는 문화에 우리는 살고 있다. 약한 예수, 희생자 예수는 우리 시대의 영웅을 가리키는 코드가 아닐지 모른다. 그래서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지도, 아니 받아들이기 싫은지도 모르겠다. 십자가에 매달린 약한 예수를 우리 입맛에 맞게 강한 예수로 바꾸어 숭배하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복음의 메시지가 아니다. 예수는 예루살렘 도착에서 승자의 행진으로 묘사되지만 정치적 승리자의 길로 소개되진 않았다. 예수는 신학적으로 승자이지만 정치적으로 승자는 아니다. 그것은 예수의 길이 아니다. 그러면 교회의 길은 어떠해야 하는가. 교회가 승자를 숭배하고 승자에게 무릎 꿇는 것이 옳은가. 


하늘에는 평화라고 제자들은 노래 불렀지만 아직 지상에는 평화가 없다. 평화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가난과 억압과 불평등이 있다. 특히 한반도에 평화가 시급하다. 우리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반도 평화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다. 한반도에서 사는 것은 십자가를 지고 사는 것과 같다. 분단은 한국인 모두를 고통에 빠뜨리고 있다. 한반도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통일 문제를 언제나 생각하고 사는 것을 전제한다. 어느 종교인도 어느 신학자도 분단 문제를 피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 공기처럼 분단 문제는 한국인에게 전제요 기본이다. 그리스도교는 분단에서 이익을 얻을 생각을 하지 말고 한반도 평화를 위해 애써야 한다. 교회는 전쟁을 부추기는 세력과 평화를 방해하는 세력과 당당히 맞서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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