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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88 : 예루살렘 운명과 성전 항쟁
  • 김근수
  • 등록 2017-09-19 11:56:12
  • 수정 2017-09-19 16: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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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러 그 도시를 내려다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42 한탄하셨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43 이제 네 원수들이 돌아가며 진을 쳐서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쳐들어와 44 너를 쳐부수고 너의 성안에 사는 백성을 모조리 짓밟아버릴 것이다. 그리고 네 성안에 있는 돌은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얹혀 있지 못할 것이다. 너는 하느님께서 구원하러 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45 예수께서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 상인들을 쫓아내시며 46 “성서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하고 나무라셨다.


47 예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는데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잡아 죽일 궁리를 하고 있었다. 48 그러나 백성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듣느라고 그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루카 19,41-48) 




예수의 눈물은 제자들의 기쁨과 대조된다. 예수는 여러 번 탄식했다.(루카 13,34; 23,27-) 가난한 사람들의 슬픈 운명을 보고 누가 눈물 흘리지 않으리. 41-42절에서 예수는 탄식하고, 43-44절에서 처벌을 알리며 경고(루카 13,34-35; 이사야 22,4-8; 아모스 5,1-3)하고 있다. 예루살렘에 다가오는 운명을 뒤바꿀 수 없음에 예수는 울었다.(열왕기하8,11; 이사야 22,4; 예레미아 14,17) 두 가지 사실이 드러난다. 1. 예수는 예루살렘을 사랑했다. 2. 예루살렘은 잘못했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울지는 않는다.


이 구절을 읽던 초대 공동체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들 대부분은 유다인이었다. 무너진 성전과 전쟁으로 학살된 선조와 동포들 생각에 슬프고 착잡했을 것이다. 그 심정을 한국 그리스도인은 잘 모르리라. 예루살렘이라는 단어에 포함된 schalom평화라는 뜻을 예수는 더 기억했을 것이다. 예루살렘이라는 단어에 평화라는 뜻이 포함되지 않았는가. 제주도를 평화의 섬이라고 하지 않는가. 예루살렘 시민들은 자기들에 보낸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다.(루카 23,34; 사도행전 3,17; 13,27). 마음이 닫혀서 그런 것이다. (이사야 6,9-; 루카 8,10; 로마 11,8) 증인들의 부활 선포를 통해 그들은 예수를 알아볼 회개의 기회가 생겼다.(사도행전 2,38; 3,17-19; 5,30-) 


루카복음 그 어느 곳보다도 여기처럼 예수가 예언자들에게 의지하는 곳이 없다.(Bovon, III/4, 43) 예언자들의 임무에는 자신의 선포가 실패했음을 인정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럴수록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담담하게 알려야만 한다. 예수는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의 선포 가 결국 실패하게 될 것임을 예감한 것 같다. 슬픈 예감은 왜 빗나간 적이 없느냔 말이다. 당대에 성공하고 존경받던 예언자는 이스라엘에 없었다. 당대에 버림받고 후대 역사책에 남는 것이 예언자의 운명이리라. 가짜 예언자의 이름은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는다. 만일 기록된다면, 비판의 대상으로 추한 이름이 새겨질 뿐이다. 


41-44절은 예수가 실제로 한 말이 아니라 사후예언(vaticinium ex eventu)에 속한다. 사건이 생긴 뒤에 마치 그전에 사건을 예언한 것처럼 꾸미는 문학 기법이다. 41절에서 예수는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고 눈물을 흘렸다. 루카에게 눈으로 보는 행동은 중요하다. 나인이라는 마을에서 죽은 외아들의 장례를 치르는 과부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루카 7,13) 세월호 유가족을 보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심정도 그 과부를 보는 예수 마음과 똑같았을 것이다.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루카 10,33) “세계 어느 곳에서라도 누군가에게 부정이 행해지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한다.”(체 게바라) 먼저 정직하게 보아야 올바로 판단하고 의롭게 행동할 수 있다. 첫 단추인 보기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판단도 행동도 엉망이 될 수 있다. 


43절에서 예수는 유다독립전쟁 때 로마군대가 예루살렘 성전을 포위(예레미아 29,3)하고 파괴시킨 역사를 예고하고 있다고 루카는 생각했다. 정복하는 군대의 잔혹함은 고대에 널리 알려졌다.(창세기 19,4; 열왕기하 6,14; 에제키엘 26,8)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시민들의 슬픈 운명이 예언자들의 노래에 담겨졌다. “어미와 자식이 함께 박살나지 않았느냐? 내가 이스라엘 가문을 그 모양으로 만들리라. 너희의 엄청난 죄를 그대로 두겠느냐? 때가 되면 먼동이 트듯 이스라엘 왕은 영락없이 망하리라.”(호세아 10,14-15)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예루살렘 시민들이 하느님께서 구원하러 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시온이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며, 성전 언덕이 잡초로 뒤덮이게 되거든, 그것이 바로 너희 탓인 줄 알아라.”(미가 3,12) 44절 예수의 말은 루카 1,78-79로 이어진다. “우리 하느님의 지극한 자비의 덕분이라. 하늘 높은 곳에 구원의 태양을 뜨게 하시어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주시리라.” 


성전 항쟁 기사가 루카에서 아주 짧고 간단하게 보도되었다. 사건보다 예수의 가르침에 더 집중하려는 루카의 생각 때문이다.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엎었다(마르코 11,15) 부분은 루카에서 빠졌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마르코 11,17)이 46절에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로 단어 만민이 빠졌다. 이방인 선교가 시작(사도행전 1,8)된 이후 예루살렘은 더 이상 유다인의 기대처럼 만민들이 찾는 순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Kremer, 190) 


45절에서 예수는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 상인들을 쫓아냈다. 45-46절에서 루카는 왜 예수가 성전에서 희생제물을 바치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았는지 설명한다. 예루살렘 성전에 축일을 지내러 온 예수가 성전에서 희생제물을 바치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았던 사실은 사람들에게 의아했을 것이다.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예수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축일을 지내러 예수는 먼 길을 오랜 시간 걸어서 오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했다.(루카 1,10; 2,37; 18,10) 


46절은 이사야 예언서 56,7과 예레미아 예언서 7,11을 섞은 구절이다. 마르코 11,17에서 따왔다. 예루살렘 성전 전체가 아니라 상인들을 쫓아냈다. 물론 상인들에게 임대를 주고 돈을 벌었던 대사제들에 대한 경고도 포함되어 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다. 종교 비판의 말이겠다. 종교를 팔아 돈벌이하는 사람들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예수는 상업 행위에서 해방시켰다. “그 날이 오면, 다시는 만군의 야훼의 전에 장사꾼이 있지 못하리라.”(즈가리아 14,21) 



성전에서 기도하고 제사 지내는 전례를 예수가 방해한 것은 아니다.(Wolter, 635) 예수가 성전에서 제사 지내던 사제들을 쫓아낸 것이 아니다. 예수가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도록 방해한 적도 없다. 성전을 상업 행위에서 해방시켰으니 예수는 전례를 제대로 준비시킨 것이다. 예수는 돈에 물든 성전을 돈에서 해방시키려 한 것이다.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자신의 가르치는 장소로 만들기 위해 상인들을 쫓아냈다는 해설(Conzelmann, Mitte der Zeit, 70)은 본문에서 이끌어내기 어렵다.(Wolter, 635) 


제사 지내는데 필요했던 동물과 헌금을 순례자들이 하지 못하도록 예수가 결과적으로 방해했다고 항의할 사람도 있겠다. 예수가 보기에 동물과 돈은 하느님께 바치는 예배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예수가 동물과 헌금에 관계되었던 상인들을 쫓아냈을 리 없다. 예수가 명동성당 성물방이나 사무실에 가서 성물을 뒤엎고 직원들을 쫓아냈다고 하자. 예수가 미사를 방해하고 전례를 모독하며 신자의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예수가 미사를 방해한 것이 아니라 명동성당을 상업 행위에서 해방시킨 사건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47절에서 예수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쳤다고 기록되었다. 루카는 단 하루 활동만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방인의 뜰(솔로몬 홀)에서 가르쳤을 것이다. 당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했다.(루카 2,46-; 요한 10,23; 사도행전 5,12) 성전 항쟁이 아니라 성전에서 가르침이 적대자들이 예수를 죽이려는 근거가 된 것이라는 의견(Wolter, 190)에 나는 찬성하기 어렵다.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는 훨씬 전에 시작되었다. 예수의 적대자들은 47절에서 바리사이가 아니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다. 유다 지배층이 예수를 죽이려는 것이다.(마르코 11,18)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의 첫 번째 죽음 예고에 이미 언급되었다.(루카 9,22)


본문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배울 수 있을까. 평화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성전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물어야 하겠다. 우리 한국인에게 시급하고 중요한 질문이겠다. 그리스도교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애쓰고 있는가. 한국 개신교와 가톨릭은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이 아니라 기도하는 집으로 여기고 실천하고 있는가. 종교 지배층은 자신들의 권력과 지갑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고 있지는 않는가.  


휴전선에서 북쪽을 보며 남쪽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하느님이 상상된다. 평양을 보며, 서울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예수가 상상된다. “한반도여,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하고 탄식하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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