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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89 : 예수의 적대자들
  • 김근수
  • 등록 2017-09-26 11:27:21
  • 수정 2017-09-26 12:3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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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 날 예수께서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고 계실 때에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원로들과 함께 와서 2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들을 합니까? 누가 그런 권한을 주었습니까? 말해 보시오” 하고 따졌다. 3 예수께서 “그러면 나도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어디 대답해 보시오. 4 요한이 세례를 베푼 것은 그 권한이 하느님에게서 난 것입니까? 사람에게서 난 것입니까?” 하고 반문하시자 5 그들은 자기들끼리 “하느님에게서 났다고 하면 왜 요한을 믿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고 6 사람에게서 났다고 하면 사람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믿고 있으니 우리를 돌로 칠 것이 아니겠소?” 하며 서로 의논한 끝에 7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8 예수께서는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카 20,1-8) 




신학자 예수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예수는 설교자 전에 먼저 신학자였다. 바오로가 최초의 신학자가 아니라 예수가 최초의 신학자다. 예수는 최초의 해방신학자였다. 신학 없이 설교 없다. 신학 없이도 충분히 설교할 수 있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은 예수를 믿지 않거나 반대하는 사람과 논쟁할 수 있을까. 몇 분이나 버틸 수 있을까. 적대자들과 논쟁에서 신학자 예수가 가장 잘 드러난다. 


예수의 복음선포는 논쟁으로 시작해서 논쟁으로 끝났다. 예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논쟁을 시작했고(루카 5,17-6,11), 율법학자들, 대사제들, 사두가이들과 논쟁하였다.(루카 1-21,38) 논쟁을 모르는 사람은, 논쟁을 싫어하는 사람은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복음선포는 적대자들을 만나게 하며 그들과 논쟁은 피할 수 없다. 다르게 말하자면, 적대자들을 만나지 않으려는 사람, 논쟁을 하기 싫은 사람은 복음선포를 하면 안 된다.


예수에게 묻는 최후의 질문들, 그리스도교에게 묻는 최후의 질문들이 한꺼번에 집중되고 있다. 예수의 권위(루카 20,1-8), 포도원 소작인 비유(루카 20,9-19), 세금 논쟁(루카 20,20-26), 부활 논쟁(루카 20,27-40), 다윗의 아들 문제(루카 20,41-44), 최후의 경고(루카 20,46-47) 예수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가르치며 논쟁하는 시간이다. 마치 모든 인류 앞에서 예수가 최후 진술을 하는 것 같다. 이제 예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신약성서학자 Bovon은 2,100페이지에 달하는 4권의 루카복음 주석서를 펴내는데 1989년부터 20년 시간을 바쳤다. 지난 3년간 나는 그 주석서를 읽으면서 여러 번 고개가 숙여졌다. 성서공부는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생각하며 Bovon에게 크게 감동받았다. 그 책 4권은 나의 이 해설서에 많은 자극을 주었다. 그는 루카 20,1-8의 제목을 ‘답변없는 질문’(Bovon, III/4, 52)이라고 붙였다. 흥미로웠다. 왜 그랬을까? 성서신학은 답변없는 질문인가? 신학은 답변을 찾는가, 질문을 찾는가? 


예수는 복음, 즉 기쁜 소식을 전했다. 슬픈 소식을 전한 것이 아니다. 종교는, 그리스도교는 기쁨보다 진리를 먼저 말하려는 경향이 있다. 진리를 강조하다 보니 논리, 이성, 언어, 철학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는 사이 기쁨은 저 뒤로 밀려나 버렸다. 정서, 느낌, 교감, 매력 등은 진리보다 한두 차원 낮은 것 정도로 여겨지기도 했다. 종교에서 기쁨이 회복되어야 한다. 종교는 진리 이전에 기쁨으로 인류에게 왔다. 기쁘지 않으면 아직 진리는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지 못하면 아직 복음은 아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특히 복음의 기쁨을 강조하고 있다. 


마르코 12,28-34만 제외하면 루카 20,1-21,4는 마르코를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예수와 적대자들의 논쟁을 소개하고 있다. 종교 주제에서 생각의 차이는 당연하다. 초대 교회와 유다교 그룹 사이에 벌어졌던 갈등이 예수와 적대자들의 논쟁에서 함께 나타난다. 유다 지배층에게 어떤 이유로 예수가 버림받았는지 초대 교회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논쟁에서 상대의 생각도 알 수 있지만 우리 편의 의견도 재확인할 수 있다. 논쟁 있는 조직이 더 건강하다. 


루카 20,1-26에서 예수는 유대 민족의 스승으로 드러난다. 루카복음에서 예수, 예루살렘 군중laos, 예수의 적대자들은 삼각형의 세 꼭짓점과 같다. 마르코와 다르게 루카는 자신의 설명에 군중을 끼워 넣고 있다. 예루살렘 군중이 예수 가르침에서 주인공중 하나로 등장하는 것이다. 군중과 예수 적대자들 사이에 루카는 거리를 두고 있다. 예수의 적대자들은 6절에서 “사람들이 우리를 돌로 칠 것이 아니겠소?” 하며 군중을 두려워하고 있다. 율법학자들과 대사제들은 “사람들이 무서워서 손을 대지 못하였다.”(루카 20,19) 독재자들은 군중을 두려워한다. 촛불집회를 보라. 루카는 군중의 힘을 강조한다. 


▲ ⓒ 최진


본문은 논쟁 이야기다. 다른 논쟁과 달리 구체적인 논쟁 주제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예수 적대자들의 생각이 소개되면서 자연스럽게 군중의 여론도 독자들에게 알려지고 있다. 루카는 마르코 11,27-33을 대본으로 삼았다. 1절에서 예수는 복음을 전하고 있다.(루카 8,1; 사도행전 5,42; 15,35)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등장한(루카 4,14-15) 이후 시작한 일을 똑같이 계속 하고 있다.(루카 4,15; 5,17; 19,45) 죽기 전에도 평소 하던 일을 계속 하는 것이다. 세상이 내일 무너진다 해도 예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고 있다. 


마르코 11,28에서 적대자들이 예수의 성전 항쟁에 대해 주로 추궁했다면, 본문에서는 예수 가르침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Wolter, 640) 그들은 가짜 질문을 하고 있다. 예수 가르침이 어디서 온 권위에 의한 것인지 신학적으로 궁금했던 것은 아니다. 예수를 죽이기 위한 구실을 찾는 것이다. 예수가 유다교 지배층에게 위협적인 큰 인물로 인정되었다는 말이다. 요한복음은 다른 세 복음보다 예수의 권위라는 주제를 더 깊이 다루고 있다.(요한 2,18-22; 5,11-30; 8,37-47) 2절에서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원로들은 예수에게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들을 하느냐 묻고 있다. 율법학자가 아닌 유다교 평신도 예수가 성서를 가르치는 율법학자처럼 감히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 네가 어디서 배워먹은 놈인데 감히 성전에서 성서를 가르쳐?” 하고 다그치는 것 같다. 예수는 레위처럼 사제도 아니요, 바리사이 같은 모범적 평신도도 아니요, 율법학자처럼 전문 신학자도 아니었다. 예수의 학력과 경력, 평신도로서 신분을 꼬집는 말이다. 그뿐 아니다.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또한 예수에게 불쾌했다. 율법학자들과 다르게 예수는 복음을 예수 자신과 연결시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하늘나라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설명하지는 않았었다. 


루카가 왜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라고 단순히 말하지 않았는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Bovon, III/4, 58) 1절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원로들과 함께 와서’ 라고 말한다. 공동번역 성서는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이라고 루카 19,47에서 잘못 옮겼다.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 즉 백성의 지도자들은’ 이라고 번역해야 옳았다.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원로들을 무시했다는 것을 루카는 정확히 말하고 있다. 공동번역 성서는 그 점을 아쉽게도 놓치고 말았다.

 

예수는 논쟁의 달인이다. 함정 질문이라는 프레임에 속지 않는다. 엉터리 질문에 현명한 대응은 질문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가정법 질문에는 아예 답하지 않은 것도 좋은 방법이다. 3절에서 적대자들에게 질문 받은 예수는 답을 하지 않고 즉각 반문을 하고 있다. 반대 질문은 당시 나쁜 뜻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반문은 랍비들과 철학자들 사이에 정당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높이 존중되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소피스트들과 스토아 학파 등에서 널리 유행했다.


질문자가 반문을 받게 되면, 자기 질문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예수의 반문은 적대자들을 곤경에 빠뜨렸다. 적대자들이 답변에 주저한 가장 큰 이유는 군중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나쁜 질문을 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꾀에 속게 된다. 한국 대통령 선거 토론회에서 후보들이 백성을 진심으로 두려워했다면, 그들이 엉터리 질문과 답을 할 수 있었을까. 


▲ 19대 대선후 초청 토론회. (사진출처=JTBC 생방송 갈무리)


4절처럼 하늘과 인간을 대조하는 방식은 신약성서에서 익숙하다.(사도행전 5,38-; 갈라디아 1,1; 테살로니카전서 2,13) 예수는 느닷없이 세례자 요한을 꺼내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적이 없었고 더구나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인 세례자 요한의 권위를 물은 것은 살아있는 예수에 대한 권위 문제를 예수가 대조하려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권위를 예수는 크게 존중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도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의 대화에서 드러났다. 나는 세례자 요한보다 예언자 요한이라고 부르고 싶다. 세례자 요한이라는 호칭이 그의 예언자 면모를 많이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예수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들을 합니까? 누가 그런 권한을 주었습니까? 말해 보시오” 그러나 예수가 우리 각자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합니까? 누가 당신에게 그런 질문을 할 권한을 주었습니까? 말해 보시오” 예수와 논쟁에서 우리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역사의 예수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 즐겨 말하진 않았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예수와 유다교 지배층과 갈등을 드러내는데 망설이지 않았다.(Bovon, III/4, 57) 그래서 본문에 유다교에 대한 초대교회의 감정적 앙금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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