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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가난한 예수 90 : 악한 소작인
  • 김근수
  • 등록 2017-10-03 12: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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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 때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서 그것을 소작인들에게 도지로 주고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었습니다. 10 포도 철이 되자 그는 포도원의 도조를 받아오라고 종 하나를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 종을 때려서 빈손으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11 주인은 다시 다른 종을 보냈는데 그들은 그 종도 때리며 모욕을 준 다음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12 그래서 주인이 세 번째로 종을 또 보냈더니 그들은 그 종마저 상처를 입히고 쫓아 보냈습니다. 13 포도원 주인은 ‘이제 어떻게 할까? 그러면 이번에는 내 사랑하는 외아들을 보내야겠다. 설마 내 아들이야 알아주겠지.’ 하고 말하였습니다. 14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 아들을 보자 ‘저게 상속자다. 죽여버리자. 그러면 이 포도원은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하고 서로 짜고 나서 15 그를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죽여버렸습니다. 그러니 포도원 주인이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16 주인은 돌아와서 그들을 죽여버리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어디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17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똑바로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하신 성경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18 그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은 누구나 산산조각이 날 것이며 그 돌에 깔리는 사람은 가루가 되고 말 것입니다.”


19 율법학자들과 대사제들은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 알고 그 자리에서 예수를 잡으려 하였으나 사람들이 무서워서 손을 대지 못하였다.(루카 20,9-19) 




예수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면서 루카는 예수와 군중의 특별한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루카 19,47-20,1; 20,9) 예수가 적대자를 만나지 않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은 아니다.(루카 19,39, 20,111-2.19) 군중 없는 예수를 상상하기 어렵듯이, 적대자 없는 예수는 없었다. 예수 곁에 거의 언제나 적대자들이 있었다. 주교 곁에 거의 언제나 적대자들이 있는가. 그리스도인 곁에도 거의 언제나 적대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적대자들이 없어서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 적대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로운 것이다. 적대자 없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신앙이 진짜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제대로 사는 그리스도인은 주위에는 적대자들이 꼭 있다. 


마르코 1,21과 다르게 비유를 듣는 사람은 예수의 적대자가 아니라 군중이다. 19절을 보면 율법학자들과 대사제들도 비유를 들었다. 마르코 1,21이 이사야 예언서 5,2를 인용했던 부분을 루카는 삭제했다. 이사야 5,2는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좋지 않은 들포도를 말했다. 루카는 나쁜 포도밭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포도원 소작인을 비판하고 싶었다. 13절처럼 독백은 루카가 즐겨 사용한 문학 기법이다.(루카 12,7; 15,17-19; 16,3) 포도원 주인은 이제 어떻게 할까ti poieso 고민한다. 하느님도 예수도 고민한다.


포도밭을 만드는 일은 짐승 우리를 만들거나 올리브나무를 심는 것과는 다르다. 포도밭은 돌이 많고 가파르며 물이 적고 배수가 잘되는 곳에 적합하다. 포도밭은 담으로 둘러싸였고, 웅덩이나 샘, 그리고 농기구를 보관하는 작은 창고가 있곤 했다. 포도밭을 일군지 4,5년은 지나야 첫 열매가 열린다. 오늘날 포도 재배와 달리 당시 포도나무에 접을 붙이지 않았다. 포도밭에 무화과나무나 과실나무를 심곤 했다. 포도밭을 소작인들에게 도지로 빌려주는 일은 고대에 널리 퍼진 경영 방식중 하나다. 물건이나 돈으로 소작료를 냈다. 


랍비들의 비유에도 포도밭 소작 이야기는 많다. 이사야 예언서 이후로 포도밭은 비유에 즐겨 쓰이기 시작했다. 예수 시대에 포도밭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비유로 자주 쓰였다. 내가 8년을 살았던 독일 마인즈는 라인강가에 위치한 오래된 도시다. 강변 양쪽 비탈에 펼쳐진 포도밭을 내 어찌 잊으랴. 끝없는 포도밭을 보며 나는 성서를 생각하고 예수를 그리워했다. 


약속한 토지 임대료를 내지 못한 경우는 파피루스에 많다. 그런 경우 임대료를 받아내려고폭력을 행사한 기록은 드물다.(Wolter, 646) 소작료를 받기 위해 주인이 소작인에게 폭력을 행사한 이야기가 아니다. 임대료를 내지 못한 소작인들이 주인이 보낸 종들에게 폭력을 행하는 장면이다. 주인은 도조, 즉 포도 수확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 받으려 종을 보냈다. 소작인들은 도조를 한푼도 내지 않고 종을 빈kenos 손으로 돌려보냈다. 도조를 내지 않은 이유는 여럿 있을 수 있지만, 종을 때리며 모욕을 준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당시 갈릴래아 지방의 어려운 경제적 사회적 사정을 루카는 비유에 담았을까. 


첫째 종부터 셋째 종까지 소작인의 폭행은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 첫째 종과 둘째 종은 두들겨 맞았지만 셋째 종은 상처를 입고traumatizo, 즉 피를 흘린 것 같다. 마르코 12,2-5, 마태오 21,34-36과 달리 루카에서는 세 번째 종은 소작인들에게 살해되지 않았다. 포도원 주인은 소작인들이 주인을 생각해서 주인 외아들은 종들과는 다르게 대우할 것을 희망isos하고 있다. 희망isos 단어는 신약성서에 여기에만 나온다. 아들을 죽인 소작인들을 지방 법원은 기소했어야 마땅했다. 


소작인들은 아들을 잡아죽이고 포도원 밖으로 내어던졌다.(마르코 12,8) 그런데, 루카는 왜 “그를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죽여버렸다.”(루카 20,15; 히브리서 13,12-13)로 바꾸었을까? 예수가 예루살렘 성 밖에서 처형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이 뒤바뀜과 별로 관계없는 것 같다. 이 사실은 루카에서 큰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루카 13,33; 24,18) 그보다는 예수 시신이 매장되지 않은 채 버려졌다는 인상을 주기 싫어서였던 것 같다. 그렇게 버려졌다면 시신이 짐승에 의해 훼손될 수도 있었다. 하느님이 보내신 예언자들의 운명을 루카는 비유로 말하고 있다. 


16절에서 돌아온 주인이 소작인들을 죽여버린다고 했다. 하느님의 심판을 강하게 표현한 것 같다.(이사야 35,4; 66,15; 시편 50,3) 포도원을 맡길 다른 사람들은 누구일까? 사마리아인? 이방인? 사도들? 그리스도인? 답변하기 쉽지 않다. 문맥으로 보아 그리스도인을 가리킬 것 같다. “어디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루카에만 나온다. 17절에서 예수는 아들을 돌에 비유한다. 히브리어로 아들이란 단어와 돌이라는 단어는 비슷해서 그렇게 비유한 것 같다.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하신 성경 말씀은 시편 118,22를 인용한 것이다. 이 말은 베드로전서 2,4에도 나온다. 모퉁이의 머릿돌kepale gonias는 모퉁이의 가장 큰 돌이라는 뜻이다. 건물의 위치와 방향을 저하고 건축이 시작되는 돌을 가리킨다. 요아킴 예레미아스의 계속된 주장, 즉 대문 위에 올려놓는 준공 돌을 또한 뜻한다는 의견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런 사례는 성서 이후 문헌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이다.(Wolter, 649)


모퉁이의 머릿돌에 부딪히면 넘어지거나 충격을 받기 쉽다. 머릿돌이 마치 심판처럼 아픈 역할에 비유되고 있다. 예수 위에 떨어지는 사람도, 예수 밑에 깔리는 사람도 심판받을 것이다. 예수에 대한 태도가 심판을 좌우한다는 뜻이다. 


루카는 지배층과 백성을 구분하고 있다. 지배층은 예수를 죽이려 하고, 백성을 두려워한다. 백성이 예수를 죽이려 하진 않는다. 백성은 예수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19절에서 율법학자들과 대사제들은 예수를 처형시킬 음모를 예수에게 사람들에게 들킨 것인가. 율법학자들과 대사제들이 예수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예수 제자들과 군중은 알고 있었을까. 지금 성서 독자들은 쉽게 이해하지만 당시 예수 제자들과 군중은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겠다. 그들에겐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이니 말이다. 


율법학자들과 대사제들은 사람들이 무서워서(루카 19,47-; 22,6) 예수에게 손을 대지 못하였다. 지배층은 백성을 무서워해야 마땅하다는 루카의 생각이 담겨 있다. 성직자들은 평신도를 무서워해야 한다. 백성을 무서워하지 않는 지배층, 평신도를 무서워하지 않는 성직자는 자멸한다. 지배층을 깨우치려면 백성이 올바로 깨어 있어야 한다. 성직자를 는 깨우치려면 평신도가 올바로 깨어 있어야 한다.


본문은 부활 이후 초대교회 상황에 어울리는 비유다. 그래서 예수가 진짜 한 말은 아니고 초대교회가 지어낸 이야기로 여겨지고 있다. 이 비유가 생긴 이후 나쁜 소작인과 버려진 주인의 아들을 돌과 연결시켜 설명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예수 가르침이 성서와 일치될 뿐 아니라 부활과 연결하려는 의도에서였다.(Bovon, III/4, 71) 


예수가 자신을 비유에 나오는 아들로 생각했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유다교 지배층에 의해 버림받은 예수 운명이 비유에 나오는 아들과 어울리긴 한다. 비유에 나오는 유다교 지배층처럼 우리가 예수를 버리면 안 된다고 루카는 말하고 싶었다. 교회 안에서 예수를 버리고 쫓아내는 성직자는 없는가. 예수를 버리고 쫓아내는 평신도는 없는가. 예수는 교회 안에서 교회에 의해 버림받고 있다는 말이 자주 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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