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사이파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요한복음 3, 1-21은 ‘예수와 니고데모와의 대화’다.
니고데모는 누구인가? 당대 최고의 석학이고 바리사이파였고, 유대인 귀족가문 출신이다. 니고데모는 다른 복음에는 등장하지 않고 유독 요한복음에만 3차례 정도 나오는 인물이다. 요한 저자가 ‘예수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넣은 것은 율법을 대표하는 니고데모를 통하여 예수의 율법관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니고데모가 예수를 ‘선생님’으로 호칭하는데, 이 뜻은 예수를 율법에 대해서 가르쳐줄 선생님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율법제도를 새롭게 개혁할 메시아로 보는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께 가는 길은 율법을 따라 살 때 가능한 것이고, 율법 준수만이 생명의 길로 여겼다.
율법주의에 물든 자와 예수가 만나서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것이 이 복음의 핵심이다. 요한복음 3,3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본래 원문은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이다.
‘위’는 위에서 오는 것이다. 곧 ‘성령’이다. 상대적으로 ‘아래’로부터 오는 것은 ‘율법’이다. 율법을 지켰다고 하느님께 가는 것이 아니며, 율법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메시아를 율법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데, 그러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율법의 나라가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으로부터 오고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자들이 볼 수 있는 나라인 것이다.
교회가 법과 제도와 조직을 만들어놓았다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생명이 하느님으로부터 왔고, 그분이 주신 생명으로 사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삶이다.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의미는 율법주의에 갇힌 자들, 교회 제도에 갇혀서는 하느님 나라를 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들은 밤에 속한 자이고, 어둠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으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를 못한다. 율법과 이념이 전부이기 때문에 어떤 가능성을 찾기가 힘들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우리 생명은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진리다. 교회라는 제도와 조직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영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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