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장은 ‘나눔과 생명 사건’이다. 우리는 흔히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이라고 부르는데 사건의 본질은 ‘생명은 나누는 일’이라는 예수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예수를 따라갔다.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는 예수는 사람들의 삶에 언제나 함께 하시는 분이다.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 가난, 질병, 이별, 전쟁, 폭력, 절망, 희망과 불행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운명에 동참하는 분이 예수다.
그들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기적을 보았던 것이다.
이 사람들을 먹일만한 빵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예수는 무리를 보시고 제자들에게 묻는다. 이처럼 예수는 공동체에서 함께 의논하고 고민하며 대화하며 결정하신다. 필립보는 돈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를 보였고 세례자 요한의 제자인 안드레아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한아이가 빵과 물고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예수는 이 아이가 내놓은 빵으로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하셨다. ‘한 아이 = a boy’. 아이는 예수 공동체의 특성을 나타낸다. 하느님 나라의 특성은 아이로부터 발견된다. ‘약하고 가난한 아이가 빵을 내 놓는다’ 즉, 섬기는 공동체를 드러낸다.
‘안드레아’의 뜻은 ‘완성된 사람’이다. 예수 공동체는 이 세상에서는 약하고, 가난하지만 완성된 사람들의 공동체다. 완성의 의미는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감을 말한다.
요한복음 6,10에서 그들에게 “사람들을 모두 앉혀라”(공동번역)고 분부하셨다. 원문은 “사람들을 눕혀라”도, ‘사람들은 풀 밭 위에 누웠다’로 되어있다. 그 당시에는 식사를 누워서 했다. 가령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음식을 먹었다. 그러나 노예들은 서서 식사를 했다. 자유인들은 누워서 먹었다. 예수는 당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자유인으로 대우했다는 표시다.
예수는 빵을 들고 감사하고, 나누어 주었다. 이 빵은 하느님으로부터 한 아이를 통해서 온 하느님의 것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은 하느님의 것이다. 하느님의 것은 모든 사람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내 것을 내놓는 것이다. 하느님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 자는 나눌 수가 없다.
한국 교회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 아직도 부족하다고 끊임없이 축적하고 소유에 집착하고 있다. 교회마다 재산분쟁, 탐욕에 의한 횡령과 유용이 심각하다. 오늘의 교회가 과연 예수 공동체로서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는가? 서민들의 애환과 빈곤, 절망에 얼마나 민감하며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사회복지 사업을 한다고 자족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는 실제로 나누었고, 실제로 섬겼고, 실제 그들과 더불어함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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