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혁명은 같이 ‘나누어 먹는 혁명’이다. 하느님의 절대 명령으로 “나누어 먹으며 평등하게 살라”는 과제를 주셨다. 사회적 불평등 구조와 경제적 소득격차가 심한 사회는 하느님 앞에 죄를 범하는 신성모독적인 사회다. 하느님은 이런 차별 사회를 만든 일차적 책임을 교회에게 묻는다. 교회가 복음을 삶으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행복지수가 후퇴하고 범죄가 만연한 불행한 사회로 변질된다. 따라서 복음을 생명으로 하는 교회는 경제정의, 사회의 공동선과 인권 지킴이로서 가장 선봉에서 최선의 책임을 져야하는 하느님의 공동체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는 낌새를 알아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피해 가셨다. (요한복음 6, 15절)
사람들은 빵의 표징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의 의도와는 반대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예수에게 우리의 왕이 되어 달라고 부추겼다. 예수는 섬김을 받는 자로서가 아닌 섬기는 자로서 오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에게 우리의 섬김을 받으라고 요구한다.
이것은 예수가 40일간 광야에서 받은 사탄의 유혹을 떠올리게 한다. 당신에게 세상의 권력을 줄 터이니 왕이 되어달라는 요구를 받으신다. 예수는 단호히 거부한다. 하느님 나라는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공동체다. 사람들은 예수가 모든 권력과 명성을 다 가지고, 대신에 사람들을 배부르고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해달라고 기대한다.
우리나라도 10년 전에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선택한 이유는 ‘부자만 되게 해달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이명박은 권력을 차지하고 국가와 국민들을 더 비참한 가난의 궁지로 몰아넣고 자기 혼자만 벼락부자가 되었다.
한국에 예수를 믿는 자들이 50%라고 하는데 대부분이 이명박을 지지했다고 본다. 예수를 믿는다고 자처하지만 실생활은 예수의 말씀을 듣지도 않았고 예수를 따르지 않음이 드러난 것이다. 한국 종교인들의 위선은 이명박을 통해 명백하게 밝혀졌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권력의 노예, 물질 탐욕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표징을 보여주었지만 사람들은 자유인이 되려 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지배당하고 노예처럼 살려는 자세를 버리지 못한다.
정말 잘들어두어라,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내 표징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6, 26절)
우리는 과연 자유인으로 사는가? 예수의 자유는 성령을 받은 자로서의 자유다. 나의 생명이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것과 하느님이 나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진리를 제대로 알고 산다면 우리는 결코 누군가에게 노예처럼 지배당하지 않는다.
나에게 생명의 양식을 베풀며 살도록 해주시고, 나에게 물질적 혜택을 제공하며 복음을 살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뿐이시다. 신앙은 노예살이에서 해방되어 모두가 평등하고, 섬기며 존중하는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것이 목표인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고, 이것이 축복이다. 이런 자유의 삶을 지금 여기서 살다가 죽어서는 천국에서 생명의 무한한 영원성이 보장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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