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장 7절 이하를 나누고자 한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세상은 나를 미워한다. 내가 세상을 두고 그 일이 악하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요한 7,7)
사람들은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신들은 억압과 소외를 당하면서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해방을 갈망하지 않고, 당당한 주체적 인간으로 살기보다는 노예처럼 길들여져 무감각하게 살고 있다.
예수를 불신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조직에 길들여진 사람들, 억압하는 자를 향해 저항하지 않는 사람들, 권력에 아부를 일삼고 주체적인 삶을 포기한 사람들은 예수를 떠난 사람들, 예수를 버린 사람들이다. 해방의식,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아존중, 세상에 대한 책임감 등이 신앙의 척도가 되는 것이다.
예수는 사람들 몰래 초막절을 지내러 유대지방으로 올라가신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두 파로 나뉘는데 ‘그는 좋은 분’이라고 하는 사람과 ‘그분은 사람들을 속인다’고 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유대인들은 두려워서 예수에 관하여 내놓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두려움은 하느님을 불신하는 태도다.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하느님의 못 보는 것이다. 진실을 말하는 이들은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예수를 신뢰하는 이들은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 누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고만 하면, 이 가르침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인지 내가 스스로 말하는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요한 7,16-17)
두려움은 불신의 표시이며, 신앙을 포기한 자들의 비겁함이다.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면 하느님 앞에서도 자기를 감추는 자가 된다. 두려움 때문이다.
진실은 용기 있는 자만이 선포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미투운동’은 용기 있는 여성들이 일구어낸, 폭력에 대한 용기 있는 저항이다. 대한항공 총수 집안의 조현아 땅콩 회항도 박창진 사무장이 용기 있게 폭로했기 때문에 그 사건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누군가 용기 있게 진실을 고백한다면 어둡고 부패한 세상은 밝아지게 되고 변화를 가져온다. 검찰 내부의 성폭력이 만연했지만 서지현 검사가 용기 있게 나서면서 검찰의 추악한 치부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여검사를 성추행한 안태근 검사가 개신교 교회 예배에서 “나는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고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아 다시 태어났다고 했다.”고 고백했다.
하느님은 피해 당사자에게 가서 무릎 꿇고 진정성 있게 용서를 청하고 책임지기를 바라시는데, 피해자와 아무 상관도 없는 예배당가서 셀프 용서를 청하고 셀프 용서를 받는 엉터리 신앙이 한국 교회에 만연해있다. 소위 열심한 신앙인일수록 두려움이 많고, 주체의식이 희박하고, 책임의식이 결여된 것은 한국교회의 주류 신앙이 복음과는 동떨어진 허상임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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