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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예수 5
  • 김근수 편집장
  • 등록 2015-06-10 11:21:06
  • 수정 2015-08-20 12: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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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67 아기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 68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69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70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71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72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73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74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75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76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77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입니다. 78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루가복음 1,57-80)




요한의 탄생과 이름 지음, 요한 탄생의 뜻을 알려주는 즈카르야의 노래를 다루는 이야기다. 57절에서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는 사실은 레베카의 출산 소식을 전하는 대목처럼(창세기 25,24) 간단히 언급되었다. 58절에서 이웃과 친척들은 함께 기뻐하였다. 기쁨은 특히 루가에서 신앙의 특징으로 강조되고 있다. 출생 8일째 할례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느님과 계약의 표지(창세기 17,11-; 레위기 12,3) 그리고 이름 짓는 날이었다.


예수 시대에 이날 이름을 짓거나 이웃과 친척이 이름 지었던 사례를 말해주는 기록은 없다. 아기가 아빠 이름을 따르는 일은 불가능하진 않으나(신명기 3,14; 열왕기상 16,24), 흔하지 않았다. 아기는 보통 할아버지 이름을 따랐다. 신체장애는 사제직에서 제외되는 이유였기에 사제 가문에서 심각하게 여겨졌다. 사제 가문 아닌 집안에서 신체장애를 가진 아버지는 아들이 아버지의 아픔을 복구하길 바라는 뜻에서 아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주기도 하였다. 가톨릭교회에서 신체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사제직과 수도직의 문은 지금보다 더 넓어져야 한다.


61절에서 사람들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반대한 것은 이름과 혈통을 연결하는 관행 때문이었다.(판관기 17,7; 룻기 2,1; 이사야 38,12) 62절에서 엘리사벳이 즈카르야에게 ‘손짓으로 물었다’는 표현은 즈카르야가 말을 못할 뿐 아니라 듣지도 못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63절에서 ‘글 쓰는 판’은 이름 짓는 의식에 그런 절차가 있었다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 놀라움은 마르코나 마태오보다 루가에서 더 큰 비중을 지니고 있다. 64절에서 즉시parakrema는 치유를 설명할 때 나타나는 루가의 독특한 특징이다. 신약성서에서 마태오 21,19 이하를 제외하면 루가에서만 보이는 단어다.(루가 4,39; 5, 25; 사도행전 3,7)


마리아의 마니피캇과 즈카르야의 베네딕투스는 자주 비교된다. 그런데, 믿음의 마리아와 의심하던 즈카르야로 대조하지 말고, 혀가 풀린 후 즈카르야와 믿음의 마리아를 나란히 보아야 한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그 첫 단어를 라틴어 번역성서 불가타Vulgata를 따라 benedictus(찬미받으소서)로 불린다. 공동성서 전통에 서 있는 시편이요 감사기도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의 구원행위, 백성의 구원됨, 하느님의 말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수 제자들에서 나온 전승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서 전해진 전승을 루가가 받아들여 조금 손질한 것 같다. 노래에서 요한은 중심인물이 아니라 하느님 구원행동의 증인이자 예수를 준비하는 역할로 소개되고 있다.


예수 당시 유다교는 출구가 막혀 숨쉬기 어려운 답답한 신세였다. 하느님의 구원경험과 말씀은 먼 옛날의 추억으로 여겨졌다. 각종 외래문화와 종교가 이스라엘에 유행하였다. 가난한 백성들은 어디에 희망을 둘지 몰라 헤매었다.


그때 세례자 요한과 예수가 등장한 것이다. 가난한 백성들을 받아주는 유다교내 그룹은 없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만 가난한 백성들을 받아주었다. 오직 예수만 여성을 제자로 받아주었다. 지금 그리스도교 상황이 그때 유다교 사정처럼 막막한지 모르겠다. 지금 해방신학과 프란치스코 교황이 등장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요한 이름은 흔한 이름이었다.(느헤미야 12,13; 마카베오상 2,1-; 요한묵시록 1,9) 자비는 공동성서 그리스어 번역본 70인역septuaginta에서 eleos 또는 karis로 옮겨졌다.


68절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공동성서에서 자주 보이던 표현이지만, 신약성서에서 루가의 작품을 제외하고 전혀 보이지 않는다.(루가 1,16; 사도행전 13,17) 복음서는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분열 과정에서 쓰여졌음을 암시한다.


68절에서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느님은 인류 역사를 바라볼 뿐 아니라 인류 운명에 직접 참여한다. 하느님은 사람을 처벌하기 위해 찾아오시고(시편 88,39) 구출하기 위해 찾아오신다.(창세기 50,24-25; 탈출기 3,16; 이사야 23,17) 하느님은 로메로 대주교와 함께 엘살바도르를 방문하셨다. 불의한 세력들아, 악인들아 들어라, 하느님께 죄를 지으면 하늘 아래 숨을 곳이 없다.


69절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개인을 ‘일으킨다.’(판관기 2,16; 에레미아 23,4) ‘뿔’keras은 동물 세계에서 가져온 단어로 힘(사무엘상 2,1; 욥기 16,15), 하느님을 나타낸다.(사무엘하 22,3; 시편 154,18-)


Soteria구원자 단어가 루가에서 처음으로 여기서 등장하고 있다.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가 꼭 배울 점이 있다. 기도와 백성의 역사를 연결하는 것 말이다. 가난한 사람, 고통 받는 희생자의 아픔이 들어 있지 않는 기도는 아직 기도가 아니다.


70절에서 ‘거룩한 예언자’라는 표현이 있다. 예언자는 이미 거룩하다. 거룩한 사람만 예언자일 수 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예언직과 예언자의 역할은 크게 약화되었다. 20세기 해방신학에 들어서 예언자의 역할이 비로소 회복되고 있다. 한국천주교회에서 예언직의 비중은 아주 적다. 예언직이 빈약한 교회는 아직 진짜 교회는 아니다.


71절은 ‘해방자’ 하느님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창조주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듣기 익숙했지만 해방자 하느님은 그렇지 못했다. 그런데 공동성서의 하느님은 1차로 해방자요 2차로 창조주였다. 하느님을 해방자로 부르는 연습이 그리스도교에 꼭 필요하다.


73절에서도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임무는 영토 확장이 아니라 백성의 해방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거룩함과 정의는 함께 간다. 신앙과 정의는 같이 일어서고 같이 넘어진다. 정의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76절에서 아기 요한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로 불린다. 요한은 먼저 예언자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요한은 주로 세례자로 불렸지만 예언자로 불리진 않았다. 요한은 예언자였기 때문에 세례자였지, 세례자였기 때문에 예언자였던 것은 아니다. 요한을 생각하면 세례를 떠올리지만, 그가 불의한 권력을 비판하고 저항했던 사실을 기억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많다. 그래서는 안 된다.


77절에서 요한의 예언자 역할은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여기서 gnosis는 ‘알다’가 아니라 불트만의 해석처럼 ‘깨우쳐주다, 회개시키다’ 뜻이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다.(루가 3,3; 사도행전 10,37; 13,24)


예언자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백성을 깨우치고 회개시키는 일이다. 80절에서 아기의 성장은 삼손(판관기 13,24-), 사무엘(사무엘상 2,21. 26)처럼 묘사되었다. 아기 요한이 어릴 적부터 정말로 사막에서 살았다거나, 쿰란 공동체에 들어가 살았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는 없다.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과 연결되고 예수와도 연결되는 중간 지점에 있다. 세례자 요한을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를 연결하는 인물이다. 그는 유다교에서 마지막 예언자요 신약에서 최초의 예언자다.


세례자 요한은 베드로나 바울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 그렇게 인정되어 오지 못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의 스승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베드로나 바울 없어도 예수는 있지만, 세례자 요한 없는 예수는 존재할 수 없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에서 요한은 예수와 다른 역할을 받았다. 우리도 각자 다른 역할을 받는다. 서로 역할을 인정하고 서로 돕고 배워야 한다. 성직자들이 교회에서 모든 역할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평신도는 자기 역할을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을 교회 안에 가둘 수 없고, 마음속에 가둘 수 없다. 하느님의 구원은 역사 안에서 모든 인류에게 연결된다. 교회는 하느님 위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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