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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이 사람은 나 없인 살아도 죽은 목숨이에요…’
  • 전순란
  • 등록 2018-09-07 11: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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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6일 목요일, 흐리고 비 뿌림



아침미사를 끝내고 식사를 하며, 오늘 어디를 찾아갈까 의견을 구하니 아들네는 ‘서귀포자연휴양림’을, 수녀님네는 김대건 성인이 중국에서 밀항하여 제주에서 걸었던 길을 돌아보라는 권유. 확실히 수녀님들이 신부님들보다 더 거룩하시다. 우리는 서귀포휴양림을 걷기로 했다. 너무 빨리 천국에 가면 곤란할 것 같아서….


지난 번 ‘붉은오름’을 돌고 점심이 늦어 고생을 했기에, 아들이 싸주는 도시락까지는 꿈에도 불가능한 일이라, 속편하게 ‘24시간 편의점’에 가서 겉모양 그럴듯한 도시락 두 개를 사서 배낭에 넣고 막 떠나려는데 비가 흩뿌리기 시작한다. 도시락을 안 샀으면 집으로 돌아갈 뻔했는데 도시락 먹기 위해서라도 우산을 챙겨들고 가는 수밖에…


1115도로를 달려 ‘서귀포자연휴양림’에 도착하니 우리처럼 우산을 쓰고 숲을 들어서는 사람들 차량이 여나믄 대 주차해 있다. 다른 때 같으면 줄을 서서 걸을 곳인데 날씨가 도와줘 한가하다. 숲 중간쯤 들어서자 가랑비가 멈춘다. 


보스코는 핸폰을 자꾸 꺼내 특사단의 방문성과 뉴스를 전해 들으면서 적이 안도하는 표정이다. 정말 저러다 문대통령 노벨평화상 받으면 이 나라 보수꼴통들 스톡홀름으로 몰려가 수상반대, 통일반대, 한반도 전쟁촉구 태그끼집회라도 해야 할 텐데…



‘법정악 전망대’에 오르니 멀리 강정마을이 보이고 안개 속에 희미한 방파제와 범섬, 해군기지아파트가 엄연한 현실이 되어 존재한다! 그때의 싸움과 분노, 우리의 패배 등… 우리가 놓친 모든 아픔마저 희미한 안개 속에 가물거린다. 저기에 다음 달 승전기를 단 일본함대가 들어오고 미국 항공모함이 들어와 개항식을 한다니… 역사를 잊어버리는 민족은 세계사에서 사라진다는데…. 더구나 우리 촛불집회가 출범시킨 문재인정부에서 갖는다는 행사여서 더 가슴 아프다.


핸폰에서 검색해보니 서귀포에 틀림없이 ‘아쿠와리움’이 있다 해서 주소를 찍고 갔는데 흔적이 묘연하다. 편의점에 들어가 물었더니 중국 기업과 결탁해서 그런 걸 한다고 한참 소문이 나더니 사드사태 이후에 감감무소식이란다. 편의점 옆의 귤 밭도 평당 30만원하는 걸 중국인이 평당 100만원에 사더니 서울사람에게 평당 350만원에 팔고는 사라졌단다. 


우리가 묵는 금악에도 엄청 큰 샤브샤브집이 있는데 중국관광안내원이 건물이 너무 작다고, 크고 화려하게 지으면 손님을 엄청나게 데려오겠다 해서, 대추나무에 연줄 걸리듯 여기저기 빚을 얻어 크게 4층으로 지었는데, 중국인들이 발길을 끊자 빚에 못 이겨 부도가 났단다. 


사기에 걸리든 헛소리에 속든 인간의 욕심이 모든 화를 부른다. ‘욕심스런 사람들이 잇속에 더 밝은 중국인들에게 여러 형태로 속고 털리고 이제는 허탈하게 멘붕에 빠진 게 제주도민’이라는 편의점 주인의 한탄….


휴양림을 걸으며 같이 안내를 받던, 은평구에서 왔다는 아줌마들이 어제 마라도를 갔는데 같은 배로 갔던 부부가 파도에 휩쓸려 죽는 광경을 보았노라며 몸을 떤다. (어제밤 뉴스에 나왔다) 파도가 치는 물가에서 사진 찍는다고 바위 끝으로 다가서더니만 시멘트가 덮인 구석, 물이끼에 여자가 미끄러졌고 대책 없이 아내를 구하겠다고 물에 뛰어든 남편과 함께 익사하는 장면을 지켜보았단다.



우리 둘을 보고 그 아줌마들이 ‘그런 경우라면 어쩌겠느냐?’고 보스코에게 묻는다. 그가 ‘함께 죽는 게 낫지 않겠어요?’ 란다. 무슨 ‘효녀 심청이’라고 대책도 없이 물에 뛰어들겠다는 건지 내가 변명을 해야 했다. ‘이 사람은 밥해먹을 능력도 앞가림할 능력도 전무해서 나 없인 살아도 죽은 목숨이에요.’ 입 달린 노인을 대변하는 아내의 말에 어리둥절하는 아줌마도 있고 고개를 끄덕이는 아줌마도 있는데 아무튼 나는 땅에서 살만큼 살다가 죽고 싶지 물에서 익사하기는 싫다.


오후에 ‘숨비소리’에 설치할 돔 형태의 텐트가 중국에서 도착했다고 빵고신부가 수녀님댁 트럭을 빌려 제주항에 가서 싣고 왔다. 무게가 600kg이나 되는 물건을 세관에서 통관하고 끌고 와 지게차로 내렸고, 조립까지 자기가 해야 한단다. 갓 시작하는 이곳 시설의 모든 일을 몸으로 부딪치며 기쁜 마음으로 해내는 품이 ‘이젠 쟤도 어른이구나!’ 싶어 흐뭇하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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