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9일 화요일, 흐림
텃밭에선 아욱, 열무, 상추, 가지, 토마토, 쪽파, 호박… 모두 함께 어깨동무하고 ‘으쌰! 으쌰!’ 외치듯이 한꺼번에 자라오르니 말리지도 못하고, 하루건너 한 번씩 김치를 담근다. 미루가 준 오이로 소박이까지 담고 나니 열무 물김치, 알타리 김치까지, 김치만 세통. 나만 성가시게 하는 게 아니고 이웃들에게도 김치들 좀 담가먹으라고 조르면서, 어제는 카타리나씨에게, 오늘은 방곡 사는 승임씨에게 전화를 했다.
승임씨네는 집이 산청 왕산 발치여서 옹기 굽는 백토가 나오는 곳이라 여간해서는 씨앗이 눈도 못 뜨며 뿌리 내리기는 엄두도 못 낸다. 방부목으로 사방 2m짜리 텃밭을 만들어 상토를 채워 씨를 뿌리기는 했는데, 무랑 상추가 싹이 날 때부터 그 일대에서 그동안 굶주렸는지 ‘무료급식소’ 모여드는 노숙자들처럼, 모든 생명들이 줄지어 와서는, 염치도 상식도 잊은 채 뿌리만 남겨 놓고는 싹 먹어버리더란다.
오늘 휴천재에 열무를 뽑으러 와서도, 너무 잘 자란 우리 집 채소의 귀티 나는 용모에 기가 죽어, 실컷 가져가라 해도, 굶주린 사람이 한꺼번에 많은 밥을 못 먹듯, 욕심도 못 낸다. 내가 나서서 양껏 뽑아 주고 ‘누가 더 필요할까?’ ‘더 줄 사람 없을까?’ 궁리 중이다. 동네 아짐들은 제각기 자기 밭에 나만큼 가졌으니 관심도 없다.
그러다 담근 김치 가져다 줄 사람을 찾았다! 귀요미 미루! 열흘 넘게 축제에서 장보느라 살림은 손에서 멀겠기에 축제 마지막 날 힘도 실어줄 겸 보스코랑 찾아갔다. 산청약초 축제 마당에서 꽃차와 꽃젤리를 파는 모습을 몰래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징그랍게 짠하다’. 물건이라도 잘 팔리면 그 재미라도 있겠지만 지자체마다 다들 하는 축제요, 축제마다 내놓는 물건이 어슷비슷하고, 음식가게들도 오십보백보라 흥미를 크게 못 끄는데다 기간은 왜 그리 긴지…
국수 한 그릇 같이 먹고, 얼굴 한번 보고, 산청 ‘동의보감촌’을 넘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구절초는 어찌 그렇게 흐드러지게 피었는지… 나 혼자 보기 아깝다. 축제가 끝나면 미루네 데리고 산내 강병규 쌤네 ‘길섭갤러리’에 가서 눈이 물리도록 구절초를 보여줄 생각이다. 견물생심(見物生心). 그 도로변 꽃에는 손을 못 대고, 휴천강을 따라오면서 강가 외진 곳에 구절초 꽃씨가 떨어져 아직 피어나지는 않은 어린 구절초 모종을 잔뜩 뽑아왔다. 꽃도둑은 도둑질이 아니라고 달래면서…
집에 돌아오자 보스코를 시켜 텃밭가 해바라기 진 곳과 화단을 손질하게 부탁하고서 나는 그 화단 한 구석 잡초를 뽑고서 훔쳐온 구절초를 심었다. 우리 동네도 몇 해 후면 산청 동의보감길처럼 구절초길이 되기를 꿈꾸며… 문익점도 나라 백성을 위해 붓 뚜껑에 목화씨를 숨겨왔다는데, 문상마을로 오르내리는 문하마을 사람들 보라고 한 일이니 하늘이 꽃도둑은 봐주시겠지.
뉴스 볼 시간도 없이 바빴는데, 실비아씨가 카톡을 보냈다. “문대통령, 김정은 ‘교황 북 초청’ 메시지 들고 유럽 순방!”이라는 제목! 어제 김희중 대주교님이 보스코에게 전화를 하신 게 바로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으셨구나!
일 년 반 전 문대통령 특사로 대주교님이 보스코랑 교황청 특사로 파견되어 그곳 인사들과 회담한 결과가 ‘군사훈련과 적대관계 중단’, ‘북미회담’, ‘교황의 북한 방문’ 등등의 좋은 열매로 영글어 가는 정세에 내 가슴이 뛴다.
교황청이 수 십 년 추구해온 바가 중국이라는 ‘13억짜리 선교지’의 빗장문을 푸는 일이어서, 특히 그 전문가인 파롤린 추기경이 국무원장(총리)이 되어 추진해온 숙원사업이어서, 며칠 전 중국교회의 주교임명 문제를 두고 교황청과 중국정부 사이에 협정이 이루어졌다는 뉴스에 보스코가 싱글벙글하는 까닭을 알 만하다. (엊그제 개막한 세계주교대의원총회에 사상 처음으로 중국교회의 대표주교 두 명이 참석했다)
오늘의 뉴스는 보스코가 15년 전부터 꿈꾸던 숙원사업이고, 기회 닿을 때마다 교황청 고위층에 그가 호소해온 사안이다. 문대통령 평양방문에 수행한 김희중 대주교님이 대통령을 설득하여 김정은 위원장에게 제안케 했으리라. 남한 대통령이 북한 국가원수에게서 ‘교황의 방북을 환영하겠다!’는 메시지를 얻어내다니! 때마침 보스코가 ‘가톨릭프레스’와 나눈 대담이 오늘 떴으니 우연의 일치치곤 참 경사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