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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한 결심들로 포장되어 있단다!’
  • 전순란
  • 등록 2018-11-19 10:5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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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18일 일요일, 흐림



오늘 공소에서 저녁 7시 30분에 본당신부님의 저녁미사가 있다. 신부님은 공소를 돌면서 다니시니 매주 공소미사가 있지만 공소는 신부님이 오시는 그날이 기다려지는 잔칫날. 하지만 공소예절에도 공소미사에도 제일 많이 빠지는 사람들이 우리 부부다.


보스코의 강연과 내 활동, 또 두 아들이 서울 오면 함께 가 있다 보니 그만큼 공소에서 멀어져 있다. 신부님도 수녀님도 오늘 저녁 ‘티브이에서 봤습니다’라는 인사를 건네오지만 ‘공소에선 못 봤습니다’라는 말씀이 곁들여진 듯해서 좀 미안했다.


신부님은 ‘가난한 사람들의 주일’인 오늘, 아프리카 케냐 카렌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한국 수녀님의 글을 전하셨다. 어느 날 선교사 신부님이 돌아가셔서 수의를 입히고 시신을 안치했는데 밤새 누군가 수의를 벗겨갔더란다! 자, 이 일은 누구 탓일까? 너무 가난하여 수의라도 벗겨 입어야 하는 가난? 케냐라는 큰 나라를 이런 빈곤에 빠뜨린 정치가들? 이런 얘기를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우리 자신?



‘모두에게 죄가 있지만 적어도, 수의를 훔쳐다 입은 사람의 죄가 제일 작을 게다’라면서 신부님은 ‘지옥 가는 길은 선한 결심들로 포장되어 있단다. 선한 일을 하겠다는 결심들(실천 없는 결심들)로 포장된 삶이 지옥 길이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


오늘은 저녁미사를 염두에 두고 아침에 법화사 길을 걸었다. 보스코에게 아침으로 야쿠르트와 계란 그리고 토마토만 주고, 떡과 차는 절에 도착해서 먹이니 배가 덜 불러서인지 어제보다 훨씬 덜 헐떡인다. 보스코가 60년대 초 청년시절 해마다 설악산 등산 가던 얘기. 걸음이 제일 늦고 힘들어 하는 사람이 뒤로 처지면 한 가지 꾀를 냈단다.


제일 잘 걷는 사람이 먹을 것을 지고서 앞서 가며 ‘정상에서 기다리겠노라!’ 하면 배가 고파 점심을 먹기 위해서라도 정상까지 따라오더란다. 그때도 몸피가 있고 뚱뚱한 친구가 걷기 힘들어 했고 자기는 작고 가벼워 비교적 잘 걸었단다. 지금은 저렇게 잘 먹여 살을 찌워 놓았으니 내 죄가 크다. 하지만 오늘 어제보다 수월하게 걸은 까닭은 자기 먹을 것을 자기가 지고 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인생도 등산길도 십자가보다 음식가방을 메고 가는 편이 발걸음이 가볍다.


법화사 주지스님은 우릴 볼 적마다 점심공양을 하고서 내려가라 하지만 담에 먹겠다고 사양했다. 정말 절은 인심이 좋다. 때 되서 오는 중생이면 모두 나누어 먹인다. 불전에 올린 예물도 나누어 먹인다. 성당에서도 뭔가 주긴 주는데 (혀에 얹자마자 녹아버리는) 밀떡을 딱 한 개 준다, 그것도 세례 받은 이들에게만. 불교와 가톨릭의 큰 차이다.


미사 후 공소 식당에서 간식을 나누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또 법화사 스님의 인심을 떠올리면, 오늘따라 인천에서 배고픈 이들에게 정성껏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는 ‘민들레 국수집’ 서영남섐이 생각난다. ‘이 사람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말씀을 수십년 동안 실천하는 분이어서 참 고맙다. 무슨 까닭인지, 인천교구는 ‘이 사람 자선은 교회가 하는 일 아니오!’라고 주보에 공지를 하였다.


전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호화병원을 짓고, 전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비싸고 고급스런 양로원을 지은 교구가 고갯마루에서 평신도가 하는 무료급식소를 찾아와 ‘평신도가 자발적으로 하는 일은 교회일이 아니니 도와주지 마시오!’라는 방을 붙이고 간 셈이다! 자선가를 자선가로, 예언자를 예언자로 대접하는 것만으로도 자선가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는다는 예수님 말씀이 있는데… 지난주가 ‘평신도 주일’에다, 오늘이 ‘세계 가난한 이의 날’ 주일이어서 인천교구의 저 심술이 유난히 돋보인다.


오랜만에 시아 시우와 통화를 하고 며느리와 큰아들 얼굴도 보았다. 작은 아들은 오늘까지 살레시오회 총장님의 한국방문을 수행하면서 통역을 했는데 오늘 떠나신 ‘큰어른’ 옆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웠단다. 내일은 다시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애 보러’ 간단다, 자기 자리에서 제각기 열심히 사는 아들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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