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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존엄에 대한 감수성과 공감능력을 발휘하는 일
  • 이기우
  • 등록 2019-03-29 18:5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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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3주간 금요일 : 호세 14,2-10; 마르 12,28ㄱㄷ-34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첫째가는 계명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유다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주신 계시 진리가 바야흐로 예수님의 오늘 복음 말씀으로써 본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유다교의 시대적 사명은 다하고 그리스도교에게로 바통이 넘어온 셈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시 이 계시 진리를 독점할 수는 없으며 그 진리를 밝혀 드러내고 증거하는 사명을 이어 받았을 뿐입니다. 천 년이 넘은 유다교의 역사에서도 온전히 드러내지 못했던 바를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으로 그 지평을 온전히 드러내셨는데, 이천 년이 넘어가는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도 온전히 드러난 그 진리의 해설과 실천은 여전히 열려있는 문제입니다.


수학에서 사물의 이치를 정확하게 측정하게 위해서 만든 것이 좌표입니다. 좌표는 수직과 수평으로 이루어진 두 축이 있고, 이에 의해서 네 개의 공간이 표시됩니다. 이 공간의 기준이 좌표의 원점인데, 오늘 복음 말씀은 좌표의 원점과도 같은 기능을 합니다. 개별 인간이나 시대별 교회나 인류가 어떤 수준과 정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상태가 오늘 복음 말씀으로 측정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는 삶의 실천으로 깨달은 바의 수준만큼 오늘 복음에서 계시된 진리를 알아들어 왔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러서 비로소 가톨릭교회는 오늘 복음 말씀에 담긴 계시 진리를 역사상 가장 온전하게 알아들었습니다. 신명기 저자가 6장에서 간추린 내용은 유다교가 가장 거룩하게 받들어온 계명이었습니다. 이 진리 이해의 형식을 예수님께서도 받아들이셨고 한 자 한 획도 바꾸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고’라든가, ‘목숨을 다하고’라든가, ‘힘을 다하여’라든가 하는 사실상 같은 뜻을 지닌 부사를 세 번이나 되풀이한 신명기 6,5의 말씀에다가 ‘생각을 다하고’라는 역시 같은 뜻을 지닌 부사를 보태어 강조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하느님 사랑의 내용을 실질적으로 밝히셨으니, 하느님 사랑이란 결국 인간 사랑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강생의 신비 안에 담긴 진리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한낱 피조물로 신상을 만들어 그것이 하느님이기라도 한 양 그 앞에 절하고 경배하는 일은 하느님의 노여움을 살 일이고, 정작 하느님을 흠숭하는 길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일이요 그런 공동체를 이루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믿는 이들이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봄으로써 비로소 하느님을 볼 수 있게 되고, 알 수 있게 되며, 나중에는 찬양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에서도 일깨워주셨듯이, 제 몸같이 사랑해야 할 이웃이란 가족이나 옆집 이웃이나 교우, 또는 동향 사람, 동족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도움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며, 특히 소외된 채로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입니다. 이들에게 얼마나 또 어떻게 사랑을 베풀었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생의 마지막에 심판받으리라고 예수님께서는 못 박아 말씀하셨습니다. 보잘것없는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의 인간 존엄성을 존중하는 일이 곧 하느님을 흠숭하고 그분의 이름을 거룩히 부르는 일이며 그분의 날에 해야 할 일입니다. 


그 점에서는 다산 정약용을 통해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는 수운 최제우가 제대로 알아듣고 하느님을 하늘이 아니라 마음에 모신다는 ‘시천주’(侍天主)의 사상으로 표현했는데, 수운을 스승으로 모셨던 해월 최시형은 이 개념을 ‘사인여천’(事人如天)으로 바꾸어 실천적 윤리로 가르쳤습니다. 사람의 일을 하느님 섬기듯이 하라는 뜻이겠습니다. 또 그 후계자인 의암 손병희는 이를 ‘인내천’(人乃天)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이 당시 천주교의 서양 선교사들이 교리는 예수님 말씀대로 가르치면서도 실천은 그에 못 미치는 것을 비판한 나머지, 천주교는 서학에 불과하다고 규정짓고 자신들은 이 진리를 민족 주체성을 갖고 실천하는 동학(東學)이라고 깃발을 들었고, 의암에 이르러 다시 천도교로 간판을 바꾸어 달았을 뿐입니다. 이러고 보면 개신교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천도교인들도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갈라진 형제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사상적 뿌리가 같기 때문입니다. 동학 혁명을 주도하다가 순교한 해월 최시형과 동학교도들의 희생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고, 사실상 3.1 독립선언을 기획했던 의암 손병희와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천도교 전국 조직의 실천을 우리가 계승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따라서 인간 존엄성의 현실에 대한 감수성을 살아있게 함으로써 존엄성이 짓밟히는 이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을 발휘하는 일이 이 사순 시기에 우리가 회개해야 할 첫째가는 지향이 됩니다. 냉담자가 늘어나고 예비자와 성소자가 줄어든다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이 감수성과 공감능력을 십분 발휘하는 데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현재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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