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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현장을 찾고 4.19민주묘지를 참배하는 교황대사라면…
  • 전순란
  • 등록 2019-04-29 11:2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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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28일 일요일, 흐림



손님이 오면 실상 음식하느라 힘들다기보다 준비하면서 겪는 스트레스가 더 크다. 음식이야 끓이고 굽고 졸여서 만들면 그만이다. 오늘 새벽에만도 ‘식전 칵테일을 하려면 얼음을 얼려야지.’ 해서 아래층에 내려가 얼음 그릇을 찾아 물을 채워 냉동실에 넣었다. 한참 잠이 들려다 ‘손님에게 전식으로 나가는 전복을 설명하려는데 이탈리아말로 뭐라고 했더라?’ 벌떡 일어나 찾아보니 abalone란다. ‘그럼 메인 접시 광어는 이탈리아말로 뭐라나?’ 하며 다시 일어나고, ‘빨강무를 삶아야 하는데’ 하며 또 일어나고, ‘실내 슬리퍼가 다 해져 손님에게 신길 슬리퍼도 사와야지.’ 하는 생각이 또 든다. 그러다보니 새벽까지 누웠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밤을 샌다.


9시 어린이미사에 가야 해서 정신을 가다듬고 집을 나섰다. 가물거리는 정신에도 어느 집 모과나무 꽃이 귀엽게 웃어주니까 내 정신이 난다. 더구나 성당에서 아이들이 힘차게 노래부르는 목청에 남은 잠마저 도망간다. 강론시간에 신부님이 상자 하나를 들고 아이들 가까이 내려오시며 ‘너희들의 보물 제1호가 뭐냐?’고 묻자 신통하게도 애들 대부분이 ‘엄마 아빠요!’라고 한다. 신부님은 당신 손에 든 상자에 당신 보물이 들어있다며 스무고개로 알아맞히기를 하셨다. 열한 고개쯤에서 우리 본당 ‘악다구리’ 창용이가 ‘성경!’이라고 알아 맞춰 선물을 받았다.



‘청계천 거지가 죽을 때 자기 아들한테는 수첩을 전해주었대요.’ ‘그 수첩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한양의 일년 365일 집집의 기일과 잔칫날을 적어두었더래요.’ ‘거지가 그 치부책으로 굶어죽지 않고 살아갈 것처럼, 성경도 여러분에게 하느님 나라 가는 생명의 말씀이 기록된 치부책이에요.’라고 하셨다. ‘성경이 몇 권인지 아는 사람?’이라는 물음에 여자애 하나가 ‘전체 73권. 구약 46권, 신약 27권!’이라고 똑똑한 대답을 해서 상을 받았다. ‘천국의 전화번호는 73국에 4627! 절대 잊지 말아요.’ 이르시고 제대로 오르시자 당찬 꼬마 하나가 하는 혼잣말. ‘사람이 몇인데 달랑 선물 두 개를 주고 끝내세요?’ 요새 아이들은 정말 하고 싶은 말을 다한다.



2시에 이엘리가 와서 저녁 준비가 시작됐다. 나는 맨나중 음식을 먼저 장만하여 제일 먼저 먹을 음식으로 식사가 시작되도록 준비하는데 엘리와는 손발이 척척 맞아 진행이 쉬웠다. 6시에 대사님과 새로 부임한 마리오 참사를 모시고 빵고신부가 왔다. 수도원의 작은 차에서 내리셨는데 주말의 개인 용무에는 관용차를 안 타시나보다. 프란체스코 교황님과 동업하는 사람다운 겸손한 태도가 마음에 든다. 함신부님도 도착하시고 엘리 덕분에 나도 식탁에 앉아서 여섯 식구의 만찬이 되었다.


저녁식사여서 가볍게 음식을 준비했는데 명절마다 스무 명 가족을 삼사일간 건사하는 이엘리답게 나더러 ‘무슨 음식을 하는 것 같지 않다’, ‘손님들 뭘 드리려고 그러느냐?’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러나 전주와 안주. 전식으로는 전복에 모짜렐라와 토마토 아보카도와 루꼴라 포카챠빵. 첫 접시로 라사냐. 본접시로 광어에 시금치와 당근 토마토구이. 과일은 키위, 망고, 포도, 딸기. 후식으로는 판나코타를 내놓았다. 포도주는 생선을 먹으니 백포도주. 마지막 레몬차. 배고프지 않을 만큼만 드렸다. 얘기를 나누며 천천히 먹는 음식이니 별로 살도 안찔 것 같다.


대사님은 한국 와서 가급적이면 화려한 자리보다 어렵고 힘든 곳을 찾아다니며 그 아픔을 돌보고 그곳에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도다운 발걸음을 하고 계시는 듯하다.



이번 4.3사건에도 교황대사로서는 처음으로 제주도로부터 정식으로 초대받아 행사에 참석하셨단다. 오늘도 우리 집 오시는 길에 일부러 4.19 민주묘지를 찾아가 그때의 상황과 국민의 희생에 대해 빵고신부로부터 설명 들었다며 감명을 표하셨다. 사람이 누구랑 친하고 무엇에 관심을 갖느냐에 따라 보는 시각과 행동이 달라짐을 알 수 있는데 우리가 참 좋은 분을 교황대사로 만난 것 같다.


9시가 넘어 빵고가 모셔다 드리러 대사님 일행은 떠나고, 함신부님도 사람들이 모셔가고, 이엘리가 그 동안 부엌을 맡아 틈틈이 설거지를 해놓아 어렵잖게 손님접대가 끝났다. 제자리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청소를 하고 나니 자정이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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