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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동일 머리에 이고”(Remo Bracchi)
  • 전순란
  • 등록 2019-05-08 18:3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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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7일 화요일, 맑음



팔이 쑤시고 손가락이 아파 눈을 떴다. 어젯밤 일어나 진통제를 먹었는데도 손가락 끝까지는 통증을 진정시키지 못하나 보다. 내 손을 들여다보니 사방이 상처고 류마티스기가 손가락을 괴롭히는 중이다. 한때는 내 손도 예쁘다는 소릴 들었는데… 보스코한테 시집와서 전업주부로 살다 보니 어쩔 수 없다.


아파트에 사는 젊은 새댁들도 도우미를 일주일에 한두 번씩 불러 도움을 받는다는데, 파출부를 써본 일 없이 사는 게 힘들 때도 있지만, ‘그사람이 일할 때 나는 무슨 일을 하지, 특별히 할 일도 없는데?’ 이렇게 전업주부로서 한 순간도 실업자가 되기 싫어(심지어 두 아들 낳았을 적에도) ‘열씨미’ 일을 하다보면 손은 망가지게 되어 있고, 아무도 내 손에 시비를 걸진 않는다. 다만 손이 주인을 잘못 만나 너무 고생하는 게 안 됐다.


새벽부터 일어나 거실 남쪽구석에 라카칠을 했다. 매해 겨울이면 화분들을 잔뜩 들여와 물을 주다보니 물은 넘치고 마루는 상하게 마련. 마루가 망가지면 마루를 걷어내고 새로 깔아야 하리라는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색상이 약간 다르지만 그런대로 마루는 보전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무엇보다도 남을 시키지 않고 내 손으로 하는 일이어서…



일은 일로 이어지고, 오늘 중으로 테라스 샌딩 작업을 끝마치고 내일은 오일스텐을 칠하려니 마음이 바쁘다. 해가 산 뒤로 돌아 테라스에 그늘이 지는 오후 시간에 같이 일하자던 보스코는 내가 오전부터 샌딩작업을 한다고 ‘계약위반’이라지만 나는 고용주고 그는 피고용인이니 입장이 다르다. 오너가 되면 나처럼 일한다!


빵고 신부가 어버이날 선물로 케이크 교환권을 보냈다. 카네이션 브로치 하나를 어느 핸가 사서 보내고서 해마다 ‘엄마, 그 브로치 찾아서 다세요’라고 쿨하고 수도자답게 전화하더니, 나이가 마흔이 넘어서 달라졌나보다. 그런데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너 바쁠 것 같아서 어버이날 선물은 내가 알아서 샀다. 입금해라 고맙다’라는 사진과 더불어 ‘(저는) 미리 케이크 보내서 다행이네요’로 이어지는 문자를 읽으며 보스코랑 한참 웃었다. 귀여운 막내아들.


나는 보스코랑 조용한 지리산 골짜기를 하루 종일 샌딩 머신의 굉음으로 혼탁하게 하고 7시가 다 되서야 배고파 허리가 꺾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라스 가득히 쌓인 먼지를 해결해야 칠을 할 텐데…’ 하다 스.선생에게 전화해서 묵직한 콤프레셔를 빌려오고, 콤프레셔 부속(gun: 권총)이 없어 유림 가서 사오고… 내일 아침 한 시간 정도만 더 샌딩하면 데크는 10여 년 전 새로 한 것처럼 깨끗해질 듯하다. 


며칠 전 두 번째로 남편이랑 왔다가며 엄엘리가 ‘선생님, [기어코] 데크마루 전부를 새것처럼 밀어놓으실 테죠?’라고 했는데(‘선생님 성질 저 알아요’라는 뜻이었을 게다) 사실 그 말대로 했다. 보스코도 같은 말을 곧잘 하는데 ‘그렇잖음 내가 당신이랑 결혼했을 줄 알아?’라는 게 내 정해진 대꾸다.



오후 내내 함께 샌딩을 하고서, 저녁나절에는 보스코가 텃밭에서 예초기를 돌렸다. 80년대 초 보스코가 교황립 살레시안대학교 라틴문학대학에서 언어학을 배운 레모 브라키(Remo Bracchi) 신부님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이율리아나 수녀님(아욱실리움 교수)이 보내왔다. 


언어학(서구언어의 발달사와 어원학)의 세계적인 대가이자 이탈리아에서는 이름난 시인으로 알려진 분이다. 보스코가 대사를 지낼 때 주교황청한국대사관저에 ‘한국성모자상’(오채현 조각) 제막식(2005년)에 오셨다 축시를 지어주셔서 지금도 그 성모상 곁에 그 시가(보스코의 번역문도 함께) 봉정되어 있다.



연배는 보스코와 비슷한(사실 보스코가 한살 더 많다) 분이지만 보스코와 유난히 깊은 사제지간의 정을 보이셨고 2012년에는 브라키 신부님의 초대로 우리가 그분의 고향 보르미오(이탈리아 최북단)를 방문해서 그분 누이의 집에서 자기도 했다. 


이백만 대사님에게 고인의 시가 관저 성모상에 봉정된 사정을 알렸더니(대사님은 멀리 휴가 중이어서) 김공사를 보내 오늘 살레시안대학교에서 거행된 장례미사에 참석케 배려했다는 소식이 저녁에 왔다. 고향 보르미오의 가족 묘지에 묻히신다니, 오늘 장례미사차 로마로 내려왔을 누이들에게는 공사님이 우리 이름으로 조의를 표했을 게다. 40여 년 전 일이기는 하지만 보스코가 마흔살 늦깎이로 라틴문학을 배운 은사님들이 이제 모두 하늘나라에 가 계시다.  




물동일 머리에 이고

(주교황청 한국대사관저 성모상 제막에 붙여)


어느새 땅거미는 나무새로 내려앉고

한길에 오가던 말소리는 그새 뜸해졌는데

바람결 타고, 놀라워라, 태양의

마지막 붉은 잎새들이 지고 있었네


종일 쏟아지던 비마저 고요 속에 멎고

어둠이 보랏빛으로 장막을 펼치는데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촛불과 향연의 춤사윈

한껏 당신을 맞이하는 기다림이었네


물동일 머리에 이고 당신은 오셨네

생명의 샘이여, 아드님을 등에 업고

하늘거리는 맵시로 춤추며 오셨네


밤도와 흐르던 샘을 아예 날라 오시느라

이마로 옷섶으로 흘러내리는 물방울이며

당신을 어미로 만든 젖가슴을 드러낸 채로


로마 2005년 10월 3일

레모 브라키 신부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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