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학위원회 >는 신학 나눔의 새로운 길을 찾아 ‘사건과 신학’이라는 표제로 다양한 형식의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매달, 이 사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사건 가운데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신학 이야기를 나누는 ‘사건과 신학’. 이번 주제는 ‘YouTube와 한국사회: 가짜뉴스VS진짜뉴스?’입니다. - 편집자 주
“팩트가 뭡니까! 팩트가 뭐냐고!"
흔히 요즘 문제되고 있는 가짜뉴스에 대한 질문으로 자주 사용되는 말이다. 팩트에는 관심이 없이 누구보다 더 빨리 특종이든 단독이든 보도해야 하는 인터넷 뉴스 세계에서 팩트체크를 할 시간보다는 일단 터트리고 보자는 미디어 매체와 그 뉴스 매체를 이용해 자신에게 유리한 프레임을 짜기 위해 적당한 팩트와 소위 ‘카더라’ 정도의 정보들을 엮어서 뿌리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뉴스를 ‘가짜뉴스’라고 요즘 부른다.
가짜뉴스 즉, 페이크 뉴스라는 말은 트럼프가 제일 먼저 사용했다고 한다. 트럼프가 자신에 대한 비판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거나 호소하기보다는 가짜뉴스라고 명명하며 무시해 버리면서 가짜뉴스, fake news라는 말이 정치적인 프레임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가짜뉴스는 있어왔다. 황색언론이라고도 불리고 이 훨씬 이전에는 유언비어, 소문이라고 말해졌다. 이렇듯 저잣거리 태생의 글들이 언론과 미디어의 주요 정보들로 둔갑하고 그 주인공들이 소위 일인미디어라는 이름으로 스마트폰을 통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이젠 치즈라면을 만드는 방법을 알기위해 요리책을 뒤질 필요가 없다. 유튜브나 각종 검색이 가능한 영상미디어에 ‘치즈라면’이라고 입력하면 된다. 옛날에는 정치에 대해 알고 싶으면 정치학 강의를 듣거나 정당에 가입하거나 신문을 몇 달이고 구독했다. 이젠 검색하면 된다. 정치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는 필요치 않다. 대신 자신이 지지하고 싶은 정당과 사람들에 대해 응원하는 미디어를 찾으면 된다. 그들은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정보를 제공한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믿음을 여과 없이 떠든다. 마치 그것이 팩트이고 진실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소위 ‘조국대전’을 통해 우리는 언론과 일인 미디어들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검증 되지 않은 뉴스들 속에서 검찰이 주도하는 거대한 프레임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몇 달을 보내야 했다. 가짜뉴스와 검증이란 끊임없는 반복들 속에서 힘들게 균형을 잡기도 전에 다시고 몰아치는 기사와 정보에 다시금 혼돈으로 빠져들곤 했다.
가짜뉴스의 문제는 그 뉴스가 가짜라는 것에 있지 않다. 그 반대어인 진짜뉴스라는 말이 존재할 수 없는 것에 그 진짜 문제가 있다. 진짜뉴스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가짜뉴스라는 말도 존재할 수 없다. 모든 뉴스, 또는 소식, 정보는 일정 부분 팩트를 가지고 있지만 검증될 수 없는 또는 팩트체크 할 수 없는 여러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즉, 모든 뉴스는 그 안에 팩트라는 정보와 해석 또는 믿음을 통한 언어들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뉴스를 진짜냐 가짜냐로 나누는 것은 뉴스는 팩트만을 가지고만 만들어져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며 어떤 뉴스가 설혹 진실을 담고 있는 뉴스라 할지라도 자신의 모든 언어를 검증해야만 진짜뉴스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결국 지금의 혼돈의 언론과 일인 미디어의 원인 중 하나는 ‘가짜뉴스’라는 단어가 가지는 모순인 것이다. 필자는 가짜뉴스라는 말보다 혐오뉴스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신약성서에는 기독교의 핵심을 다루는 두 개의 뉴스가 있다. 첫째는 복음서 전반에 나타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언이다. 두 번째는 마태복음 27장 62절로부터 나오는 말인데,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몰래 훔쳐낸 후 부활했다는 가짜뉴스를 퍼뜨릴 수도 있으니 철저히 무덤을 지켜야 한다고 빌라도에게 말하는 장면에서 유추할 수 있다. 아마도 예수의 죽음 이후에 예수의 부활을 목격했다는 사람들의 뉴스와 예수의 제자들이 그 시체를 숨기고 예수가 부활했다고 말하고 다닌다는 뉴스가 있었을 것이다.
자, 여기서 팩트가 무엇일까? 팩트가 중요하다면 둘 중 하나는 가짜뉴스이다. 아마 초자연적인 현상을 믿지 않는 보통 사람이라면 예수의 부활이 가짜뉴스라고 말할 것이다. 팩트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누군가가 타임머신을 타고 예수의 무덤을 열고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팩트가 아니다. 로마라는 당시 제국의 군화발 아래 짓이겨져 가는 유대 민중들의 한과 눈물을 껴안고 새로운 삶이 가치를 말했던 예수라는 젊은이의 죽음이 그들의 소망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라 믿었던 사람들의 증언이 있고 그들의 믿음을 한낱 시체를 숨긴 사기꾼들의 가짜뉴스라 비웃은 사람들의 증언이 무엇을 내포하고 있는가이다.
돈과 권력을 가지고 세계를 재편해가는 당시 로마제국이 던진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의 귀환은 당시 민중들의 마음에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했다. 그것은 팩트 체크나 가짜뉴스라는 단어로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활의 뉴스는 당시 위정자들의 약자에 대한 폭력과 혐오에 대한 고발이었고 십자가에서 죽도록 고문당한 젊은이의 절규를 전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가짜뉴스가 아니다. 권력을 추구하며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자들의 폭력이다. 폭력과 혐오가 담겨있는 뉴스는 그것이 몇 개의 팩트나 합리적 추론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가짜뉴스란 존재하지 않는다. 약자에 대한 혐오를 기반으로 탄생한 독설과 비뚤어진 분노가 미디어를 입고, 그 혐오의 똬리를 숨기기 위해 ‘뉴스’ 또는 알 권리라고 스스로를 포장할 때, 그 뉴스라는 말에 현혹되어 출처에도 없는 가짜뉴스라는 표현으로 되받아치기를 멈추어야 한다.
사람들은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사실로 믿는다.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팩트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가고 있는 방향과 과거에 대한 해석과 역사의식이다. 어떻게 하면 미디어의 형태에 좀 더 깊은 통찰과 역사에 대한 고민들을 담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먼 길이 되겠지만 가짜뉴스에 대한 해결은 이것이라 믿는다.
한수현(감리교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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