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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 앞에서 하느님은 무엇을 바라셨나
  • 7지구 청년연합회
  • 등록 2019-11-27 12:22:51
  • 수정 2019-11-28 15: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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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7지구 청년연합회 공모전 수상작품이다. 7지구 청년연합회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집회와 세월호 월례미사에 참여하고 가톨릭 사회교리 모임을 꾸리는 등 천주교회의 사회참여를 모색하는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 편집자 주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독재정권이 국민 위에 군림하던 시절에 일어난 광주민주화운동을 주요 배경으로 한다. 부끄럽게도 나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 큰 관심을 기울여 오지 못했고,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이루는 한 부분 정도로 인식을 해왔다. 그래서 기사를 조금 찾아보았는데, 올해가 광주민주화운동 39주기였다고 한다. 그리고 안 사실은 내가 살아온 나이 하고도 9년이나 흐른 현시점에서조차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규명과 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천주교에서는 희생자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는 등, 교회 차원에서의 지속적인 관심과 실천을 이어오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선 이 소설에서 인상적인 것은 독재정권하에서 존엄성이 훼손된 인물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소설 속 인물들이 상처받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거나,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매일의 나날을 ‘장례식’처럼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저렸다. 또 다른 인상적이었던 점은 소설의 인물들이 처한 각각의 상황들은 조금씩 다르지만, 한강은 인물들을 빌어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무엇인지, 인간이 죽어도 지켜내야 할 가치가 무엇이고, 또 무엇이었는지 끊임없이 조명한다는 점이다. 내 생각에 그것은 아마도 ‘정의’가 아니었을까 싶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진 존엄한 권리, 하느님의 사랑받는 피조물로서 모두가 평등하게 지닌 기본권이 평화롭게 이어지는 정의로운 사회. 그러나 한강의 이 소설은 정의로운 사회와는 정반대로 무고한 시민들에 대한 살해와 인간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는 악이 자행되는 현실을 묘사하며, 그 속에서 인물들은 저마다 고통과 갈등을 겪는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질문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중 주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께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라고 만들어주신 이 세상에서 왜 그와 같은 비극이 벌어져야만 했던 걸까? 하느님은 우리 곁에 언제나 역사하신다고 하는데, 왜 하느님께서는 독재정권이 국민을 상대로 악랄하고 잔혹한 범죄를 자행하도록 허락하셨나? 비극 앞에 놓인 인간들에게 바라시는 점이 무엇이었을까? 당대 현실 속에서 천주교인들이 할 수 있었던 일들은 무엇이 있었을까.


이러한 자문에 대한 답을 하기에 앞서, 나는 소설의 인물들을 다시 천천히 살펴보았다. 소설의 시작은 겨우 열네 살 중학생인 소년 동호의 시선으로 시작된다. 우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나이인 동호는 친구 정대의 죽음을 느끼면서도 애써 외면하면서 죄책감에 시달린다. 강당에 모인 많은 시신들을 목도하면서, 동호는 자신의 집 사랑채에서 살던 정미와 정대 남매의 모습을 회상한다. 동호는 살기 위해 도망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보통의 소년이었다. 나는 동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네가 아니라 그 누군들, 군인의 무서운 총성 앞에서 힘껏 도망쳤을 것이라고. 동호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현장에 남아 있다가 결국 총에 맞아 희생되고 만다. 


그리고 소년 정대는 죽어서 혼이 된다. 갑작스러운 죽음에 미처 몸을 떠나지 못한 정대의 혼은 자신의 몸이 다른 죽은 몸들과 함께 ‘곡물 자루 운반되듯’ 겹겹이 실려 처분 장소로 이동되는 것을 느낀다. 인간의 몸은 불로 태워 처분해 버릴 수 있는 고깃덩이가 아닌데, 인간의 생명과 혼은 그렇게 간단히 꺼져버릴 수 있는 게 아닌데.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정대의 혼은 본인의 죽음 이후의 광경을 생생히 묘사한다.


동호와 함께 광주민주화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은숙은 훗날 출판사 직원으로 일한다. 그러나 은숙은 여전히 과거에 받은 마음의 상처와 죄책감에 강하게 얽매여 있다. 은숙은 불판 위에서 익어가는 고기, 생선의 눈깔, 뭔가를 말하려는 것 같은 생선 아가리에서도 광주의 희생자들을 떠올리는 듯하며 고통 속에 살아간다. 어느 날 한 사내에게 교정지를 검열당하며 일곱 대나 뺨을 맞은 은숙. 대체 어떠한 권력이 인간의 존엄성보다 앞섰던 걸까. 대체 그 어떤 힘이, 살아남아 배고픔을 느끼는 것조차 죄스러운 감정 속에 은숙을 고립시킨 걸까. 나는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은숙의 출판사는 국가의 압제적인 검열 아래에서도 신간을 출간하는데, 이는 독자로 하여금 인간의 근본적인 숭고함과 근원적인 야만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인간은 ‘군중’이라는 형태로 뭉치게 될 경우, 혹자는 숭고함을 선택하기도, 혹자는 야만성을 선택하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인 자유의지를 통해 숭고와 야만 둘 중에 더 정의롭고 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야만을 선택한 이들에게 상처받은 영혼들은 어떻게 치유 받아야 할까. 은숙은 검열 속에서 어렵게 빛을 본 희극을 관람하면서 동호를 떠올린다. 은숙은 제대로 애도할 수조차 없었던 동호의 죽음으로 인해 매일을 장례식처럼 연명하며 끝내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이겨내지 못한다. 


한편 감옥에 수감된 김진수는 악랄한 고문과 취조, 굶주림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마치 ‘깨지지 않은 유리’와도 같은 순수한 영혼을 지녔던 김진수는 자살을 택한 것이다. 죽느니만 못한 수치스러운 삶을 이기지 못해 결국 자살을 선택한 김진수를 과연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위로하실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죽은 김진수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인터뷰에 응한 청년은 광주민주화운동에서의 경험을 빌어 인간의 본질에 대해 질문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하며, 존엄하다는 것은 그저 착각이냐는 것. 청년의 마음에는 아마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은 마음과 자신에게도 잔악한 본성이 있을 수 있다는 치욕스러움 사이에서 번뇌하는 것 같았다. 


나아가 한강은 선주라는 인물을 통해 국가로부터 철저히 타자화되고 억압된 여성 또한 주목한다. 선주는 요청받은 증언에 대한 녹취록을 시작하기에 앞서 다시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과 마주하게 된다. 전남방직에서 힘들게 일하던 여공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국민으로서 국가로부터 철저히 타자화되었던 선주. 그가 밤새 잠 못 이루며 아픈 기억을 회상하는 것은 선주도 똑같은 인간이자 존엄한 존재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마음의 상처가 큰 선주는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없었다. 신께서는 오직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보신다는 종교적 교리는 그저 선주를 기만할 뿐인 말이었을 것이다. 


대통령의 긴급조치권이 개개인의 고귀함보다 절대적이었던 독재정권 시절. 사회적 불의에 저항하는 브래지어 차림의 여공들의 벽은 곤봉과 각목을 휘둘러대는 폭력 속에 너무나도 쉽게 무너졌다. 그들도 이루고 싶었을 평범한 소망들이 있었을 텐데,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여성들은 기득권층으로부터 ‘빨갱이년’으로 몰려 철저히 배제되었다. 때문에 선주의 마음에 다할 수 없는 분노와 상처가 가득한 것, 신의 사랑은커녕 타인의 사랑조차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을 누가 나무랄 수 있을까. 선명하고 날카로운 기억들로 밤을 지새우면서도 녹취록 앞에선 증언할 수 없는 그 마음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싶다. 


이 소설의 맨 마지막에는 할머니가 된 동호 어머니의 독백이 이어지는데,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먼저 보낸 막내아들을 잊지 못하는 어머니의 애통함이 절절히 어려 있다. 어머니는 허망하게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살인자 전두환을 죽이자고 나서서 싸운다. 그래도 이미 죽은 아들은 살아 돌아올 수 없기에, 늙은 어머니는 그저 아들의 중학교 사진을 지갑 한편에 간직한다.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은 모두 불의에 맞서다 상처받고 희생되었다. 내가 읽은 이들의 독백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차원, 교회적 차원에서 더 큰 공감과 관심을 요구하는 목소리이다. 이는 국가적 차원의 악행에 대해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부끄러움 모르는 사회에 대한 강력하고 처절한 목소리이기도 하다. 같은 국민 사이에서 일어난 폭력적인 유혈 사태,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이 비극에 대해 많은 이들이 점차 둔감해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되므로 다시금 상기하고 적절한 대안과 해결책을 생각해보지 않으면 언젠가 그 희생양이 우리 자신이 될 수도 있다.


잔혹한 재앙과 비극이 일어났을 때, 무고한 사람들이 어처구니없이 죽어나갔을 때 사람들은 보통 말하곤 한다. ‘신은 죽었다’라고. 신이 있다면 그러한 비극을 허락하지 않으셨을 거라고. 물론 일차원적으로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보통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이 그러한 발언을 하곤 한다. 신을 배척하고 싶은 이들이 재앙과 비극에 대한 잘못을 신에게 돌린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유의지를 주셨기에, 인간 스스로가 자아낸 비극에 대해서 신을 원망할 수 있을까. 사실 우리는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해 하느님의 뜻에 맞는 열매를 맺어가며 살아갈 수 있다. 고립과 소통, 폭력과 사랑, 불의와 정의. 전자와 후자 중 어느 쪽에 서야 하는 가는 ‘인간’이라면 알맞게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신이 아니므로 하느님의 절대적인 힘 아래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 모두 노력해서 그러한 사회를 만들고자 할 때, 부당하고 무고하게 희생되는 사람들이 줄어들 것이다. 박정희 정권에서 전두환 정권에 이르기까지, 독재정권 하에서는 인간의 고유한 존엄성보다 정권의 절대적인 권력이 더욱 앞섰다. 정권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더욱 주도면밀한 논의와 판단이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이루어진 무고한 시민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끝없는 위로와 관심, 기억의 행위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마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인간 비극의 역사를 보시면서 누구보다 마음 아파 하셨을 것이다. 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으로 태어난 소중한 생명인데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다 하여 차별과 폭력 속에 놓인 곳을 보시고 마음이 상하시고,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고 싶으셨을 것이다. 때문에 마음의 깊은 상처를 받고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이들은 마음을 치유 받고 안식을 얻은 이들도 많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 명동대성당, 즉 하느님의 교회는 민주화의 성지로 역할 했으며 유족들을 보듬고 민주화 운동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도 앞장섰다. 당시 교구장이셨던 김수환 추기경님은 광주민주화운동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하시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 고통을 겪었을 때가 그때였어. 사태가 그대로 알려지지도 않고 구체적으로 뭘 더 대처하면 좋을지도 모르고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해봤지만 먹혀 들어가지도 않고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으니까…”


39년이 지난 지금도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대처는 잘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교회는 그들을 위한 지속적인 추모 행위를 이어나가고 있으며, 우리 사회에 불의가 멈추고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이 줄어들기를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다. 지난 과거의 비극은 슬픈 일이지만, 그러한 역사를 토대로 이 사회 안에 불의보다는 정의가, 폭력보다는 사랑이 널리 퍼져야 할 필요성을 알게 한다.


청년 세대인 우리가 사회적 불의에 대한 기존의 무관심을 끊고 아파하는 이들을 위하여 조금 더 사랑의 시선을 보낼 수 있다면, 우리가 모두 더 인간답게 살기 위해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를 만들어 간다면, 그를 실천하게 하는 지혜와 힘을 지닐 수 있다면 그것이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아닐까. 너무나도 평범한 우리의 주변 이웃들, 한강의 소설 속에서 ‘소년’으로 표상되는 어리숙하고 평범한 우리의 형제자매들의 아픔에 대해서 지속적인 기억과 사랑의 실천이 요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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