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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보수와 진보의 두 아이콘이 만났을 때
  • 이기우
  • 등록 2020-01-03 13:51:58
  • 수정 2020-01-03 15: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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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대축일 전 토요일 (2020.01.04) : 1요한 3,7-10; 요한 1,35-42



이제는 주님의 공현을 준비하는 때입니다. 공현을 준비하려는 우리에게 주어진 좋은 기회가 있었으니, 그것은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된 영화 < 두 교황 >입니다. 이 영화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 시점에서부터 최근까지 대략 10여 년 간 교황청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목이 알려주듯이 주인공은 베네딕도 16세와 프란치스코, 두 교황입니다. 추기경 시절에 요셉 라칭거와 호르헤 베르고글리오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던 이 두 인물은 요한 바오로 2세의 후임 교황을 선출하는 과정에서부터 이미 경쟁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영화는 이 두 추기경이 순차적으로 교황직에 선출되는 과정과 교황직을 수행하는 과정을 대조적으로 보여줍니다. 


라칭거는 전통과 유럽을, 베르고글리오는 변화와 제3세계를 대변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이 두 인물이 선택한 교황 호칭도 매우 상징적입니다. 라칭거는 6세기 이래 서방 가톨릭교회의 수호성인이 되어 온 베네딕도를 택했고, 베르고글리오는 12세기 이래 가톨릭교회를 보수하고 지탱해 온 프란치스코를 택했습니다. 한 사람은 지성적이고 귀족적이었다면 다른 한 사람은 행동적이고 서민적이었습니다. 영화는 모두가 경험하지 못했던 기적, 그 두 인물이 아니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기적이 두 번이나 연거푸 일어났음을 실제 사실에 바탕해서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첫 번째 기적은 베네딕도 16세의 교황직 사임 사건이었습니다. 교황이라는 자리는 종신직이었기 때문에 현직 교황의 사임은 719년 만에 보는 기적에 해당했습니다. 두 번째 기적은 사임 전 베네딕도 16세가 그 전까지 줄곧 반대편 입장에 서서 자신을 비판했던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을 후임 교황으로 사실상 낙점하고 지지했다는 숨은 사실입니다. 사임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점에서 기적이었습니다.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이 두 기적이 별개로 보이지만 사실은 현대 가톨릭교회를 이끄시는 성령께서 상반된 경향을 띤 이 두 인물의 순종을 전제로 순차적으로 교황직에 오르게 하신 하나의 섭리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성령께서는 현대의 성령강림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 요한 23세, 바오로 6세, 요한 바오로 2세에 이어 이 두 교황으로 하여금 성령에 의한 가톨릭교회의 쇄신이라는 공의회의 소명을 일단락 짓게 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미처 영화가 다루고 있지는 못하지만 가장 놀라운 기적은 20세기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보수와 진보의 두 아이콘이 교황직을 두고 서로 포용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베네딕도 16세는 교황직에 오르기 전에 20년 동안 요한 바오로 2세를 보좌하는 신앙교리성 장관직에 있으면서 교회의 규율을 감독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폴란드 출신으로 교황직에 오른 해가 1979년인데 마침 그 해에 열린 제2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 총회에 가서 요한 바오로 2세는 감격적인 개막연설을 한 바 있었는데, 이와 엇박자로 라칭거 신앙교리성 장관은 그 총회의 기본 노선에 충실한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를 단죄했습니다. 그랬던 라칭거 장관이 교황직을 사임하기 직전에 성령의 음성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레오나르도 보프와 같은 노선을 걸으며 자신의 노선을 비판해 온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을 일부러 불러서 며칠 동안이나 친구처럼 함께 지내더니 베르고글리오가 가지고 온 사표를 수리도 하지 않음은 물론 치열한 논쟁을 하면서까지 고해성사의 형식을 빌어 교황직 사임과 후임 교황직을 부탁한다는 비밀 대화를 나눕니다. 


그 후의 사태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진행되었습니다. 사실은 베네딕도 16세의 지원이 없더라도 추기경단 내에서 압도적인 표를 얻을 수 있을 만큼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은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교황직에 선출된 후에 보인 행보는 겸손과 소탈함 그리고 개방성이었습니다. 전임자는 물론 지역주교회의의 발언들까지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꼼꼼하게 챙겼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보수와 진보, 교황지지 노선과 비판 노선으로 대립하고 있던 가톨릭 신자들을 모두 한데로 모아 품고 더 나아가서는 가톨릭교회에 비판적이었던 사람들까지도 찬사와 박수를 보내게 만들었습니다. 진보가 보수의 진실을 수용했고, 이는 진보의 목소리를 수용한 보수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가톨릭교회 안에서 이렇게 일하고 계십니다. 현대의 주님 공현은 이렇게 준비되고 있는 겁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현재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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