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에는 영화 <신의 은총으로>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레나 사건’은 프랑스 가톨릭교회의 상징인 리옹대교구에서 벌어진 일로, 교구 사제였던 베르나르 프레나 신부가 1979년부터 1991년까지 70여명의 스카우트 아동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사건이다.
“잘 지내니, 우리 알렉상드르?”
‘프레나 사건’을 영화화한 프랑수아 오종의 < 신의 은총으로 > (프랑스어: Grâce à Dieu, 영어: By the Grace of God)는 피해생존자들의 고발로 교회와 경찰서에서 피해자들을 만나게 된 프레나 신부가 아무렇지 않게 ‘우리 알렉상드르’와 같은 애칭을 건네며 “잘 지내니?”라고 잔인한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담아낸다.
특히 알렉상드르를 비롯한 피해생존자들이 프레나 신부와 교회 안에서 처음으로 만났을 때, 바르바랭 추기경이 피해생존자 알렉상드르의 아들을 만났을 때 이들이 손을 잡고, 한 공간에 모여 기도문을 외우는 장면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저지른 개인적 차원의 폭력성과 더불어 자기 위신을 지키려 피해 사실을 뭉개버리는 ‘집단의 폭력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제작 과정에서 오종 감독은 피해자들과의 면밀한 대화를 통해 시나리오를 구성했고, 영화에는 피해생존자들이 교구와 주고받은 편지 내용을 인용하는 등 실제로 벌어졌던 일을 그대로 옮겼다고 해도 무방한 정도의 고증을 보여준다.
30년 넘게 ‘은폐’되었던 프레나 사건
프레나 신부가 더 이상 사제로 활동하지 않는 줄 알았던 성폭력 피해생존자들은 그가 여전히 신부로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2014년부터 자신들의 피해 사실을 교구에 알렸다. 그럼에도 프레나 신부의 소속 교구인 리옹대교구는 2015년이 되어서야, 여러 피해자가 속속 등장하고 언론에 알려지자 그때서야 프레나 신부의 비위 사실을 교황청에 이첩했다.
하지만 교구는 프레나 신부의 아동성범죄 혐의를 1991년 당시 교구장이었던 알베르 드쿠트레(Albert Decourtray) 추기경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2002년 교구장에 취임한 바르바랭(Philippe Barbarin) 추기경 역시 이러한 사실을 이미 적어도 2007년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영화는, 피해생존자의 ‘메일’에는 답하지만 그들의 ‘울부짖음’에는 답하지 않는 조직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며 가해자가 변명 일색의 모습을 보임에도 조직으로서의 교회가 일제히 이에 침묵하고 심지어 이를 은폐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침묵하는 교회’의 전형을 그려낸다.
가해 신부, 은폐 추기경 프랑스 사법당국서 재판 중
영화의 제목 < 신의 은총으로 >는 2016년 바르바랭 추기경이 했던 실제 발언을 인용한 제목으로, 바르바랭 추기경은 당시 한 기자회견에서 ‘하느님 덕분에 프레나 신부 사건의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말해 큰 논란을 일으켰다.
프랑스 사법당국은 2019년 3월 바르바랭 추기경에게 1심에서 아동성범죄 미신고 (non-dénonciation d’abus sexuels sur mineurs) 혐의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바르바랭 추기경은 판결 이후 교구의 혼란을 막겠다는 명분하에 교구장직을 잠시 총대리에게 이임하겠다는 발표를 하고 대중에게 모습을 감췄다. 이후 바르바랭 추기경은 곧바로 사법당국에 항소했다.
이처럼 피해사실과 교구차원의 은폐 사실이 드러난 가운데, 프레나 신부는 지난 2019년 7월에서야 리옹관구법원의 판결로 성직자 신분에서 제명(프랑스어: renvoi de l’état clérical, 영어: Removal from the clerical state)되었다. 이번 처벌은 지역교회에서 직접 내린 성직 박탈 처분이다. 프레나 신부에 대한 프랑스 사법당국 재판은 오는 1월 중순에 열릴 예정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지만 지역교회가 아닌 교황청이 직접 성직 박탈 처분을 내린 경우도 있다. 주교를 비롯한 고위성직자들이 은폐에 공모한 칠레의 악명 높은 아동성범죄 사건 ‘카라디마 사건’이다. 가해자 페르난도 카라디마는 비록 칠레 사법당국의 처벌은 공소시효가 지나 불가능해졌으나, 프란치스코 교황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교회법상 성직을 박탈당한 바 있다.
피해자들이 가해자에게 침묵과 용서를 강요받는 아이러니
지난 9일에는 모두를 위한 기독교 영화제(이하 모기영)가 기획한 < 신의 은총으로 > 시사회가 서울극장에서 열렸다. 이날 시사회 후 영화를 주제로 한 토크에는 모기영 장하나 프로그래머와 ‘가톨릭리딩포럼’(CRF)의 이전수, 박진균 씨가 함께했다.
장하나 프로그래머는 이 영화가 내용뿐 아니라 영화 외적으로도 “침묵 재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며 프레나 신부가 개봉 1주일 전 상영금지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실제로 영화에 등장하는 바르바랭 추기경과 피해자들의 연결고리인 심리학자 ‘레진 메르’(Régine Maire) 역시 자신의 명예가 훼손된다는 이유로 상영금지가처분을 제기한 바 있다. 하지만 이들의 가처분신청은 모두 기각되었다.
영화는 초기에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구상되다가 실화를 재구성하는 픽션으로 변경되었다. 장 프로그래머는 “감독이 영화가 품고 있는 소재에 대해 진중하게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했다는 생각이 든다”며 “(오종 감독이) 피해자들이 모인 라 파롤 리베레의 용기 있는 모습에 감명을 받아 영화화하자고 결심했다”고 귀띔했다.
성찰을 위한 침묵과 불의에 대한 침묵 구분해야
이 영화의 가장 큰 주제는 ‘침묵’이다. 장하나 프로그래머는 “침묵하라는 말이 피해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이전수 씨는 “침묵을 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지만 교회 전통적인 부분(에서 기인하는 것)이 있다”며 “종교적 침묵과 영화에서 드러나는 불의에 대한 침묵이 구별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전수 씨는 가톨릭교회 수도원에서 전통적으로 지켜오는 ‘대침묵’을 소개하며 “이러한 침묵은 조용한 가운데에서 하느님과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라는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의 침묵은 나쁜 침묵이 아니다. 하지만 잘못된 일에 대해 침묵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라 파롤 리베레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가톨릭교회에서 금지되어 있지는 않지만 경우에 따라서 공동체의 질서유지라는 암묵적인 룰에 의해 침묵이 강제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고도 전했다.
영화에서 ‘침묵’과 함께 등장하는 또 하나의 주제는 ‘용서’다. 이에 대해 장하나 프로그래머는 주인공 부인의 말을 인용하며 “가해자 위주의 용서를 지적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진균 씨는 “용서는 피해자가 말할 수 있는 영역”이라며 “위안부 문제도 마찬가지다. 종교적 가치를 떠나 용서는 관계 안에서 살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답했다.
피해자를 생각하는 영화의 구조
장하나 프로그래머는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구조는, 연대할 수 있는 힘이 무엇이고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 그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며 영화의 구조가 피해자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 프로그래머는 “영화가 처음부터 이런 소재를 이메일 형식이 아니라, 힘듦을 직접적으로 토로하는 형태로 감정적 고조가 올라갔다면 위험한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라고 반문하며 “그들을 피해자로만 보고, 가엾게만 보는 마음이 더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평했다.
장하나 프로그래머는 “일반적으로 영화를 보게 되면 주인공의 이야기가 있고, 주인공 옆에 다른 이야기가 같이 등장하는 반면 이 영화는 인물들의 목소리와 삶을 하나하나 다 꼼꼼히 끝까지 조명하는 느낌”이라면서 “영화의 주인공이 하나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러한 형식을 통해 “(영화 안에서) 개인의 목소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연대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되고, 사회의 목소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견고해서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가톨릭(교회)라는 커다란 것을 흔들게 되는 일까지 벌어진다”고 강조했다.
“아빠는 아직도 신을 믿으세요?”
영화를 통해 믿는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는 관객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에 대해 박진균 씨는 “신을 믿는다는 것, 교회를 믿는다는 것, 성직자를 믿는다는 것을 같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다른 것”이라며 “라 파롤 리베레가 교회의 본래적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결국 그 안에서 지지해주는 연대의 힘이 또 다른 신앙의 힘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