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학위원회 >에 연재된 ‘기본소득과 신학’ 가운데 일부입니다. - 편집자 주
12. 하나님나라를 향한 유토피아적 윤리적 영성
윤리, 영성, 희망 그리고 유토피아는 기독교와 분리되어 질 수 없는 중요한 개념들이다. 특별히 윤리적 영성은 ‘좀 더 나은 세상’의 실현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행동하도록 우리를 부추기는 요소들이다. 희망은 윤리적 영성 그리고 유토피아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러한 요소들의 조합을 우리는 예수의 생애에서 발견한다. 윤리적 영성의 사람, 예수 그는 희망을 가진, 꿈꾸는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부활을 통하여 희망 자체가 되었다.
예수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늘 ‘하나님의 나라’의 유토피아에 대하여 희망을 걸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희망과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유토피아적인 희망과 꿈을 포기하도록 종용하고 있다. 오늘의 상황은 우리가 원하던 그렇지 않던 현 체제만이 현실에서 가능한 유일한 것이 아닌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정치사회 행동을 통해서 변혁시키려는 노력보다는 현 체제에 순응하고 적응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옳은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각 개인의 경제활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함으로 신자유주의 체제를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로 하여금 희망을 상실하게 만든다.
만일 자본주의 체제가 인류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인류는 숙명적으로 맘몬 신의 지배 하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인류는 착취와 불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예언자적인 상상력’(Walter Brueggemann)을 동원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예언자적인 상상력’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바탕으로 미래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설정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다.
예언자적인 상상력과 유토피아적 꿈에 대한 포기는 우리로 하여금 맘몬에 의해서 조작되어진 현 정치 사회경제체제에 대하여 대항하는 의지와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가 꿈꾸었던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꿈을 꾸어야 한다.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렇게 해야 한다. 신자유주의가 종언을 고하면서 혼란기에 접어들고 있는 요즘과 같은 시기야 말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꿈을 살려 내는 좋은 기회가 아니겠는가.
양극화 사회에서 기본소득이 가지는 신학적 의미
신자유주의적 시장 경제의 신학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은 우리로 하여금 시장의 윤리적 영성은 기독교의 윤리적 영성과 함께 갈 수 없음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나사렛 예수의 포함(inclusive)의 윤리적 영성은 신자유주의 시장의 배제적 윤리와 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시장의 배제적(exclusive) 성격은 오늘의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양극화 현상을 초래하고 강화시키고 있다. 양극화 현상은 대다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풍요로운 생명의 기회를 앗아갈 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죽음의 세력 아래 무릎을 꿇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해방, 연대, 친절, 동정과 자비 그리고 포함의 기독교 윤리적 영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대안들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기독교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소외시키고 배제하는 가장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로부터(아래로부터) 출발하여 연대의 세계화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급격하게 그리고 자주 논의되고 있는 기본 소득에 대한 논의는 이러한 연대의 세계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은 기본소득에 대한 보다 성경적이며 신학적 그리고 목회적 차원에서 보다 깊은 논의와 연구가 요구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기본소득에 대한 토론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강원돈 교수는 그의 글을 통하여 기본소득의 구상을 토마스 무어에게까지 소급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기본소득에 대한 구상은 70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기본소득에 대한 이야기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 다시 말하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문제와 직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문제와 인간다움이 분리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우주 창조이야기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에덴동산에서의 삶의 이야기는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 우주와 인간, 인간과 인간, 우주와 우주 사이에 아무런 부끄러움과 경쟁이 없는 그래서 인간다움과 우주다움의 삶이 이루어진 이상향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사람으로 하여금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마음대로 먹게 한 것을 기본소득의 보장으로 이해하면서) 에덴동산의 삶은 기본적 삶의 문제가 해결되어 벗고 지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주님의 기도, 하늘의 뜻과 일용할 양식
주기도문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오심을 위해 기도드린다. 그리고 그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요원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다.
오늘의 상황은 절망적이다. 신자유주의적 소비사회에서 돈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오늘 우리들의 사회의 변화에 대한 희망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상황변화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변화에 대한 가능을 포기한 채 그저 하루하루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회 현상을 보면서 후기 근대적 패배주의와 허무주의의 발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회정의나 역사의 실현 같은 개념들은 이제 중요한 의미를 주지 못하고 있다. 그저 나의 개인적인 삶이 침해 받지 않으면 된다.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이기적인 자아의 실현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포기한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쾌락이다. 이러한 쾌락은 소비본능을 만족시킴으로써 오늘 우리의 사회를 더욱 소비 중심적 사회로 만들고 생명을 소홀히 여기도록 만들고 있다. 생명의 가치는 오직 소비능력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위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기도하라고 한다. 그러기에 이 땅의 삶은 포기하거나 허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펼쳐 나갈 믿음의 삶의 현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이 땅의 삶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현장으로 만들어갈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대다수의 사람들의 풍요로운 삶이 거부되고 억압받는 신자유주의의 사회에서 오늘 우리는 하늘의 뜻이 땅에도 이루어지기를 바라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투쟁할 것을 요구한 예수는 우리에게 뒤이어 일용할 양식에 대하여 말한다.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일용할 양식의 밀접한 관계에 우리의 눈을 돌려야 한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일용할 양식을 통하여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들로 다가오고 있는 밥에 관한 것을 주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주님께서는 자신 자체가 가난한 사람으로서 살아오셨고 가난한 사람들이 당시 유대민중들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무시하지 않으셨다. 도미니크 크로싼은 예수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최하위층에 속해 있었고 심지어는 예수는 공식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아 문맹자였을 가능성이 많다고 지적하기도 한다.⑴ 그만큼 예수에게서 있어서도 밥 먹는 일은 절박한 일이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고 투쟁해야 한다. 이 투쟁은 오늘의 사회에서 기본소득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되어지기도 한다.
주기도문에 의하면 기본소득은 오늘을 위한 양식이 되어야 한다. 1980년대 이후부터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세계경제가 눈부시게 발전하도록 했다. 수 십 년 전과 비교해 볼 때 세계경제규모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의 수는 더 늘어났다. 잘 살게 되었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아지게 된 이런 모순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 나오는 것처럼 하루 24시간 동안 필요한 양식이라는 개념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그 많은 재물들이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고 있고 이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쌓아두는 음식, 하루 24시간이라는 음식의 수명의 한계를 망각한 사회는 결국 썩어져 가는 사회가 되고 말 것이다.
성서에서는 이러한 하루 일용할 양식의 개념을 분명히 하고 있고 또 하루가 지나면 그 양식들의 썩음으로 인하여 그 사회가 혼란을 겪게 될 것이라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출애굽기의 본문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만나를 이틀 분을 쌓아두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 만나는 썩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약한 냄새를 풍겨내고 말았다.
오늘 세계의 경제계가 그렇다. 소수의 큰 손들이 재물의 한계, 하루라고 하는 한계를 망각한 채 부를 쌓아두고 있기 때문에, 한없는 축적의 욕망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삶이 썩어가고 있다. 하루의 개념을 망각한 ‘재물 쌓기’는 결국 인간의 한없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기본 소득은 오늘의 양식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급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의 양식을 보장하기 위한 기본소득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신자유주의적 욕망을 극복할 때 가능해 질 것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종교적인 결단을 요구한다.
또 다른 의미에서 기본소득은 일용할 양식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필요한’ 혹은 ‘존재에 필수적인’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의 성경-신학-목회적 의미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일용할 양식 다시 말하면 ‘존재에 필수적인’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기본소득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위한 것이다.
인간은 두 가지 요인에 의해서 살아간다. 첫째는 필요성이다. 둘째는 욕망이다. 그런데 욕망과 필요성의 차이를 구분 짓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성정모 교수는 말한다. “만일 우리가 무한한 욕구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하면 한계는 사라지고 무한정적으로 그 어떤 것들을 원한다. 그리고 끝없이 원할 때는 나누어 주기 위한 것은 절대로 남아돌지 않으며 항상 무엇인가가 모자란다. 그래서 그들은 소득과 부의 재분배에 대한 대화를 용납할 수 없다.”⑵
마지막으로 주기도문에 나타난 기본소득의 성서-신학-목회적 의미는 모두의 양식을 위한 것임에 있다.
성서(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는 십일조와 안식년 그리고 희년제도를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는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민족들 사이에 가난한 사람이 없도록 하는 사회보장제도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 이 제도를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양식이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보장하고 있다. 결국 성서는 같은 민족 가운데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전 이스라엘 민족의 배고픔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성서의 가르침은 이처럼 먹는 것을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 전 민족적 차원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일용할 양식(인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 모두는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본소득은 이 땅위에서 배고픈 사람,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이 없어지는 그 날을 성취하기 위한 최소한의 도구이다.
예수는 오천 명의 군중이 굶주리고 있을 때 제자들에게 말한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오늘도 예수는 우리들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홍인식 (순천중앙교회 담임목사)
⑴ John Dominic Crossan, Jeus A Revolutionary Biography(1994), 37~52 쪽
⑵ 성정모, 욕구와 시장, 그리고 신학, 홍인식 역 일월서각, 2000, 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