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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의 리더십: 생명의 경제질서를 세워라
  • 이기우
  • 등록 2020-08-19 18:39:10
  • 수정 2020-08-23 11: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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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0주간 수요일(2020.8.19.) : 에제 34,1-11; 마태 20,1-18


오늘 독서인 에제키엘 예언서 34장은 구약성경 안에서 목자론으로 유명한 대목입니다. 종교적 경전의 권위를 담아 현대적 용어로 풀이하자면 리더십에 관한 논어(論語)요, 지도력에 관한 금강경(金剛經)이며, 에제키엘판 목민심서(牧民心書)입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거슬러 예언하여라.


여기서 목자들이란 직업적으로 유목에 종사하는 양치기들이 아닙니다. 양치기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양 떼처럼 보살펴주시며 이끄셨던 하느님을 목자에 비유하곤 하던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위임을 받아 이스라엘 사회에서 공적 책무를 맡아 가지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여  부르던 직책명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종교와 정치가 결합된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였으므로, 임금과 신하 같은 정치적 공복(公僕)뿐만 아니라, 예언자와 사제 같은 종교적 공복들도 공동체 윤리에 일차적으로 책임이 있는 일꾼들이어서 이 목자론 예언을 들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라면 이 대상을 모든 공직자들, 엘리트들, 지식인들 그리고 종교적 공복인 사제들에게까지 폭넓게 넓혀야 할 줄 압니다. 평신도들 가운데에서도 조금이라도 많이, 조금이라도 먼저 사회적 혜택을 – 교회 경력은 물론이고 사회 교육에서든, 물려받은 재산에서든 – 받은 이들은 몽땅 해당된다고 보지요, 저는.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그들은 양들의 젖을 짜 먹고 양털로는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들은 잡아먹기까지 하면서도 양 떼는 먹이지 않았습니다.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았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도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았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습니다. 


그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야 했다.


목자들이 양 떼를 돌보지 않고 자기들만 먹고 있었기 때문에 양 떼는 목자 없이 흩어져야 했습니다. 흩어진 채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산마다, 높은 언덕마다 하느님의 양 떼가 길을 잃고 헤매었습니다. 그렇게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보는 자도 없고 찾아오는 자도 없었습니다. 


나 이제 그 목자들을 대적하겠다.


거짓 목자들이 더 이상 양 떼를 자기들의 먹이로 삼지 못하게 하느님의 양 떼를 내놓으라 요구하리라. 더 이상 하느님의 양 떼를 이끌지 못하게 하리라. 그러면서 참 목자로서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주시리라는 희망찬 예언으로 결론을 삼았습니다. 에제키엘의 예언자적 상상력이 담긴 이 목자상은 훗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 오셔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오늘 복음의 보도에서는 노동과 임금의 상관관계, 경제와 인간의 함수관계를 명쾌하게 밝혀주시는 계시가 나오고 있습니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하늘나라는 세상이라는 포도밭을 마련해 놓으신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불러 고용한 다음에 각자 살아가기에 필요한 만큼 임금을 주는 경제로 지탱됩니다. 노동자들은 일한 만큼 대가를 받습니다. 기본급입니다. 하지만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 노동자의 경우에는 가족수당을 더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생산성 향상에 기여한 공로가 크면 특별수당을 더 주기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의 최대한도 내에서 서로가 서로를 배려할 줄 아는 공동선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경제와 노동과 재산에 대한 복음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사회를 공동체적으로 조직하는 지혜와 기술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그리고 오후 다섯 시에도…


노동할 수 있는 기회로서의 일자리야말로 최고의 복지입니다. 이 고용을 통한 사회 조직화는 정치가 경제 분야에서 책임져야 할 가장 큰 의무입니다. 


맨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맨 먼저 온 이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여기서 한 데나리온은 기본급입니다. 그 노동자가 자기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돈입니다. 노동 시간이나 생산성 기여도와 상관없이 보장되어야 하는 기본임금입니다. 노동 시간이나 생산성을 기준으로 손익과 형평성을 무슨 진리처럼 따지는 경제학으로서는 도저히 이 하느님의 경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경제는 경제와 재산에 대한 복음적 상상력의 소산이며, 노동과 자본으로 공동체를 일구는 지혜와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진정한 경제학은 사랑과 온정으로 ‘생명의 부’를 이루고자 하는 진리의 학문입니다.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진정한 부와 행복’을 위한 이 경제적 상상력은 아담 스미스의 제자들이나 칼 마르크스의 제자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지도 모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두 부류의 제자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자본이라는 우상과 이 우상을 하느님처럼 숭배하게 만들고 있는 현대의 경제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부자들이 자신의 부를 공동체 윤리 안에서 소유하거나 사용하지 못하고 오로지 개인 윤리라는 근시안적 시력으로 자기 재산의 세계 안에 갇힌 노예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흔히 아담 스미스의 제자들인 신자유주의자들은 하느님처럼 자본을 운용하고 임금과 해고조건으로 노동을 관리하려들며 경제의 목표인 행복마저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양 처신합니다. 그런 자본-우상의 숭배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본의 봉사자로서 처신할 경제적 회심을 오늘날에도 요청하고 계십니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자본투자자는 자본에 대한 배당 이익만을, 경영자는 경영 노동에 대한 대가만을 받아가야지 그 이상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지 말라는 뜻입니다. 현대의 마르크스 제자들은 실업수당이나 기본소득 실험으로 아담 스미스의 제자들과 타협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두 진영의 제자들 모두 경제가 하느님의 영역임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회심해야 할 과제를 받아 안고 있습니다. 


내가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후하게 할 수 없다는 말이오?


경제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생명도, 자연도, 생태계 전체가 전부 하느님의 소유입니다. 그런데 자본가나 경영자나 부자들이 이런 잘못된 생각을 버리지 않고 돈을 쓸 줄도 모르고 벌 줄도 모르는 또 다른 이유는 교회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봉헌된 부를 자신에게 바쳐진 소유 재산으로 착각하고는 탐욕스런 부자처럼 돈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봉헌된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는 모범을 보여 주어야 경제적 리더십이 발휘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생명의 경제절서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자본가 및 경영자 부자들이 회심해야 하지만, 이들을 회심시키기 위해서는 교회가 먼저 경제적으로 회심하는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이들의, 가난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현재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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