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학위원회 >는 신학 나눔의 새로운 길을 찾아 ‘사건과 신학’이라는 표제로 다양한 형식의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매달, 이 사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사건 가운데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신학 이야기를 나누는 ‘사건과 신학’. 이번 주제는 ‘팬데믹스: 파국의 징후들’입니다. - 편집자 주
위기의 한국 사회와 교회
“퍼펙트 스톰”이라는 말을 한번쯤 들어 보셨을 것이다. 최근 이 말은 심각한 재난이나 위기 상황을 표현하는 용어로서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의 영역에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본래 이 말은 주로 기상학 영역에서 사용해 왔던 개념이다. 따뜻한 공기를 가득 담은 저기압 대와 차고 건조한 공기를 가두고 있는 고기압 대, 그리고 남쪽 열대지방으로부터 습기를 가득 몰고 달려온 태풍이 서로 만나서 일반 태풍보다 훨씬 강한 초강력 태풍이 만들어질 때, 그것을 “퍼펙트 스톰”이라 한다.
최근에 이 말은 기상학보다는 경제학에서 훨씬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공황과 같은 경제적 위기 상황을 비유로 설명할 때나, 미국과 중국의 제국주의적 패권경쟁과 무역갈등 상황에서 한국이 처할 수 있는 위기를 표현할 때, 퍼펙트 스톰이라는 비유를 사용한다. 상식적으로 이해하면, 여러 악재들이 예상 못한 방식으로 중첩되어서 위기와 재난을 훨씬 더 심각하게 만드는 상황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퍼펙트 스톰이라는 이 메타포가 오늘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 상황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재난이 계속되면서, 일상의 삶이 더 이상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 반년을 넘어서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얼마나 더 계속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 와중에 수십 명의 인명피해와 엄청난 재산피해를 내면서 지난 6월부터 8월 중순까지 50일 넘는 최장기 최악의 장마를 겪어야 했다. 이미 몇 해 전부터 우리는 기후위기 혹은 기후 역습과 같은 말을 들어왔다. 내년에는 또 그 다음 해에는 어떤 재앙이 기다리고 있을지,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 예상은 하지만, 그 규모와 피해가 어떤 것일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그런데 바이러스와 기후의 위기만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 열광주의로 무장한 극우 애국주의의 광풍이 재난에 위력을 더하고 있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의료의 손길이 가장 필요한 재난의 상황에서도 내 밥그릇에는 손대지 말라고 그 머리 좋다는 의사들이 강짜를 부리며 집단행동을 하고 있고, 혼자 사는 길이 아니라 함께 사는 길을 찾아야 하는 이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이 때가 기회라고 속삭이며 부동산 투기를 포함한 온갖 투기 판에 몰려드는 사람들이 무수하다.
삼각파도 정도가 아니라, 사각도 오각도 넘는 파도가 겹치는 이 상황이라면 충분히 퍼펙트 스톰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자연이 아니라 우리들 삶의 방식의 문제다.
언제나 그렇지만, 재난이나 재앙은 전혀 예상 밖의 자연적인 우연으로만 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조지 클루니가 주연했던 재난 영화 “퍼펙트 스톰”은 재난으로부터 생존을 위해 위대한 투쟁을 벌이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던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우리가 자연재난이라고 불렀던 재난의 실체와 근본원인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돈이 절박하게 필요했던 6명의 어부들이 위험을 무릅쓴 어로와 항해를 감행하다가 퍼펙트 스톰을 만나서 모두 희생당하는 이야기다. 바다의 생태도 변해서 과거와 달리 어획량도 현저히 떨어지고, 따라서 수입도 전과 같지 않은데, 돈의 필요성은 점점 더 절박해져 가는 상황이다. 그래서 그 6명의 어부들은 더 이상 충분한 어획량을 기대하기 힘든 허가된 어로수역을 벗어나, 기상변화를 예측하기 힘든 위험지역으로 간다. 거기서 그들은 꿈의 만선을 이룬다. 그런데 갑자기 얼음 창고가 고장이 나서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잡은 생선이 모두 썩어 버릴 상황에 처한다.
하지만 태풍은 예고되어 있고, 그것이 두 개의 기상전선과 만나서 퍼펙트 스톰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예측되는 상황이다. 위험을 피하려면, 태풍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피항해서 잠시 쉬었다 가야 한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는 배에 가득 실린 생선은 모두 버려야 하고, 모든 꿈은 허사가 되고, 이어서 엄청난 피해와 적자를 감당해야 하는 처지가 될 것이다. 반대로 위험을 무릅쓰고 항해를 감행해서 출발한 항구로 돌아가기만 하면, 그것은 바로 돈이 된다. 그리고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삶의 많은 문제, 돈으로부터 기인된 많은 문제들이 풀릴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은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이 두 선택의 갈림길에서 그들은 후자를 택했고, 결국 그들은 귀항하지 못한 채, 퍼펙트 스톰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영화 자체도 그렇지만, 적지 않은 평자들이 이 영화에서 자연과 인간의 숙명적인 대결을 보려고 한다. 그들에게는 자연과 인간의 대결은 숙명이다. 삶을 위해서 그리고 인간 문명을 위해서 과거에도 그렇지만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자연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퍼펙트 스톰에 갇혀 죽어 가는 그 여섯 명의 모습을 최대한 숭고한 모습으로 그려낸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재난은 퍼펙트 스톰 그 자체가 아니다. 아니 퍼펙트 스톰은 두 개의 기압 대나 두 개의 기상전선과 태풍이나 허리케인의 우연한 만남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우연한 만남의 배후에서 정말로 그 우연한 만남을 재난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있다. 잡은 생선을 돈으로 만들어야 하는 절박감, 위험을 무릅쓰고 자연과의 대결을 숙명적인 것으로 만드는 이 구조가 사실은 재난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지 않을까?
바이러스도, 태풍도, 저기압대도, 고기압대도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그것들은 모두 우리가 살아가는 생명세계를 구성할 뿐만 아니라 더 활력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요소들일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이 재난이 되고 재앙이 되게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이고, 우리의 삶의 방식이고, 생명세계의 동반자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영화 퍼펙트 스톰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자연과의 대결에 모든 것을 바치는 인간 생존투쟁의 숭고함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세계와 자연세계를 반드시 대결해야 하는 적대적 두 영역으로 갈라놓고, 불가능한 싸움에 몰두하고 있는 인간과 인간 문명의 어리석음을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나?
바이러스와 기후변화와 극단주의와 집단 이기주의의 물결이 겹쳐서 밀려오는 퍼펙트 스톰을 맞고 있는 우리 사회를 향해서, 대통령과 정부는 바이러스와 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고 한다. 코로나도 잡아야 하고, 경제도 유지 발전시켜야 한다는 말에 감히 누가 토를 달 수 있겠는가? 하지만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말이, 재난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삶을 그대로 회복시키겠다는 말이라면, 그래서 결국 어느 것도 잃지 않아야 하는 것이라면, 사태를 심각하게 잘못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시민들의 시선을 잘못된 방향으로 오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퍼펙트 스톰은 교회나 사회나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방식, 다시 말해 우리의 교회에 대한 이해, 사회에 대한 이해, 인간에 대한 이해, 이웃과 타인들에 대한 이해, 자연과 생태 환경에 대한 이해가 심각하게 잘못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징후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하고는 무관하게 이런 사태가 왔다고 생각하는 한, 올바른 대안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교회는 더 그러해야 한다. 교회가 무슨 책임이 있냐고 말한다면, 이미 그 교회는 하느님의 부름 앞에 귀를 막은 집단이다. 세상이 교회의 말을 듣지 않아서 하느님이 심판을 내린 것이라는 괴변을 늘어놓는 참담한 자들이 있다면, 후안무치(厚顔無恥)는 딱 그들에게 맞는 말이다. 교회와 신자는 더욱 철저하게 자기를 성찰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며, 이 재난을 불러온 자신의 책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삶의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모색이 정말로 필요한 때다. 코로나 바이러스만 없애면 되는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사람들이 더 위험한 바이러스가 올 것을 이미 경고하고 있지 않은가? 기록적인 더위, 기록적인 가뭄, 기록적인 홍수와 장마, 기상 이변과 기후 역습이라는 말을 한 두 해 들은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내년에도 예외는 없을 것임을 잘 알지 않는가? 아무리 정의와 공평을 외쳐도, 그것을 단순간에 무력화시키는 투기의 광풍과 개인적 집단적 이기주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 시장의 자유와 이익 추구의 자유의 깃발을 들고 야만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할 것인가?
당연히 전염병으로 인한 재난도 극복해야 하고, 경제 문제도 극복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자연과의 관계, 바이러스와의 관계,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 질서도 새롭게 변화시킬 각오가 아니라면,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향한 진정한 결단이 없다면, 앞으로 잡아야 할 토끼는 훨씬 더 많아질 것이고 잡아도 잡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 매달리게 될 것이다.
양권석(성공회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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