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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오고 마는 내일이 두려운가? - (지성용)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 지성용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20-12-17 16:56:43
  • 수정 2020-12-17 16:5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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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추석 공영방송 KBS에서 30% 가까운 시청률 폭탄이 터졌다. ‘고향역’, ‘18세 순이’, ‘울긴 왜 울어’, ‘홍시’, ‘영영’, ‘공(空)’, ‘잡초’ 등 그때그때의 시대상을 반영한 노래로 사랑을 받아온 나훈아가 이번 공연에서 ‘테스형’으로 역사 안에 묻힌 가수 나훈아를 다시 소환했다. ‘나훈아 어게인!’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에게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라고 질문을 던지는 가사가 중장년층뿐 아니라 젊은 세대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테스형’ 노랫말에 담긴 메시지는 이 시대 대중들이 하고 싶은 말을 가득 담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으며 살고 있다. 테스 형에게 세상이 왜 이렇고, 세월은 또 왜 저러냐고 물어봤더니, 테스 형도 모른다고 하더라. 


▲ (사진출처=다날엔터테인먼트 유튜브 갈무리)


나훈아는 “세월은 누가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가게 돼 있으니, 이왕 가는 거, 우리가 끌려가면 안 된다”라며 “우리가 세월의 모가지를 딱 비틀어 세월을 끌고 가야 한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일단 대중이 인문학을 소환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소크라테스를 시대의 장으로 끌어올린 나훈아의 역할이 크다. 


“죽음이 만약에 일체의 감각에서 끊어지고 영원한 숙면에 지나지 않는다면 놀랄 만큼의 덕을 보는 것이요, 반대로 죽음이 이곳 이 시간에서 또 다른 시공으로의 여행이라면 즉 전해지는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죽으면 그곳에 간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보다 더 크고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 (플라톤, 『소크라테스를 위한 변병』, 삼성출판사)


테스형은 이렇게 말하며 죽음을 초월한다. 그러나 훈아 형은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고 노래한다. 이것이 삶의 현실이다. 인간은 자신이 당면한 실존의 불안, 죽음을 감지한다. 그러나 드러내 놓고 싶지는 않다. 


인간의 죽음이라는 철학적 문제


‘인간’이란 문제에 직면하여 우리는 이전보다 더욱 다양한 지식을 갖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더욱더 미궁에 빠져들고 만다. 죽음이란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대체 인간의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은 인간의 초월적 국면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실존의 한 측면이고 하나의 현상이다. 


“죽음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죽음 이후 세계에는 정말 영원한 생명이 존재하는가?”


인류의 지성과 학문적 노력은 죽음이라는 문제를 끊임없이 추적하려고 하지만 더 이상의 진전은 없다. 죽음은 하이데거, 데거 형의 말처럼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다양한 철학적 접근들이 시도된다. 하지만 그 어느 철학도, 사상도 죽음이라는 문제를 명쾌하게 설명해 내지 못한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자기 죽음을 응시한다. 신문과 방송에서 매일매일 죽어 나가는 많은 사람에 대해서는 무감각하지만, 나의 부모, 형제, 자매, 친지들의 죽음을 맞닥뜨리게 되면 그때는 조금 양상이 다르다. 멈추어 서고 사색하고, 죽음 앞에 무기력한 인간 실존의 무능을 절절히 체험한다. 죽음은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재진행형이다. 


죽음은 동시에 삶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살기도 하지만 죽어가고 있기도 하다.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을 환기하는 것을 애써 피해 나간다. 우리 불안의 원인은 우리들의 이러한 불안한 실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문제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박상륭은 ‘죽음의 한 연구’에서 “순수를 지켜나가는 유일한 방편은 끊임없이 죽음을 환기하는 일”이라 말한다. 


그러나 파스칼의 말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죽음을 회피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기분전환 거리’를 찾아가며 우리 실존의 문제를 피해간다. 트롯트, 먹방(먹는 방송), 쿡방(요리 방송), 드라마, 스포츠, 전지적 참견시점으로 남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며 소외된 ‘나’를 방송 화면에 투영한다. 드라마,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혼연일체가 되어 나의 실존을 벗어나거나 떠나버린다. 유체이탈과 주어 없는 서술은 단지 모 대통령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시대 철학이나 문학, 사회과학적 사유, 인문학 전체가 효율과 기술, 능률과 생산성으로 세상의 모퉁이로 밀려나면서 우리 사회는 더욱 삭막해지고 숨 쉴 틈조차 없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황량한 사막을 걷게 되었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삶의 방향


▲ 멕시코의 `죽은 자들의 날`. 각 가정, 공원 등에 제단을 차리고 죽은 자들을 기린다.


종교,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지는 문제들을 묶어 단순화해 보면 사랑과 죽음의 문제가 중심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지만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그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육체의 죽음으로 삶이 끝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곧 의식이나 정신작용은 육체의 부수현상에 지나지 않으므로 육체의 분해와 함께 인간존재는 스스로 사라지고 만다는 생각이다. 이는 유물론자들이나 무신론자들의 견해로서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적 차원은 관심이 없다.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 실험이 끝나고 평가되면서 복잡한 정치경제학의 문제를 자본과 임노동의 단순한 대립 항으로 사회구성체에 대한 결정론적 인식을 소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규정했지만, 전제군주보다 가혹한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의 인권유린과 생산력 저하는 결국 사회주의 파산을 선고했다. 특수하게도 한반도의 북한 사회주의는 ‘주체사상’이라는 맑시즘의 토착화로 아직 체제를 유지하며 나름의 외교를 진행 중이다. 


‘죽어봐야 안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 부류에 속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은 불가지론자들이나 실험을 통해 증명하지 않고는 믿지 않는 실증주의자들로서 사후(死後)의 운명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주장을 전개한다. 내 손으로 예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믿을 수 없다는 토마스 같은 경험주의자들, 실증주의자들은 죽음에 대한 언급을 그리 유쾌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죽어도 그 영혼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존재한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윤회론자들이나 심령주의자들의 견해인데 죽음을 영혼과 육체와의 결합이 이탈된 상태로 이해한다. 가령 동양에서 죽음은 “돌아가심”이다. 즉, 저세상으로 건너감이 아니라 원점으로의 환원이다. 곧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영속적으로 존재함을 의미하기에 제사를 통해 조상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태도는 동양에서 예의 한 측면으로 자리 잡았다.


마지막으로 ’죽음은 삶의 관문’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 종교인들이 있다.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참된 삶의 시작이라는 생각이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생각이다. “그들은 자기의 생명을 선물과 과제로 받아들이며 형제들에게 봉사하며 살아간다. 죽음의 부정적 성격을 변모시켜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의 신앙으로 하느님 나라에의 진입이라는 긍정적 사(死)관으로 역전을 시도한다.”(G. 그레사케, 『죽음』, 가톨릭출판사, 1985) 그리스도 교회의 가장 큰 대중적 성공 요인은 바로 사후 문제에 대해 ‘부활’이라는 희망을 민중들 안에서 신앙으로 끌어올렸다는 측면일 것이다. 


서양철학에서 죽음이라는 문제


스토아학파나 에피쿠로스학파의 경우에는 사후 세계를 무(無)라고 단정하고 그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변을 버리고 오직 현재의 생에만 충실을 기하라고 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죽음은 우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일단 죽음이 들이닥치면 우리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 자체는 무통(無痛) 무의식(無意識)의 깊은 잠과도 같은 것이며 의식의 상실일 뿐”이라고. 


플라톤은 죽음을 신체로부터 불사의 세계로 영혼을 옮기는 일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넘어가는 소멸은 운동 또는 변화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면서 변화를 다루고 있을 뿐, 생성과 소멸의 문제 결국 죽음에 대한 문제를 회피하고 있다. 중세 초기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스토아학파의 영향을 받아 원죄설과 삼위일체론에서 제2위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 교리를 체계화하여 죽음의 공포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 나간다. 그는 생명의 권태와 동시에 죽음의 공포가 항상 내 마음 안에 있으며 죽음의 공포는 하느님의 은총을 통하지 않고서는 극복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하이데거는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로서의 인간을 ‘죽음에로의 존재(Sein zum Tode)’라고 규정한다. 인간은 죽음을 떠나서는 삶을 알아들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이란 언젠가 닥쳐오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삶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현 존재의 구성이다. 죽음은 시간적으로 보아 다만 하나의 “아직 아니”가 아니라 하나의 “벌써”의 의미로서 현 존재를 규정하고 있다고 바라본다. 그리고 그는 “죽음이 무엇인가?”의 질문에 “죽음은 무(無)의 사당(祠堂)이다. 그리고 무의 사당으로서의 이 죽음은 존재의 은신처이다.”라고 말한다. K. 야스퍼스는 죽음을 인간의 한계 상황에서 나타나는 실존적 불안으로 보고 이는 인간이 자기를 사실적인 제 요소로부터 초월케 하여 자기 자신을 미래로 투기시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실존주의는 죽음을 ‘자기초월’이나 ‘자기투기’로 보고 있다. 


동양의 죽음에 대한 연구


장자가 죽음에 임박하자 그의 제자들은 장자를 위하여 장례식을 장엄하게 치르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자는 “땅으로 관을 삼고 하늘로 관 뚜껑을 삼겠다. 해와 달과 별이 내 장식품이 되리라, 자! 내 장례는 이미 준비가 되었으니 무엇을 더 준비하랴!” 하고 말하였다. 이에 짐승이 시신을 뜯어먹을까 걱정이라고 말하자 “땅 위에서는 독수리와 까마귀의 밥이 되고 땅 밑에서는 귀뚜라미와 개미의 밥이 되면 한쪽에만 먹히는 것보다 낫지 않겠느냐?” 고 장자는 말한다. 


장자는 초기에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매우 중시했으나 점차로 삶과 죽음은 하나이며 이것은 한낱 꿈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가 볼 때 사람들은 항상 꿈을 꿀뿐만 아니라 꿈속에서 또 꿈을 꾸는 존재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꿈에서 깨어난 후에야 비로소 꿈이 꿈인 줄 알게 된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큰 깨달음의 능력이 있어서 크게 깨우친 후에는 인생이 모두 하나의 커다란 꿈임을 알게 된다. 


“한 번의 잠을 일생과 비교한다면 한순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단지 그 시간의 길이로 꿈과 깨어 있음의 표준을 삼는다면 한 번의 잠이 일생에 비해 보면 극히 짧아 꿈이라 할 수 있듯이 일생은 영원한 죽음보다 짧으므로 곧 꿈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그 짧은 잠 속에서의 꿈은 반드시 우리가 깨어나야만 꿈인 줄 알게 되는 것과 같이 우리는 반드시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의 짧은 인생을 꿈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이은봉, 『동양철학입문』, 덕성여자대학 출판부, 1990.) 


죽음은 피할 수가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떠한 기술로도 피할 수 없고 피해서 갈 장소도 없으며 돈으로 이것을 피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살 수 없다. 죽음에 대적할 수 있는 무기는 아무것도 없다. 삶의 원인은 비교적 적은데 비해 죽음의 원인이 되는 것은 너무 많다는 것도 수학적 공식만큼이나 확실한 것이다. 


죽음은 나 혼자의 일이요 친구나 친지들도 내 죽음의 동반자가 될 수는 없다. 죽을 때에 나는 바늘 하나도 가지고 갈 수 없다. 자신의 육체조차도 아무 소용이 없다. 육체가 나를 동반하여 주지 않기 때문이다. 나에게 도움이 되어주는 것은, 오직 나의 마음뿐인데 ‘사랑과 자비 깨달음’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만이 죽을 때에 나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죽음의 불가피성과 예측 불가능성은 이처럼 ‘분석적 명상’으로도 쉽게 이끌려 나올 수 있는 결론들이다. 불교는 이런 방식으로 실제를 내면화하고 죽음의 불가예측성을 내면화하여 영적 발전의 긴급함을 실감하도록 한다. 이러한 행위들을 통하여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자신의 육체와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E. 퀴블러 로스의 ‘인간의 죽음’


E. 퀴블러 로스는 자기 죽음이 임박한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죽음을 단계적인 과정 안에서 다섯 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다고 설명한다. 첫 단계는 죽음에 자신을 내맡기기를 거부하는 단계이고(부정) 두 번째는 왜 하필이면 죽음의 위협이 자신에게 닥쳐왔는지 분노를 느끼는 단계이고(분노) 세 번째는 이미 절박하게 다가온 미지의 운명인 죽음을 피하고자 하느님과 담판을 하는 단계이고(협상) 네 번째는 체념과 절망이 섞인 의기소침한 단계이다(우울). 마지막으로 죽음에 ‘동의’ 단계로 인간의 죽음을 다섯 단계를 기술한다. 그런데 위의 다섯 가지 단계는 하나하나 차례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단계가 혼합되어 발생한다. 죽음을 맞이하는 당사자는 단계마다 깊은 절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죽음을 맞이한 당사자 안에서 이러한 죽음에 대한 거부가 일어난다고 하여도 사선(死線)에 놓인 그가 자신이 지금 죽음과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죽음의 문제를 직접 인식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더욱 인간답게 죽을 수 있으며 죽음을 거부하기보다는 가볍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적 평화를 소유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 다양한 과정들은 죽음에 이른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 그의 삶에 영향을 미쳤던 모든 것에 의해 규정된다. 


따라서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된다거나 죽음에 직면할 때 모든 사람이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생전에 깊이 사색하고 어떤 일에 대하여 바른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 자신의 처지를 정직하게 표현할 줄 알았던 사람들은 신이나 죽음에 대해서도 올바르고 이치에 맞는 견해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선악에 대해 엄한 판결만을 내리는 무섭고 옹졸하며 잔인한 회계사 같은 하느님에서 벗어나 죽음의 경위 역시 공포나 두려움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고 의연한 종말로 이해할 것이다. 


현대의 의료발전과 죽음에서 소외되는 인간 


▲ Jean-Michel Basquiat < Riding with Death >


한 번밖에 살지 못하는 인간 생명의 귀중함을 가르치는 생명 교육이 오늘날 참으로 절실해졌다. 텔레비전이나 영화는 인격적 죽음의 의미를 가르치지 않고 그것을 경시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나는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고 “언젠가”라는 것이 ‘바로 다음 순간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의학의 급속한 발달은 우리의 생명을 과거보다 훨씬 연장했다. 그런데 반대급부로 오늘날 인간은 ‘탄생과 사망’이라는 인생의 처음과 끝에 관하여 의사의 철저한 관리에 맡겨진다. 이제 사람은 누구라도 나고 죽을 때 한결같이 병원의 신세를 지게 된다. 사제들에게 중요한 일이었던 긴박한 순간에 임종자에게 다가가 종부성사(병자성사)를 주는 것도 힘들어졌다. 교회병원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에서도 사제들의 입장을 가로막는다. 


우리의 탄생은 또 어떠한가? 우리 시대, 태어나는 아이들은 어느 날 병원의 어느 구석방에서 의사와 간호사만이 참석한 곳에서 태어났고 태어나고 있으며, 태어날 것이다. 아이를 보는 기쁨도, 병이 났을 때 친척들의 인간적인 위로도 삶의 한복판에서 사라지고 만다. ‘포괄 병동’이 확대되면서 병원에 보호자 1인 외에 환자들의 모든 수발은 간호사와 간호조무사의 서비스업무가 되었고, 환자를 방문하는 일도 쉽지 않게 되었다. 


언젠가 닥치게 될 죽음도 오로지 병원의 관리 체계 아래에 있는 의사와 간호사가 모든 것을 떠맡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육체를 병원에 맡기는 것을 뛰어넘어 정신적인 면의 모든 것도 병원 측에 맡겨 버리는 현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탄생의 순간에 입회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임종의 순간에 입회하는 것도 거부당하기 때문에 친한 사람의 탄생과 죽음도 보지 못한다. 사람은 육체적인 치료나 간호를 받고 있을 때도 정신적인 면에서 가족이나 친구의 위로나 대화가 필요하다. 걱정되는 일이나 고민을 들어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의학적인 진보로 인간은 이전의 세대보다 더 쓸쓸해졌고 고독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현대의 의료행위는 과연 인간을 중심에 두고 있는가?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도 한번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죽음은 참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사건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만큼 무감각하게 느껴지는 사건도 없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망각은 현 실존의 망각을 유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일 죽음이 무의미한 것이라면 삶 또한 궁극적으로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삶에서 발견될 수 없는 어떤 실존적 충만함이 죽음에 부여되어 있다면 삶 자체도 제 가치에 비추어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환기함으로써 삶에 더욱 성실해지고 진지해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인간은 죽음을 통하여 삶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선물이라는 것을 체험하게 되고 비로소 삶에 성실해지고 진지해질 수 있는 것이다. 나훈아가 끌어올린 철학, 인문학의 새로운 시작이 필요한 시대다. 세상을 읽어낼 수 있는, 신문이나 방송을 더욱 비판적으로 보고 들을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하는 시대다.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아! 테스형 아프다 세상이 눈물 많은 나에게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세월은 또 왜 저래

먼저가본 저세상 어떤 가요 테스형

가보니까 천국은 있던 가요 테스형”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공동선> 2020년 11, 12월호에도 실린 글입니다.

[필진정보]
지성용 : 천주교 인천교구 용유성당 주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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