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황청 개혁을 보좌하는 최측근이자 독일 가톨릭교회의 변화에 앞장서고 있는 추기경이 독일에서 벌어진 성직자 성범죄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며 자신이 맡고 있는 대교구장직 사임 서한을 제출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지난 4일, 뮌헨-프라이징 대교구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된 라인하르트 마르크스(Reinhard Marx)의 사임 서한은 추기경이 직접 연루된 사안에 의한 것이 아니라, 추기경이 지금까지 보여온 가톨릭교회 개혁 의지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는 사람은 살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 추기경은 교황에게 보내는 사임 서한에서 “위기는 우리의 개인적 실패,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것”이라며 “제가 보기에 우리는 낭떠러지에 도달한 듯하다. 하지만 이는 전환점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특히 마르크스 추기경은, 피해자가 아닌 자기 평판만을 생각하여 행동하는 지도자들을 겨냥한 듯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는 사람은 살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동안 마르크스 추기경은 가톨릭교회 성범죄를 반성하고 바로잡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먼저, 지난 4월 마르크스 추기경은 독일 정부가 수여하는 최고 훈장 독일연방공화국 공로장 수여자로 선정되었으나 독일 가톨릭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직자 성범죄의 책임을 지겠다며 수상을 거부했다. 이에 앞서 뮌헨-프라이징 대교구 산하 성범죄 피해자 재단 설립을 위해 사비로 50만 유로를 기부하기도 했다.
독일 가톨릭교회 성범죄는, 지난 2018년 독일 27개 교구를 대상으로 한 일명, ‘MHG 보고서’가 발표되면서 그 윤곽이 드러난 바 있다. 당시 보고서에 따르면 70여 년간 독일 가톨릭교회에 발생한 성직자 성범죄 피해자는 3,677명, 가해 성직자의 수는 1,670명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제도교회 대표하는 주교들 모두에 공동책임 있어
마르크스 추기경은 서한에서 개인적 책임이 없다는 이유로 지역교회, 보편교회를 대표하는 고위성직자들이 보이는 미온적 태도 또는 자신에게는 책임 없다는 식의 회피하는 태도를 지적했다.
그는 서한에서 “제게 있어 과거 교회 관계자들이 저지른 성범죄라는 재앙에 책임을 함께 하는 일이 중요하다”며 “10년간의 조사와 감정들에서는 개인적 차원의 실패와 행정적 실수와 더불어 제도적이고 ‘체계적인’ 결함이 있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드러났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최근 논의에서는 제도교회에 잘못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성범죄 위기 상황에서 개혁과 쇄신에 대한 논의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하여 쾰른대교구(교구장 라이나 마리아 뵐키 추기경)는 지난해 12월 준비되었던 1차 보고서에 미흡함이 있다며 이를 비공개 처리하고, 올해 3월 재조사를 통해 마련된 2차 보고서를 공개했던 사건이 여러 언론들에서 거론되었다.
당시 발표된 800쪽 짜리 쾰른대교구 보고서는 1975년부터 2018년까지 14세 미만 아동 314명이 피해를 입었으며, 성직자를 포함한 가해자는 202명이라고 보고했다.
공개된 보고서는 뵐키 추기경의 개인적 책임이 없다고 지적하며 쾰른대교구 성범죄를 모두 과거의 일로 치부했다. 그러나 독일 언론은 2015년 뵐키 추기경이 한 사제의 심각한 성범죄를 교황청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다.
1차 보고서를 명확한 이유 없이 비공개하고, 뵐키 추기경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을 명시한 2차 보고서 내용으로 인해 쾰른 대교구 보고서에는 투명성이 결여되었다는 비판이 줄을 이었다.
특히 쾰른대교구에서는 뵐키 추기경이 이미 사망한 교구장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으며 교구장으로서의 책임을 회피한다는 지적과 함께 “뵐키 추기경이 자신에게는 어떤 도덕적 책임도 없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 유감이다”라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해당 보고서는 과거 쾰른대교구에서 총대리로 근무한 바 있는 함부르크 대교구장 스테판 헤세(Stefan Hesse) 대주교와 2014년 은퇴하여 2017년 사망한 전 쾰른대교구장 요아힘 마이스너(Joachim Meisner) 추기경이 성범죄 은폐에 가담했다고 지적했고, 이로 인해 헤세 대주교는 교구장 사임 서한을 제출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뵐키 추기경이 관여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헤세 대주교는 2014년 뵐키 추기경 착좌 당시 쾰른대교구 총대리로 재신임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뵐키 추기경은 헤세 주교의 주교서품에 공동서품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러한 논란이 일자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청 사도방문을 통해 쾰른대교구 성범죄 실태 파악에 직접 나섰다. 지난 7일 스웨덴 스톡홀름 교구장 안데르스 아르보렐리우스(Anders Arborelius) 추기경과 네덜란드 로테르담 교구장 요하네스 판 덴 헨드(Johannes van den Hende) 주교를 파견, 뵐키 추기경의 책임을 포함한 조사를 실시했다.
“피해자들에 대한 태만과 무관심은 분명 과거 우리의 가장 큰 잘못”
“저는 42년 간 사제로, 25년 간 주교로 살아왔고, 그 가운데 20년은 큰 교구의 교구장을 지내왔다. 안타깝게도 교회와 속세의 인식 가운데 주교들의 평판이 떨어지고 있음을 느끼며, 평판이 완전히 바닥에 떨어진 것일 수도 있겠다. 책임을 다하는데 있어 개인이 저지른 잘못과 실수를 증명하는 기록이 있을 때에만 대응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은 일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주교로서 우리는 우리가 교회 전체를 대표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해야 한다.”
마르크스 추기경은 이 같은 입장을 밝히며 “이러한 질책들을 과거와 당시의 담당자들에게 미루는 식으로 ‘묻어버리려’ 해서는 안 된다”며 “피해자들에 대한 태만과 무관심은 분명 과거 우리의 가장 큰 잘못”이라고 반성했다.
특히 이러한 잘못을 반성하는데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이 ‘공동합의적 여정’임을 강조했다. 마르크스 추기경은 가톨릭교회 내 성범죄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개인적 실수와 제도적 실패이며, 여기에는 교회의 변화와 개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마르크스 추기경은 “이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한 전환점은 ‘공동합의적 여정’ 뿐이며, 이는 교황님께서 ‘독일 가톨릭교회에 보내는 서한’에서 강조하셨듯 ‘영의 식별’을 가능케 하는 여정”이라고 말했다.
마르크스 추기경은 사임을 통해 “독일뿐만 아니라 보편교회의 새로운 시작, 새로운 출발을 위한 개인적인 신호를 보낼 수 있을 것”이라며 “가장 우선하는 것이 직무가 아니라 복음의 사명임을 보이고 싶다”고 강조했다.
프란치스코 교황, 이례적으로 사임 가부 결정 전 서한 공개 허락
교황은 마르크스 추기경의 사임이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추기경 사임 서한을 공개해도 좋다는 이례적인 결정까지 내렸다. 이로 보아 이번 서한의 의미는 단순한 고위성직자의 사임 의사뿐만 아니라, 마르크스 추기경이 가진 상징성을 고려하여 오늘날 성직자 성범죄를 해결하는데 큰 책임을 져야할 주교들의 책임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황청 내외로 중책을 맡고 있는 추기경의 교구장직 사임을 수리할지는 미지수다.
현지에서도 마르크스 추기경의 사임 의사를 전혀 예상치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프랑스 일간지 < La Croix >는 “우리는 매우 놀랐다”, “크게 실망했다. 마르크스 추기경 말고 분명 사퇴할 사람은 따로 있다”는 뮌헨-프라이징대교구의 반응을 보도했다.
영국 가톨릭 전문 매체 < The Tablet >은 이번 사임 서한이 “마르크스 추기경이 그리스도교 복음을 강력하게 증언하는 것”이라며 이번 서한을 통해 마르크스 추기경이 교회지도자들의 책임, 교회지도자들의 신뢰성을 특히 강조하고 있는 것이며 이렇게 지도자가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가톨릭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평신도, 성직자, 수도자가 모두 함께 참여하는 공동합의성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독일 주교회의 의장 게오르그 바칭(Georg Bätzing) 주교는 마르크스 추기경의 사임 서한을 두고 “몇몇 외적 조치, 사법·행정적 조치로 이 강력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이 틀린 것”이라고 말했다.
바칭 주교는 “(서한에서) 강조된 체계 내 실패에는 체계 내 대응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 추기경의 메시지이며 그는 공동합의적 여정 가운데 있는 우리를 더욱 북돋아주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유럽 가톨릭교회 주교들 역시 충격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프랑스 주교회의(CEF) 의장 에릭 드 물랭-보포르 (Éric de Moulins-Beaufort) 대주교는 “마르크스 추기경의 사임에 아주 크게 놀랐다”며 “교황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 이 결정의 이유가 담겨있기는 하지만 그가 홀로 이렇게 행동했다는 사실이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마르크스 추기경은 현재 교황청 추기경 평의회(C7) 위원이며, 교황청의 재정 정책을 수립하는 재무평의회 의장을 맡고 있다.
이외에도 마르크스 추기경은 2012년부터 2020년까지 독일 주교회의 의장을 맡아 2019년 시작된 독일 가톨릭교회 차원의 시노드 ‘공동합의적 여정’(Synodal Way)을 주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