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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과 상식, 바늘 도둑이 소 도둑이 된다 - (김웅배) ‘공정과 상식’은 영혼없는 목소리로 공허히 부르짖을 일이 아니다
  • 김웅배
  • edit@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21-12-23 13:20:01
  • 수정 2021-12-23 13: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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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영부인이 될지도 모르는 한 여인의 행각이 중원을 흔들고 있다.  


그들 딴에는 무슨 큰 잘못이냐며 강변(부분적으로는 몰라도 전체적으로는 허위 경력이 아니다?)하면서 오히려 강호를 겁박하고 있다. 그러는 한편, 그들의 리그에서는 본부장(본인, 부인, 장모)을 어떻게 변호해야 할 지 고심 중이지만 그들의 바램과는 달리 아무 것도 모를 것이라고 여기는 민초들에게 엄청난 뭇매를 맞고있는 중이다.


죄라는 것도 그 정도에 따라 용서의 허용 범위가 있다. 하느님께서도 잔죄는 용서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실정법의 위반이라도 죄질에 따라 훈방 조치라는 것도 있다. 범죄로 인해 벌을 받아야 할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경계선은 항상 애매하긴 하다. 검사의 기소권이 그래서 중요하다. 그러나 그렇게 기소되어도 판사의 ‘법과 원칙’에 따른 재판으로 명판결도 되고 욕을 바가지로 먹는 판결도 나올 수 있다. ‘법과 원칙’을 입에 달고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검사가 있는가 하면 그런 말은 아예 입에 달지 않고도 묵묵히 일하는 검사도 있다.


이력서에 학력이나 경력을 부풀려 허위 이력을 기재하는 행위와 단순히 남보다 돋보이기 위해 경력을 부풀려 얘기하는 행위는 엄연히 다르다. 때에 따라서는 그 경중을 따지기가 쉽진 않지만 공기업이든 사기업이든 어디를 들어갈 목적으로 자신의 이력을 허위로 적는다면 그건 사기가 된다. 그러나 그냥 말로서 자기과시로 경력을 부풀리는 것은 그나마 개인적 인격적 차원의 문제이지 타인에게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그 사실이 발각되었을 때 쪽팔리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흔히 허위 경력을 통해 자신을 거물인양 행동하는 증세를 리플리 증후군이라고 한다. 사실 리플리 증후군은 일반적인 사람에게도 어느 정도 있다. 자신도 모르게 의도치 않은 허언을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적이든 사적이든, 이력서에 습관적으로 허위를 기재 할 때는 문제가 달라진다. 일종의 공적 문서로 자신의 이력서를 해당 기업에 제출한다는 것은 자신이 쌓아 온 훌륭한 경력을 알아달라는 뜻인데 허위라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미국은 알려진 대로 신용사회이다. 관공서나 어디에서도 자신의 싸인이 자신을 증명한다. 인감증명이 따로 없다. 여러 종류의 설문을 하면서 그 진위도 가리지 않는다. 거의 다 믿어준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허위로 판명이 날 때는 그 댓가를 치른다. 물론 특별한 경력은 증명이 필요하지만 그것조차도 위조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모두 그렇다는 건 아니다. 허나 이제 한국 사회도 이미 신용사회로 굳어졌다. 


그런데 그녀의 회사에 들어오려는 사람이 그런 허위 이력서를 제출했어도 그 사람을 채용할까? 자기 처의 허위기재 행태를 보고도 전체적으로 허위가 아니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자가 바로 몇달 전 까지만 해도, 아직 진위가 가려지지 않았지만, ‘표창장 위조’라는 엄청난 범죄(?)를 밝혀낸 대한민국 검찰총장이었다. 뭐 그럴리는 없겠지만 혹시 그가 대통령이라도 되어 각료를 임명해야 할 때 그의 이력에서 본인의 처에게서 발견된 만큼의 허위가 발견된다면 전체가 다 허위가 아니므로 그대로 임명해야 한다고 우길까? 표창장만 위조를 하지 않았다면? 


공정과 상식 회복’의 선도자이면서 ‘정의감’에 투철하고 ‘법’을 강조하는 그 후보자의 처연한 모습으로 봐서는 임명은 커녕 추호의 용서가 없어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과거의 관행이라면서 허위기재까지 용납한다면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과거에는 각 학교의 사정에 따라 강사를 쉽게 알음알음 뽑는 것이 관행이었을 수 있겠지만 허위기재 자체가 관행이란 얘기는 금시초문이다. 이 후보라는 자는 적당히 물을 타서 요점을 흐리려한다. 강사는 그냥 학교 재량으로 뽑는 것이 관행이라며 이력서의 허위 기재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란 식으로 얼버무린다. 어차피 들어갈 터이니 강사 채용에는 하등의 영향이 없다는 뜻이겠다. 어차피 채용될 사람이 형식상 이력서를 낸 것이라면 왜 허위 기재를 했을까?   


스펙을 쌓아 남과 다르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우리 젊은이들이 얼마나 노심초사를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별것 아닌 자그마한 경력을 비틀어 허위로 부풀리는 것이 일상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나중에는 얼마나 큰 경력을 허위로 적어 낼 유혹을 받을까? 젊은이들이 스펙을 허위로 적어내어도 그만이라면 왜 스펙을 쌓아야 하는가? 


경력이 부족하지만 뭔가 있어 보이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그런 허위 스펙을 쌓았거나 아니면 무슨 짓을 해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 확실한 검사 남편의 빽을 믿은 결과였을 지도 모른다. 아마도 두가지 다 설득력있는 추론일 것이다. 더 가관인 것은 약간의 사실 위에 허위의 옷을 조금 입히는 행태가 더 지능적이면서 계획적이고 의도적이란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이런 상황이 아니다. 자신들이 한 행위의 위법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게 아니라 인지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인지하지 못하는 것과 인지하지 않는 태도는 완전히 다르다. 이 태도의 여하가 그간 말썽 많던 부정 부패 무소불위 검찰의 척도이기도 하며 검찰 개혁의 근본 이유였다. 자의적 또는 의도적으로 인지하지 않으려는 이 태도가 우리나라 일부 정치 검찰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검사의 수사 행태가 어땠을 지는 불문가지다. 남의 눈에 티는 아주 자세히 보여도 자신의 눈의 들보는 의도적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니 자기 처의 비위가 무겁게 보일리가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런 행각을 수년 간 방치할 수 있었단 말인가.


아이가 사탕을 훔친 것과 어른이 돈을 훔친 것은 죄질상 비교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바늘 도둑이 소 도둑으로 진화된다는 것은 개연성 있는 프로세스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어릴 적 훈육이 중요한 것이다. 허위 이력을 적어냈다고 감방에 보내는 것은 과한 형(刑)벌이다. 표창장을 위조했다며 4년형을 구형한 것은 예외로 치더라도. 문제는 그러한 허위 날조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해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반성을 하는 삶을 산다면 일회성으로 끝날 일이다. 


그런데 바늘 도둑이 차근차근 소 도둑이 되는 길을 밟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들은 수년간에 걸쳐 계속적으로 조금씩 양태를 달리해 변조를 해 온 것도 모자라 오히려 큰 허위는 아니라고 뻗대고 있다. 훌륭한 정치 지도자도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다. 그렇다고 아무도 그런 인간의 한계를 탓하지 않는다. 지도자에게서 성자의 삶을 요구하는게 아니다. 단지 그 후, 잘못에 대해 소명하는 성실성과 정직성에 더 큰 비중을 둔다. 


닉슨의 대통령직 사퇴가 가장 큰 예이다. 당시에 우리는 큰 혼란을 느꼈다. 아니 도청이 그렇게 큰 죄였던가? 군부 독재 시절, 참담한 온갖 공권력의 불법을 보아 온 우리로서는 미국의 도청 따위의 상황은 그야말로 바다 건너 행복에 겨운 지구 최상 민주주의 나라의 과장된 제스츄어로만 생각했었다. 그런 미국에서도 도청 사실 자체보다는 지도자의 거짓말이 시민들의 공분을 산 것이다. 도청 사실을 인정하고 진심어린 사과를 했다면 닉슨은 결코 쫓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일반 가정에서 사실상 훈육의 첫 일성으로 ‘정직하라’ 라는 것은 이제 구태의연하다기보다 민망하기까지 하다. ‘정직하라’는 현재 감옥에 들어가 있는 전직 대통령의 가훈이라고 한다. 위선의 첫걸음이 거짓말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면, 결코 해서는 안될 일이 거짓말인데 일부 유력 정치인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오7,5)


무릇 인간이 인간다우려면 항상 되새겨 봐야 할 구절이다. 권력의 달콤한 맛을 아는 자들은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착각에 빠져 이 성경 말씀의 경고를 한 귀로 흘려 버린다. 지도자연하는 자들의 위선을 하세월 보아 온 민초들은 난감함을 넘어 헛웃음만 칠 따름이다. 그러니 이런 대통령 후보자 부부의 자기 기만적 태도에 고운 시선을 보낼 리가 없다. 민초들이 알고있는 ‘공정과 상식’은 ‘공정과 상식’을 안드로메다로 보낸 자가 부르짖는 선거용 슬로건으로


절대로 사용될 수 없다. 군부 독재시대도 아닌 지금 ‘공정과 상식의 회복’이란 외침도, 간 큰 여자의 허상을 알게 된 민초들에겐 허황되게 들릴 뿐이다.


‘공정과 상식’은 모름지기 건강한 인간 사회라면 당연히 지녀야 할 덕목이지 ‘회복’하자며 영혼없는 목소리로 공허히 부르짖을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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