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대축일(2023.1.8.) : 이사 60,1-6; 에페 3,2-6; 마태 2,3-12
말씀
공현은 성탄의 완성입니다. 세상에 오신 메시아를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드러내는 것이 공현이기 때문입니다. 일찌감치 메시아께서 오실 것을 알아본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해 놓았습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이사 60,1). 두 말할 것도 없이 이 예언은 이스라엘 백성을 두고 전해 준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 땅에 태어나신 메시아를 동방에 살던 박사들이 먼저 알아보았습니다. 이사야의 이 예언을 주변 민족들도 전해 듣고 있었기에 동방에 살던 박사들도 이 빛이 언제 올지 궁금한 나머지 매일 밤마다 하늘의 별들을 관찰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평소에 보이지 않던 큰 별이 나타나자 메시아께서 태어나셨다는 뜻으로 해석하고는 이 별이 비추이는 곳을 향하여 길을 떠나 드디어 베들레헴에 와서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오로는 생전의 예수님을 만나 뵈옵지는 못했어도 자신이 겪은 기적과 구약성경을 통해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사실 믿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이야말로 진리의 빛입니다. 바오로는 뒤늦게 알아본 메시아로부터 직접 영적으로 사도의 직분과 선교사의 소명을 받고 나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서 비추이는 빛을 이방인들에게 비추어주고자 나머지 일생을 바쳤습니다. 이것이 오늘 공현 대축일에 들려오는 말씀의 흐름입니다.
하늘
머나먼 동방에서 별을 보고 메시아이신 아기 예수님께 귀한 예물까지 들고 와서 경배를 했던 박사들은 모든 구도자들과 신앙인들의 예표였습니다. 그들이 살던 고대에는 밤 하늘의 별들의 움직임과 변화를 보고 하늘의 뜻을 읽고자 했고 그 뜻을 통해서 세상을 다스리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들의 천문관측 활동을 점성술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과학이 발달하기 전이었던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문명행위였지만, 중요한 것은 별자리의 움직임이나 변화 현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현상을 통해서 그들이 하느님의 뜻을 읽고자 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점이 천문학과 천체관측술이 발달한 현대인들보다 점성술을 통해 하늘의 뜻을 읽어내고자 했던 고대인들이 영적으로 앞선 면모입니다.
우리 민족도 예로부터 밤하늘을 관측해 왔습니다. 지구상에서 발견되는 7만여 기의 고인돌 가운데 그 절반 이상이 한반도와 만주에 남아 있는데, 이 고인돌 중에는 전남 화순, 전북 고창, 인천 강화도 그리고 청주에는 그 당시 관측된 별자리들을 정교하게 새겨 놓은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천문관측 행위는 단군시대의 기록에도 남아 있습니다. 서기전 1733년 7월 13일 초저녁에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 한 줄로 모인 것이 관측되었습니다. 이를 ‘오성취루(五星聚婁)’ 현상이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주의 별들의 운행 질서는 매우 규칙적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과거 어느 시점의 천문현상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박성범,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같은 오성취루 현상이 2022년 6월 26일 새벽 동틀 무렵에도 나타났었습니다.
그러니까 3천 7백여 년 만에 다시 반복될 만큼 오성취루는 아주 드문 천문현상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질량이 다르고 태양으로부터의 거리도 달라서 자전과 공전 주기가 제각각인 별들이 지구에서 관측하는 우리 눈에 일렬로 늘어선 것처럼 모이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천동설을 진리로 믿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에는 특이한 천문현상이 나타나면 대개 전쟁이나 큰 변란 등 무언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 징조로 보았던 것이 고대 점성술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동방박사들은 이사야의 예언을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메시아가 태어나실 징조로 보았습니다. 사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인류에게 보내시기로 한 메시아를 얼마든지 그 시점에 맞추어서 보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사람들이 하늘의 뜻을 읽은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알아보려는 점성술 관습을 이용해서 메시아를 보내신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요셉과 마리아가 정혼한 직후 시점을 택해서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신 하느님이시라면, 인간의 생각과 형편을 고려하면서도 이를 넘어서 자유자재로 당신의 뜻을 계시하는 것은 너무도 쉽고 또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 민족에게 하늘은 오랜 옛날부터 경외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만사를 주관하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절대적인 존재를 하늘로 떠받들었고, 그냥 ‘하늘’로 부를 수가 없어서 경칭 조사인 ‘님’을 붙인 것이 하늘님, 즉 하느님이라는 이름입니다.
그러다가 유학을 종교로까지 떠받들게 된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송나라의 주자가 달아놓은 주석 이외에는 모조리 금지시켰는데, 만일 이를 어기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각오해야 했습니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문자가 ‘하늘 천(天)자’였습니다. 중국 송나라 유학자인 주자는 이를 ‘자연의 하늘’과 ‘마음의 하늘’로만 해석해 놓고 ‘하느님’으로는 해석하지 못하게 막았는데, 공자 이상으로 주자의 학문을 떠받들었던 조선 시대에는 감히 다른 해석을 하지 못하던 지적 풍토가 지배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6세기에 서양에서 온 이태리 선교사 마테오리치가 ‘하늘 천(天)’자를 초월적인 하늘 즉 인격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신로서의 하느님으로 해석해 놓은 ‘천주실의’ 서적이 조선의 이벽에게 들어와서는 마치 4천 년 이상 오랜 세월 동안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던 하느님 신앙이 봇물 터지듯이 분출되는 바람에 천주교 운동이 하나의 거대한 민중 운동처럼 일어났기에 총력을 다해 박해하던 조선 왕조가 스러질 지경에 이르렀고, 실제로도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겼습니다.
별
천동설이 아니라 지동설을 과학적 진리로 알게 된 오늘날에도 하늘에 떠 있는 별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별은 태양과 같은 항성의 빛을 반사해서 비추어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알고 있었던 동방박사들도 별을 관찰하다가 메시아 탄생을 알리는 큰 별을 보고 그 별이 비추이는 곳으로 가서 메시아를 경배했듯이, 이벽을 비롯한 한국 초대교회 선각자들, 이들을 이은 두 사제 김대건과 최양업, 그리고 이들을 배출한 박해시대 교우촌의 무명 교우들 모두가 조선의 어둠을 비추어 줄 빛을 찾다가 드디어 천주교 교리에서 빛을 찾았고, 그 빛이 알려준 메싱께 기꺼이 자신들의 삶을 예물로 바쳐서 조선의 백성을 비추는 별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오늘날에도 사람들에게 경배드려야 할 메시아를 알려주는 동방박사들입니다. 그래서 늘 하늘을 쳐다보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하고, 큰 별이 나타나면 그 별이 가리키는 대로 길을 떠나야 하며, 그 별이 멈추는 곳에서 가진 것 중에 가장 귄한 것을 예물을 바쳐야 하는 네 번째 동방박사입니다.
헨리 반 다이크가 쓴 소설 ‘네 번째 동방박사(The Four Wiseman, 1895)’은 오늘날 교회와 신앙인들이 주님의 공현을 묵상하면서 지녀야 할 자세를 일깨워준 책입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아르타반은 가진 재산을 다 팔아서 마련한 보석 세 개를 가지고 메시아를 경배하러 떠났지만, 번번이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만나서 그 보석을 다 주어 버리고 빈털터리가 된 채로, 그것도 죽기 직전에 영으로 메시아를 만나 뵙게 됩니다.
그래서 예물 없이 경배하기가 죄송했던 아르타반에게 메시아께서는 이미 그 예물을 다 받았노라고 안심 시키시면서 아르타반을 천국에로 이끌어주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리하여 네 번째 동방박사였던 그도 역시 믿는 이들의 상상력 안에서 생겨난 또 하나의 별이 되었습니다.
빛
이미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당시에 또 하나의 네 번째 동방박사로서 살아갔던 사도 바오로는 오늘 제2독서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계시를 통하여 알게 된 신비는 과거의 모든 세대에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성령을 통하여 그분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계시되었습니다.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에페 3,6).
우리들에게는 당연하게 들릴 수도 있는 역사적 진실이지만,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의식으로 대단한 자부심을 지니고 살던 바오로 사도로서는 천 년 이상 간직해 오던 그 고유한 선민의식을 용도폐기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가 이스라엘 백성을 ‘예루살렘’이라 부르며 전해주었던 공현의 예언은 우리 민족을 포함한 모든 민족에게로 활짝 열린 셈이 되었습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희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동방 박사들이 그 옛날 큰 별이 나타난 현상을 보고 메시아를 경배하러 찾아왔던 구도자들이었듯이, 아시아의 동방에서 반만년 전부터 살아온 우리 민족도 아주 오랜 옛날부터 낮에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며 밤에는 별들을 관측하여 하늘의 뜻을 알아보는 전통을 간직한 구도자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메시아를 찾아 경배한 동방박사들은 그들의 삶의 발자취로 인하여 후대의 구도자들에게 또 다른 별이 되었고, 진리와 평화로써 하느님께로부터 빛을 계시받은 우리 민족의 선조들도 후손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는 별들이었습니다. 특히 이벽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운 정약종은 순 한글로 쓴 ‘주교요지’를 남김으로써 박해시대 교우촌에 살던 신자들이 백년 박해를 견디어 내도록 받쳐준 든든한 버팀목이었습니다.
말씀의 빛
그러니 교우 여러분! 이사야의 예언대로 우리도 일어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바오로의 사도적 권고에 따라서 우리도 메시아의 빛을 받고 있는 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평화의 빛은 우리 한국 초대교회의 선각자들이 반사해 줌으로써 더욱 뚜렷하게 말씀의 빛으로 전해졌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보여준 모범대로, 진리와 평화의 가치를 담은 이 말씀의 빛을 이제는 온 겨레 앞에 드러내어야 하며,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 빛을 받아서 하느님께로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공현 대축일의 메시지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