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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
  • 이기우
  • 등록 2023-02-17 12:58:31
  • 수정 2023-03-02 14:4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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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6주간 토요일(2023.2.18.) : 히브 11,1-7; 마르 9,2-13


오늘 독서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동안 2주간에 걸쳐 창세기 독서에 나온 줄거리를 회상하면서 믿음에 초점을 맞추어 상기시켜주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장차 부활하신 후 거룩하게 변화되실 모습을 세 제자에게 보여주시며 하느님 나라의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미사의 말씀은 믿는 이들의 기억력과 상상력이 주제입니다.


먼저 히브리서의 저자가 믿는 이들의 기억력을 창세기를 근거로 해서 상기시켜 준 바를 살펴보자면 이러합니다. 아벨은 카인의 동생이었고 양치기였는데, 농부였던 형 카인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는 인류의 의식이 진화해서 도구를 만들게 되고 농업과 목축업 등 여러 직업을 발달시켰으며 인구도 늘어나기 시작한 신석기 시대부터 인류 안에서 씨족들 사이에서나 부족들 사이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전쟁을 상징하는 진술입니다. 하느님께서 양치는 일을 농사짓는 일보다 더 좋아하셔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 다른 씨족, 다른 부족을 질시하는 악을 멀리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하느님을 닮으라고 창조된 존재가 하느님처럼 되어 보고자 했던 원죄, 선과 악의 질서를 따라서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해야 했지만 자기 마음대로 선과 악을 행하고 싶어 했던 그 원죄에 물든 본성 때문에 생겨난 인류 최초의 죄악의 희생자, 그가 아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벨들은 오늘날까지 끊이지 않고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바로 패권을 추구하는 강대국들의 그 사악한 야심과, 나라 안에서도 갑질을 일삼는 그 못된 버릇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에녹은 두 사람입니다. 첫 에녹은 카인이 낳은 아들이었고(창세 4,17), 히브리서의 저자가 언급하는 두 번째 에녹은 카인의 동생으로 태어난 셋의 6대손입니다(창세 5,18). 그에 대해 창세기의 저자는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창세 5,24). 즉, 에녹은 인류의 첫 조상들 가운데에서도 드물게 “하느님과 함께 살던” 의인이어서 땅에 묻히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을 만큼 훌륭한 생애를 살았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 에녹과 엘리야만 승천의 은총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는 앞선 모든 선조들에 비해서도 의롭고 흠이 없이 살던 사람이어서 하느님께서 새로운 세상을 구할 사람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아벨에서부터 에녹과 노아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훌륭한 조상들이 의로운 삶으로써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까닭은 믿음 덕분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돋보였던 인물은 단연 노아였습니다. 그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관하여 지시를 받고, 경건한 마음으로 방주를 마련하여 자기 집안 식구들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상의 시조가 되었으니 온 세상을 구한 셈이었습니다. 이상이 히브리서의 저자가 자신의 기억력으로 상기시켜준 믿음의 족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공생활은 노아가 시작한 새로운 세상의 완결판이었습니다만, 군중은 물론 제자들까지도 그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기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시고 타볼산에 올라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얼굴과 모세와 엘리야까지 소환하시어 대화를 나누시는 모습을 현장감 있게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믿음의 눈으로 본 현실로서 세 제자에게만 특별히 보여주신 또 하나의 기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 앞에서나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모든 가르침에는 성서적 배경이 깔려 있었고, 그분은 마치 모세나 엘리야와 대화하듯이 성서의 인물들이 남긴 말씀이나 행적으로 자유자재로 대화의 소재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산상설교에서 모세의 십계명을 새로 가르치실 때에는 모세의 진심과 한계를 다 아시는 듯 가르치셨고, 세례자 요한을 두고서는 재림한 엘리야로 여기셨습니다.


이렇게 평소에 영적으로 대화하던 두 인물을 세 제자의 눈 앞으로 불러내어 보여주신 뜻은 당신께서 하시던 복음선포 활동의 영적 차원을 살짝 보여주시는 한편, 장차 그들도 사도가 되어 겪을 미래를 상상해 보도록 자극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제자들은 이러한 영적 현실에 관한 한 눈뜬 소경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와 비슷한 처지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예수님께서 타볼산의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신 이 기적은 우리를 위한 기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눈을 뜨면 영적인 기억력과 상상력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부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러합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즉 모든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마태 22,29-32).


부활에 관한 상상력이 전혀 없던 사두가이들의 무지막지한 질문에 답하신 예수님의 말씀이었는데, 이 말씀의 뜻인즉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에 의한 기억력과 상상력으로 그렇습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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