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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초대교회, 풍수원 성당과 정규하 신부
  • 이기우
  • 등록 2023-04-28 15: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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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수원 성당(사진출처=한국저작권위원회 / 유주영)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2023.4.29.) : 사도 9,31-42; 요한 6,60-69 

 

오늘 독서인 사도행전 9장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진 초대교회가,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생명을 주시는 말씀을 중심으로 흩어지지 않고 리따에서 애네아스라는 병자를 고쳐 주며 심지어 야포에서 죽은 타비타를 살리는 기적도 일으키면서, 이스라엘 곳곳에서 초대교회를 개척했던 것인데, 이는 말씀은 영으로서 생명을 준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행한 결과였습니다. 


이 땅에서도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 이후 세 번째로 서품된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강원도 풍수원에서 베드로에 못지않은 활약으로 일제 치하라는 엄혹한 환경과 독립운동을 금지했던 외국인 선교사 교구장 밑에서도 힘차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풍수원은 경기도에 인접한 강원도 초입의 산골짜기로서 일찍이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을 때 신태보 베드로가 박해를 피하여 그 이전의 박해에서 살아남은 교우들을 이끌고 일구었던 교우촌이었습니다. 신유박해 당시에 많은 양반 교우들이 떠나갔지만 복음에 매료된 신태보 베드로는 박해에서 살아남은 치명자들의 가족을 찾아 복음과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가 그들과 함께 용인에 살던 40여 명의 치명자 가족들을 이끌고 강원도 풍수원으로 이주하였으니, 이것이 한국 최초의 교우촌이 되었습니다. 


신태보는 치명자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한편 교리서를 100여 권이나 필사하여 나누어주면서 복음 진리와 그리스도 신앙을 이어가도록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이후 1896년 강도영 마르코, 강성삼 라우렌시오와 함께 조선 천주교회의 세 번째 사제로 서품된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부임할 때까지 80여 년 동안 성직자 없이 평신도들만의 교우촌이 풍수원에 생겨났습니다.


정규하(1863~1943)는 충청도 아산의 남방제 마을 동래 정씨 친척들로 이루어진 교우촌 출신이었고, 용산 성심신학교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제로 서품되어 풍수원 성당 주임신부로 발령을 받았는데, 본당신부가 된 첫 한국인 사제였습니다. 


당시 일본 낭인들에 의해 민비가 시해되자 이에 덜컥 겁이 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 사건으로 인해 일제에 항거하고자 하는 의병 조직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어수선한 정국에서, 정규하는 일본군에 쫓겨 풍수원 성당에로 피신한 의병들을 피신시켜 준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복음의 빛과 식민지 백성의 염원을 따라서 그가 발휘한 놀라운 복음선포 활동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후 이 의병들과 본당 신자들을 더 모아서 정규하는 성당의 사랑방에서 삼위학당(三位學堂)을 설립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멀리 논산에서부터 초빙해온 교사 박 토마를 통해 한글과 수학 등 신학문과 역사 과목 그리고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는 등 본격적으로 활약하였습니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에는 이 삼위학당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강원도에서는 처음으로 횡성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이 삼위학당은 해방 후 광동초등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98년에 이르러 학생 수가 부족해지자 폐교되기까지 유지되었으니, 그 역사가 근 백년에 이릅니다.


당시 풍수원 본당이 관할하던 구역은 화천과 인제, 양구, 홍천 등 강원도 전역과 경기도 일부를 포함하여 12개 군에 걸쳐 29개 공소였고 신자 수는 2,000여 명에 달했는데, 천진암 강학회와 이승훈의 영세 이후 세례 받은 권일신에 의해 조선 최초로 형성된 교우촌이 세워진 양평까지 관할하였습니다. 


초대 주임이었던 프랑스 선교사 르메르 신부가 초가집 12칸으로 쓰고 있었던 성당을 증축하고자 정규하는 서울의 명동 성당을 본떠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1910년에 성당을 건립하였으니 강원도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세워진 풍수원 성당을 모(母) 본당으로 하여 강원도 각지로 본당이 분가되어 나갔습니다. 


정규하 신부는 강원도 각지에 본당을 분할하면서도 풍수원 본당 사목 활동으로서 여성 신자들을 모아 기도와 교리 공부와 어려운 이웃을 도와 봉사하는 모임인 ‘성부안나회(聖婦安那會)’를 설립했는데 이들 중에는 수녀가 되고 싶어 하는 신자들도 있어 이들이 그 모임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죽은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선종 봉사 모임인 ‘연령회(煉靈會)’와 고아들을 돌보는 ‘성영회(聖嬰會)’도 조직하였으며, 사제성소 계발에 진력하여 재임 중 6명의 사제를 배출하였고, 성체성혈대축일에 성체현양대회를 실시하는 등 강원도 전 지역과 경기, 충청 지역에 이르기까지 본당 사목의 전형이 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춘천과 원주 교구 합동으로 해마다 풍수원 성당에 모두 모여 1920년에 시작되었던 성체거동행사를 지금까지 백년째 이어오고 있습니다.


번듯한 성당이 세워진 다음에는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던 신자들이 많이 찾아왔는데, 침술에 조예가 깊었던 정규하 신부는 이들 중에 병을 앓고 있던 이들을 치료를 해 주었고 이에 대한 소문이 나자 경상도 지방에서도 난치병으로 고생하던 환자들까지 찾아와 치료를 받기도 하였으니, 풍수원에서 사목한 기간만 해도 47년입니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1세대 사제를 대표하는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신부의 이런 괄목할 만한 사목활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와 프랑스 선교사 출신 주교의 정교분리 노선으로 인하여 정치적으로 암울하던 시기에서 민족 주체성을 고취하기 위하여 긴장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특히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박해는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해도 유학을 유교로 신봉하던 지방 유지들은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천주교를 바라보는 가운데 매년 석달 동안은 강원도 전 지역과 경기도 및 충청도 일부를 포함하는 관할 지역 내 모든 공소를 순방하며 신자들이 성사를 배령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특히 삼일 독립만세운동과 관련해서는 이를 노골적으로 거부하던 이방인 출신 주교와 이를 어떡해서든 참여하려던 방인 사제 및 신학생들 사이의 중재역을 맡기도 하는 귀감(龜鑑)을 보였습니다. 


정규하 신부는 나라 안팎과 교회 내외부의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님의 살과 피로 이루어진 말씀 안에서 살아가면서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를 세우고자 했던 사목자인 동시에, 교회 정신에 충실하면서도 하느님 사랑과 겨레 사랑이 하나임을 보여준 선교사라 하겠습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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