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간 금요일(2023.7.14.) : 창세 46,1-30; 마태 10,16-23
개인의 인생이나 민족의 운명을 결정짓는 변수는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입니다. 섭리 안에서 자유를 어떻게 행사하느냐에 따라 인생과 운명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성경에 나와 있는 수많은 개인들과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나 우리 교회와 한민족의 운명을 내다보는 데 있어서 하나의 참고사례이면서 중요한 반면교사가 되어 줍니다.
성경의 첫 권인 창세기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하느님의 집안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자라나게 한 인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심으로써, 장차 하느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이 겪게 될 운명을 미리 겪게 하시고 또 보여주셨습니다.
서열로 인한 갈등과 경쟁 구도가 야곱 개인의 인생과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을 닮은 꼴로 만들었습니다. 즉, 그는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서열상 장자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먼저 생긴 문명들 즉 수메르 문명과 그 영향을 받아 생겨난 이집트 문명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를 써야 했는데, 이 두 문명은 노아의 둘째 아들인 함의 후손들이 세운 것이고,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인 아브라함은 노아의 셋째 아들인 셈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둘째로 태어났으면서도 장자로 대우받고 싶어서 형과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 축복을 따냈습니다. 이러한 집념 때문에 야곱은 하느님의 축복을 차지하기는 하지만 그 과정이 대단히 고달프고 피곤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앞선 문명들의 틈바구니에서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에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우상숭배에 물든 그들로부터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뒤지기 싫어서 양다리를 걸쳤습니다. 이 양다리 걸치는 습성 탓으로 이집트에서 첫 번째 노예살이를 해야 했고, 바빌론에서 두 번째 포로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야곱은 열두 아들을 두었지만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을 가장 아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그가 사랑하던 라헬이 낳아준 첫째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편애가 나머지 형제들에게 시기심을 불러일으켜서 요셉은 죄도 없이 이집트로 팔려가게 되었는데, 요셉의 타고난 믿음과 성실성으로 집안 전체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두 번이나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이스라엘 민족은 기구하게도 팔레스티나를 침공한 로마제국에 의해 이제는 자기네 땅에서 세 번째 종살이를 하게 되었지만, 요셉의 믿음을 물려받은 예언자들과 아나빔들의 믿음과 기도 덕분에 구세주를 통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즉, 야곱이 넷째 아들인 유다의 지파에게 내려준 하느님의 축복(창세 49,8-10), 또한 이 유다 지파에 속한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구세주를 보내시리라는 약속(2사무 7,16), 그리고 다윗의 고을인 베들레헴에서 그 구세주께서 탄생하시리라는 예언(미카 5,1)의 말씀을 굳게 믿은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주류이자 다수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는 바람에 야곱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이를 닮은 듯 파란만장했던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이 맺었던 매듭은 풀려버리고, 이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인생이 새 이스라엘로서의 그리스도 교회의 운명과 이에 속한 모든 신앙인들의 인생을 좌우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와 개별 신자들이 예수님의 공생활에 나타난 섭리를 얼마나 의식하고 닮을 수 있느냐에 자신의 운명과 인생이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열두 사도를 파견하셨고, 사도들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교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전한 복음은 한참 후에 지구를 반바퀴 돌아서 한민족에게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백년의 박해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이 땅에 세워진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서 우리 역시 한민족의 일원이요 가톨릭교회의 한 지체로서, 주변 민족들은 물론 그리스도교의 다른 교파들과 불교 및 민족종교들과도 경쟁구도 속에 놓여 있으며, 민족종교들과 불교에 비해서는 후발주자요 다른 그리스도교 교파들에 비해서는 선두주자입니다만, 진리를 향한 복음화의 여정에서 서열이나 정통성은 인간적인 관습일 뿐입니다.
교우 여러분!
따라서 오직 하느님과 우상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지 않고 하느님께 충실한 선택만이 중요하며 하느님의 문명을 이룩하기 위하여 슬기롭고 순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선택을 내릴 우리의 자유의지를 슬기롭고 순박하게 행사하도록 이끄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을 통해 이루어질 하느님의 섭리를 알아보고 그 섭리 안에서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행사하느냐에 따라서 개별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은 물론 우리 교회와 한민족의 운명도 달라질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네 개별 신앙인들의 인생과 우리 교회와 한민족의 운명을 이끄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예수님께서 보내실 성령과 통공하는 데에 우리의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일입니다(마태 10,19-20).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