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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사는 훈련을 하라
  • 이기우
  • 등록 2024-05-17 17: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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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강림 대축일(2024.5.19.) : 사도 2,1-11; 1코린 12,3-13; 요한 20,19-23


전례에 담긴 뜻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세례성사와 견진성사 때에 우리가 성령을 받았음을 상기시켜주면서, 이미 받은 성령의 그 은총을 갱신하는 데 오늘 전례의 뜻이 있습니다. 지난 부활 시기 동안 선포된 미사의 말씀은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면서 우리도 부활하기 위한 두 가지 조건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첫째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기지은을 발휘하신 발현기록은 우리도 부활하여 영적인 몸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이요, 둘째는 예수님의 공생활과 사도들의 복음선포 보도를 통해서 우리도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사명과 목표였습니다. 사실 사기지은을 입은 삶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활동을 하는 것이 부활의 자유인데, 이는 신앙이 인간에게 부여할 수 있는 최대의 특권이요 인간 존엄성의 백미입니다. 우리는 새 인류로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사랑의 문명을 이룩하라는 복음을 온 세상에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무릇 모든 교회 전례는 말씀으로 변화될 현실을 미리 앞당겨 누리는 선취(先取)의 성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령 강림 대축일의 전례도 장차 우리가 이룩해야 할.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의 현실, 즉 ‘사랑의 문명’(간추린 사회교리, 결론)이을 향하여 나아가라는 하느님의 계획을 앞당겨서 지금 여기서 미리 맛보게 해 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기지은(四奇之恩)


우리가 부활의 자유를 누리자면 먼저 필요한 조건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계시 진리로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영적인 몸으로 보여주신 사기지은의 복음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여 복음을 선포하려는 지향으로 살아가면, 우리도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이 발휘했던 사기지은을 살아서는 공동체적인 단위로 얼마든지 발휘할 수 있으며, 죽어서는 통공의 신비로 세상에 남은 이들이 발휘할 사기지은을 도울 수 있게 됩니다.  


사기지은의 첫 번째가 ‘상치 못함’의 은총이었습니다. 이는 마귀와 세속의 힘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마음이나 선을 행하려는 의지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은총을 뜻합니다. 체포당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신 것이나, 숨이 끊어지는 모진 고통을 겪으며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당신의 영을 맡기는 기도를 하신 것이 바로 이 은총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상치 못함’의 은총은 육신과 본성과 현세의 그 모든 한계를 돌파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손과 발에 못박힌 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 자국을 지니신 몸으로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발현 사건은 이 은총이 눈에 보이게 드러난 가시적 결과였으며, 영적인 몸이 지니는 육체성과 자유로움을 보여주었습니다.


사기지은의 두 번째는 ‘빛남’의 은총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내적 품위가 삶에서 드러나는 것으로서, 타볼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바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려는 믿음이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려는 삶에서는 이 은총이 영적으로 나타납니다. ‘빛남’의 은총은 죄의 어두움을 사라지게 하는 동시에 진리의 힘을 빛처럼 비춥니다. 모든 선행과 지식과 영성이 겨냥하는 목표입니다.  


공생활 내내 믿음이 굼뜨고 비겁하기까지 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적인 몸을 체험한 발현 사건 이후에는 이 ‘빛남’의 은총을 입어서 담대한 믿음과 선명한 깨달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쳐 헌신하거나 또는 하나뿐인 귀한 목숨까지도 바치는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기지은의 세 번째는 ‘빠름’의 은총입니다. 이는 믿음이 부족하거나 위기에 처한 이들을 돕고자 할 때 우리가 처한 공간의 제약이나 상황의 한계를 돌파하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은총입니다. 위험에 빠진 제자들을 돕고자 물 위를 걸어오셨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바도 이 은총이며, 사도들이 감옥에 갇혔다가 기적이 일어나서 풀려날 수 있었던 일들도 이 은총입니다. 우리가 속한 신자들의 공동체 역시 선을 행하고자 할 때 갖가지 현실적 제약과 한계를 돌파하는 체험을 겪게 되는 은총입니다. 


유일한 조건이란, 단 둘이나 셋이라도 신자들의 공동체가 마음을 합쳐서 예수의 이름으로 같은 목표를 공유하게 되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하느님께서 그 공동체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공동체가 같은 뜻을 공유하는 일이 사실상 어렵기도 하지만 어려운 만큼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결국 ‘빠름’의 은총은 공동체의 공동선에 대한 깨달음이 무딘 탓으로 함부로 자기 주장을 내세우며 따라서 실천에도 더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공동체의 뜻에 순명하게 해 주는 겸손과 날카로운 깨달음 그리고 민첩한 애덕의 행동으로 이끌어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공생활 동안에는 수난과 부활의 그 중대한 예고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누가 더 높은지를 가리려던 서열 다툼에 몰두했었지만, 성령을 받은 다음에는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일치하여 신자들 앞에서 놀라운 표징들을 일으킴으로써 초대교회의 신자들 역시 주변의 세상 사람들이 존경해 마지 않을 정도로 고상한 도덕과 가난한 이들을 감싸 안는 공동생활을 이룩하였고, 여기서 발산된 이 놀라운 사회적 매력이 엄청난 선교적 성과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사기지은의 네 번째는 ‘사무침’의 은총입니다. 잡혀갈까봐 두려워서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여서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문을 열지도 않고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듯이, 이 은총은 흔히 개별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이기심에 따라 마치 격자처럼 스스로 갇혀 있게 마련인 상황에서 서로가 힘을 합치게 하는 은총입니다. ‘사무침’의 은총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기주의의 격자(格子)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연대와 통공으로 해방되는 부활의 자유를 확인시켜 줍니다. 제자들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과 그분이 보내주신 성령을 받고 나서는 시공의 제약에 갇혀 있지 않고 세상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러 나설 수 있었습니다.


복음사가 루카가 사도행전까지 기록하면서 베드로로 대표되는 선교 활동을 전해 주고자 했던 바가 바로 이것, 즉 사도들로 변화된 제자들의 ‘사무침’의 은총 발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한 주류 제자단에 속해 있지도 못했던 사도 바오로 역시 성령을 받아서는, 박해자로서 저지른 죄과를 보속하기라도 하듯이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루카가 베드로를 열두 사도의 대표 명사로서 선교 활동을 소개하면서 이와 균형을 맞추기라도 하듯이 바오로의 선교 활동을 소개하려던 취지가 이것입니다. 즉, 첫째 유다인 회당과 이방인들을 찾아가고, 둘째 천막 만드는 고된 노동으로 모범을 보이며, 셋째 세례만 베풀기보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공동체를 이루는 삶을 이루도록 감화시키고, 넷째 무엇보다도 자신의 선교 활동에 함께 하는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이룩하여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로마제국 강역 전체에 퍼져 나가도록 선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성령칠은(聖靈七恩)


이렇듯 사기지은이 부활의 자유를 누리도록 삶으로 나타나는 부활의 은총이라면, 성령칠은은 우리의 활동이 복음선포적인 차원을 지향하도록 주어지는 부활의 은총입니다. 견진성사를 받고도 자기 혼자서만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에게는 감추어져 있기 마련이지만, 복음을 선포하려는 지향으로 우리가 활동할 때 반드시 받기 마련인 성령칠은은, 우리의 이성을 예지로 이끌어주는 슬기, 통달, 지식, 의견과, 우리의 의지를 신앙으로 이끌어주는 굳셈, 효경, 경외심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공생활 중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나 군중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청하신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그 믿음을 확인하시는 경우에 매우 기뻐하시며 성령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무릇 믿음이란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생명까지도 거저 허락하신 하느님께 대한 슬기인 만큼, 세상과 인생에 대한 설계자이신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생도 심판하시고 완성하실 분이심을 깨닫는 은사가 슬기의 은사입니다.  


슬기의 은사가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은사라면, 통달의 은사는 피조물에 대한 은사입니다. 하느님께서 지어내신 세상과 인생의 이치는 실로 오묘합니다. 모든 피조물에는 하느님의 창조 경륜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해 경탄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버린 결과로 인류의 문명은 지금까지 자연의 매카니즘을 모방하고자 노력해 왔으면서도 자연을 파괴하고 훼손시키는 데 힘을 헛되이 낭비해 왔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자연을 하느님께서 조성하신 설계대로 보존하는 데 힘을 쓰는 한편, 하느님께서 가장 귀하게 창조하신 피조물인 인간의 신비를 탐구하여 하느님을 닮도록 문명의 수준이 향상되어야 합니다. 자연과 인간 속에 숨어있는 하느님의 섭리를 드러내야 하고, 이를 위한 은사가 바로 이 통달의 은사인 것입니다.


슬기와 통달의 은사로써 우리의 지성이 도달하게 된 앎이 사람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대로 실현되도록 이끌어주는 영적인 힘이 지식의 은사입니다. 이 은사가 좁게는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믿을 수 있는 사람과 믿어서는 안 될 사람을 식별하는 힘으로 나타납니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는 한결같은 정성을 들여야 마땅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스쳐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지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쓸데없이 엮여서 시간과 노력과 정력을 낭비하게 되고 나중에는 필시 후회하게 됩니다. 인생의 연륜이 쌓일수록 이 힘, 즉 ‘사람 보는 눈’이 생겨나는데, 이것이 바로 좁은 의미로 말하는 지식의 은사입니다.


그리고 넓게는 여러 분야의 학문들을 통해 얻은 지식들을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서 선하게 활용하게 해 주는 영적인 힘으로 나타납니다. 이 힘은 그저 인생의 연륜이 쌓인다고 해서 생겨날 수 없고 지력(知力)이 다하는 순간까지 지난 시대의 선인(先人)들이 사색하고 연구하며 검증해 놓은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려는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즉, 인간의 현실을 탐구하는 인문학이나 사회의 현실을 탐구하는 사회과학, 인간의 정서와 희망을 표현하는 예술, 세상의 질서를 탐구하는 자연과학, 생명의 신비를 다루는 의학과 생물학 등에서 이룩한 지적 성취를 통해서 결국 사람들의 선한 노력으로 문명을 복음화시키는 지혜와 영적인 힘으로 나아갑니다. 진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세상에 빛을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사람이 아니라 일을 통해서, 슬기와 통달의 은사로 우리의 지성이 도달하게 된 앎이 하느님의 뜻대로 실현되도록 이끌어주는 영적인 힘이 의견의 은사입니다. 이 은사도 좁게는 어떤 일이 옳은 일이고 그른 일인지를 식별하게 해 주지만, 넓게는 옳은 일이라 하더라도  지혜롭게 해 낼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의미합니다. 이 은사는 살아가면서 무수한 선택을 해야 하는 우리에게 선의 영향력에 따라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줌으로써 양심의 능력을 이성의 능력과 결합시켜 줍니다. 보통 이 힘을 일컬어, ‘일 머리’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용기의 은사라고도 부르는 굳셈의 은사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저지르게 하는 마귀의 유혹이 닥쳐올 때나 올바른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부딪치는 역경을 이겨낼 수 있도록 우리의 의지를 이끌어 주는 영적인 힘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이른바 죄의 뿌리인 칠죄종에 대적해서 겸손, 관용, 정절, 은혜, 절제, 근면 등의 칠극(七克), 즉 칠죄종을 극복하게 해 주는 일곱 가지 덕행을 수양함으로써 마귀의 유혹을 극복하게 해 주는 은사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시므로 사람은 모름지기 하느님께 대해서 자녀다운 효성으로 대해야 한다고 우리의 의지를 일깨워주는 영적인 힘이 효경의 은사입니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사람들 모두가 하느님 아버지께 대해서 자녀이므로 사람들끼리는 형제요 자매라는 인도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자각이 따라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피부색, 인종, 출신 고향이나 학교, 성별, 재산, 지식, 사회적 지위 등 그 모든 조건을 초월하는 인간의 형제애와 박애주의에 입각한 연대의식이 이 은사에서 비로소 열매를 맺게 됩니다.  


가톨릭 사회교리에서는 이를 두고 ‘전인적이고 보편적인 인도주의’라고 가르칩니다. 사회교리를 집대성해 놓은 ‘간추린 사회교리’의 서론이 이것입니다. 즉, 육신의 문제인 경제적 현실만이 아니라 정신적이고도 문화적인 현실도 균형있게 다루어야 하고, 또 가진 자들이나 배운 자들 또 기득권의 혜택을 누리는 자들만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가지지 못한 이들이나 배움이 짧은 이들 또 소외된 이들 등 사회적 약자들까지도 고르게 사회적 공동선의 혜택을 주어지도록 해야만 ‘전인적이고 보편적인 인도주의’가 구현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모든 은사를 다 받아서 우리의 이성과 의지가 향상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파악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하느님의 뜻은 피조물인 인간의 지력과 의지를 훨씬 넘어서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노력을 다 하고 나서도 하느님의 뜻에 대해 경외심을 지니고 기다리는 여유와 겸손이 필요한데, 이것이 경외심의 은사입니다.  


네 가지 은총, 일곱 가지 은사


이처럼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과 은사가 어마어마한데, 우리가 실제로 이를 체험하자면 성령의 이끄심에 따르는 생활이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신앙과 신뢰와 신용으로 온전한 믿음을 살아가는 인간관계와 공동체를 이루면 사기지은을 받아 부활의 은총을 공동체 단위에서 누릴 수 있고, 이 은총은 개별적으로도 일곱 가지 은사로 나타날 수 있으니 복음선포를 위한 무기가 됩니다. 


우리는 이미 성사와 전례에서 성령을 받은 존재들이니, 실제 생활과 활동에서 사기지은으로 부활의 은총을 체험하기를 원하시면, 그리고 일곱 가지 성령의 은사를 받았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싶으시면 이제는 복음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먼저 오늘 성령 강림의 말씀을 들은 자기 자신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사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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