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7주간 토요일(2024.5.25.) : 야고 5,13-20; 마르 10,13-16
부활 시기를 보내고 다시 맞이한 연중 시기의 제7주간에 우리는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본받아 성령의 이끄심에 믿음을 순명함으로써 세상을 복음화하라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인간 관계의 복음화로부터 시작하여, 경제의 복음화, 성과 가정의 복음화를 거쳐서 오늘은 어린이와 젊은이들의 복음화 과제를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에서 생겨난 속담이 지구촌 전체에 어린이 교육에 대한 진리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 작가 베티 B. 영(Beetie B. Youngs)이 같은 제목으로 책을 내서 우리에게도 알려지게 되었고, 아이를 키우는 이들에게는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속담입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부모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고, 마을 전체에 사는 이웃들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마을 전체의 관심과 도움을 받고 자라난 아프리카 아이들이 서구인들을 일깨워준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아프리카 마을을 한 백인 문화인류학자가 방문해서 생활 습성을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그 마을의 아이들을 불러 모아 간식을 매달아 놓고 나서는 먼저 도착한 아이가 차지한다는 규칙을 알려 준 다음에 게임을 시켜 보았습니다.
그런데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울리자 아이들은 모두 손을 잡고 함께 뛰어가서 간식을 함께 먹었습니다. 황당해 진 그 학자가 물었습니다: “먼저 뛰어가면 다 먹을 수 있는데, 왜 함께 갔니?” 이 물음에 아이들이 “우분투!”라고 외치자, 통역을 통해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보았습니다. 그 뜻은 “다른 친구들이 슬픈데 어떻게 한 명만 행복해질 수 있나요?”였습니다. 아프리카인들은 미개할 것이라던 슬픈 선입견으로 게임을 시켜 본 백인 학자가 아이들이 뛰어난 공동체성을 보고 도리러 자신들의 개인주의적 성향의 미개함을 깨우친 셈입니다.
‘우분투!’
언제나 타인의 존재와 필요와 관심을 의식하고 배려해 온 아프리카 줄루족의 인사말인 이 말에서 가장 많이 통용되는 의미는 “당신이 있으니 제가 있습니다.”입니다. 넬슨 만델라를 비롯한 선각자들은 이 인사말을 사람들 간의 관계와 헌신이라는 윤리적 목표로 승화시켜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건국이념으로 삼았습니다.
유럽 대륙(지표면적의 6.8%)보다 세 배로 더 넓으며 인구도 두 배로 더 많고(유럽 5.5억명, 아프리카 12억명) 역사는 아마도 훨씬 더 오래되었을 그 아프리카(지표면적의 20.2%)를 대항해시대에 유럽인들은 그저 새로운 땅이라고 ‘발견’하고나서 자신들의 관심과 관점에 따라 주인 없는 물건처럼 마구 ‘취급’해 버렸습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유럽 백인들의 오만한 시선이요 행태였습니다. 여기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유럽인들이 이 대륙을 갈기갈기 찢어서 식민통치를 하다가 지도상에다 눈금자를 대고 국경선을 그어 주고 떠나 버린 후, 지금 아프리카에는 불합리하게 그어진 국경선으로 말미암은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가혹한 수탈의 결과로 황폐해 진 땅 때문에 굶주림이 멈추지 않으며 그 사태를 해결해 보고자 유럽으로부터 받은 원조의 원금보다 많은 이자를 수십 년째 갚고 있고, 그 결과 부채는 줄어들지 않고 늘어나기만 합니다. 유럽 교회가 아프리카 대륙에 선교한 활동의 성적표입니다.
낙제 점수를 받은 학생들에게 재시험의 기회를 주듯이, 대희년을 맞아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유럽의 부유한 선진국들에게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들에게 짊어지어 준 외채를 탕감해 주자고 호소 했었지만 돌아온 메아리는 없었습니다. 그 후 20년이 지나서 아프리카에서 대규모 굶주림이 벌어지고 중동 시리아 내전마저 일어나자 대규모 난민이 유럽으로 밀려들어왔을 때에도 현 프란치스코 교황이 난민을 받아들이자고 호소를 하며 바티칸에서 시범을 보였지만 개신교 신자였던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만이 화답을 했을 뿐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축복을 청했습니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내버려 두어라. 하느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르 10,14) 돈과 죄에 대한 가르침, 성과 부부에 관한 가르침에 이어 어린이와 가정에 대한 가르침을 예수님께서 하신 셈입니다.
복음과 짝을 이루는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편지의 결론으로서 신앙으로 공동체를 이루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공동체를 이루면, 고통을 겪는 사람이나 질병을 앓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도와줄 수 있습니다. 즐거운 일이 생기면 함께 찬양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생겨나도 용서를 베풀어 끌어 안을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좋고 나쁜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사람 사는 마을이 공동체가 되면 당연히 살기 좋은 세상이 됩니다. 아이를 가르치는 일은 그 과정에서 자연히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신앙은 마을을 공동체로 만들어줄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우분투의 정신으로 타인을 배려하고 이웃을 존중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신앙으로 이루는 공동체가 사도적 권고의 결론일 수 있는 이유는, 공동체에서는 돈으로 짓는 죄가 원천적으로 봉쇄되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공동체는 협동 방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과 부부의 문제도, 아이들과 가정의 문제도 가정들이 모여 연합하는 마을 공동체에서라면 인격적이고 민주적으로 공동선을 해결해 나갈 수 있기 때문에 한 가닥으로 풀립니다. 공동체가 본디 하느님께서 원하셨던, 그래서 인류가 사랑의 문명을 이룩하려면 지향해야 하는 생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