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밖에 나가셨다가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시오.” 28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29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30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합니다. 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습니다.”
33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35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입니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37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됩니다.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루가복음 5,27-39)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항의한 것은 두 가지다. 예수의 제자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 그리고 단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해서는 안 되며, 단식 의무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스승이 하지 않는 일을 제자들이 단체로 할 리 없다. 제자들에 대한 항의는 곧 스승에 대한 항의다. 제자들의 잘못을 스승이 해명하고 책임지는 일은 예수 당시 관행에 속했다. 제자들에게 불평한 일을 그래서 스승 예수가 답변하고 있다.
직접세 외에도 국경, 항만, 다리, 도시 등에서 사람과 물건에 매기는 각종 세금이 있었다. 세금 공무원 격인 세리는 대개 부자였다. 세금 징수에서 개입되는 부정행위로 인해 그들은 죄인 취급을 받았다. 세리는 복음서에서 부패한 공무원의 대명사가 되었다.
27절 ‘따르시오’는 의미 깊은 단어다. 종교 지도자를 따른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초월성을 존중하는 뜻에서 하느님 따르기라는 말은 신약성서에 없다. 다른 분야에서 따르기와 달리 예수 따르기의 특징은 고통의 길을 따른다는 것이다.
28절에서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예수를 따랐다던 레위가 느닷없이 자기 집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 잔치symposium을 베풀고 있다. 루가의 이야기 구성이 조금 허술하다. 밥 먹는 도중에 다투었는지 식사 후 논쟁하였는지 뚜렷하지 않다. 물론 중요한 문제는 아니겠다.
29절에서 루가가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참석자들을 바리사이들은 ‘세리와 죄인들’이라 언급하였다. 예수와 바리사이 사이의 긴장이 커지고 있다. 예수 뿐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이 죄인들과 같이 식사하고 있다. 제자라는 개념은 초대교회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마태오 28,19-) 가리키기도 하였고 특히 방랑 선교사를(루가 6,13; 9,59-) 지칭하기도 하였다.
30절에서 투덜거림은 예수의 언행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리사이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특징이다.(루가 15,2; 19,7) 먹고 마심은 인간에게 언제나 같이 따라다니는 개념이다.(창세기 26,30; 사무엘하 19,36; 이사야 22,13) 세리라는 직업과 죄인이라는 종교적 개념이 마치 한 쌍의 개념처럼 쓰였다. ‘의사’는 이사야서 3,7과 예레미아 8,22에 언급되었다. 의사에게 의지하는 일은 꾸지람 들었다.(역대기하 16,12)
31절에서 의사와 환자 비유는 그리스 문화에서 널리 퍼진 표현이었다. 예수도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예수는 이스라엘 땅에 살던 그리스인들과 접촉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 문화는 당시 이스라엘에 낯설지 않았다. 예수는 바리사이들이 죄인들을 마치 환자처럼 너그럽게 돌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권유하는 것이다. 죄인을 환자 대하듯 측은하게 보는 사람이 있고, 환자를 죄인처럼 차갑게 보는 사람도 있다. 죄인에 대한 예수의 측은지심이 돋보인다.
레위의 사례에서 회개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회개는 예수를 따르는 전제가 아니고, 예수를 따르면 회개하게 된다는 교훈이다. 예수 따르기란 무엇일까. 예수 따르기를 자처하고 다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를 제대로 따르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적다. 누구나 예수를 따르는 것 같지만, 제대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적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였고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선포하였다.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선포하였고 예루살렘에서 순교를 선포하였다. 제자들은 하느님나라의 복음에 열광했지만, 십자가라는 순교에 주저하였다.
오늘 우리도 제자들과 비슷한 상태에 있지 않을까. 하느님나라 yes, 십자가 no, 복음 yes, 순교 no. 십자가 없이 하느님나라 없다. 순교 없이 복음 없다. 어정쩡한 태도로 예수를 제대로 따르기란 불가능하다. 자기 목숨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 말씀이 생생하다.
단식은 어떤 기간에 특정한 음식을 먹지 않거나(예레미아 35,6-; 다니엘 1,5; 마카베오하 5,27) 정해진 날에 어떤 음식을 삼가는 것이다.(레위기 16,29; 열왕기상 21,27; 이사야 58,1-9) 화해의 날에 정해진 단식을(레위기 16,29-) 제외하면 단식은 유다인에게 의무는 아니었다. 단식은 죄인의 겸손한 모습으로 여겨졌다.(에즈라 8,21; 이사야 58,3-5) 자발적 단식은 공동성서에도 보인다.(시편 34,13; 다니엘 9,3)
루가는 단식과 기도로 구세주를 기다리던 한나를 이미 언급하였다.(루가 2,37)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단식하였다.(루가 7,33) 바리사이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자발적으로 단식하였다.(루가 18,12) 초대 공동체는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하는 관행을 시작하였다. 예수가 살아있을 때 단식하지 않았지만 교회의 시대에는 단식한다는 것이다.
단식과 기도는 예수 그룹보다는 바리사이와 세례자 요한 그룹에게 더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구원의 때를 잔치나 결혼식에 비유되기도 했다.(이사야 25,6; 요한묵시록 19,9) 결혼식은 하느님이 당신 백성과 함께 하는 상징으로 호세아서 102장, 에즈라 20장에서 설명되고 있다. 잔칫날에 참석자들은 단식을 깨트릴 권리 뿐 아니라 단식을 중단할 의무가 있었다. 예수를 신랑으로 비유하기도 했다.(마태 25,1.9; 요한 3,29)
36-39절에서 옷, 포도주, 가죽 세 재료에 새로운kainos과 낡은palaios라는 형용사가 사용되었다. 루가가 대본으로 삼은 마르코 2,21 이하는 낡은 옷이 상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루가는 새 옷이 상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36-38절은 예수로 인해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39절을 적절하게 해석하기는 쉽지 않다. 여기서 예수가 오래된 술과 새 술의 품질을 비교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음주 습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오래된 포도주를 마신 후 새 포도주를 마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마시면 오래된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섞이게 된다. 그러면 각 포도주의 술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없고, 입맛을 버리게 된다. 새 술이 오랜 된 술보다 품질이 반드시 뛰어나다고 볼 수도 없다. 새 술과 오래된 술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예수의 술 마시는 취향이 드러난 흥미로운 구절이다.
예수의 시대는 구원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닌 시대인가. 오늘 단락의 주제다. 예수 시대는 구원이 시작되는 기쁜 시대이다. 그러니 단식할 수 없고 같이 잔치를 벌여야 한다는 것이다. 낡은 옷, 포도주, 가죽 부대를 유다교로, 새 옷, 포도주, 가죽을 그리스도교를 가리키는 비유로 해석하는 것은 오늘 단락의 주제에서 상당히 벗어난 것이다.
오늘 단락을 근거로 가톨릭 미사에서 가톨릭 신자와 개신교 신자가 성체를 같이 모실 수는 없을까. 이 주제에 대해 활발한 신학적 연구와 토론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