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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예수 20
  • 김근수 편집장
  • 등록 2015-08-07 11:20:05
  • 수정 2015-08-20 13:2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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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다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7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8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시오.”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9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합니까?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합니까?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합니까? 죽이는 것이 합당합니까?” 10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으시오.”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11그들은 잔뜩 화가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루가복음 6,6-11)



마르코복음 3,1-6을 대본으로 삼은 이야기다. 위경인 나자렛복음에도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처럼 예수는 가르치기 위해 안식일과 회당을 이용한다.(루가 4,43-44; 5,17; 사도행전 14,1; 17,1-2) 마르코복음에서와 달리 루가는 6절에서 환자의 오른손이 마비된 사실을 추가하여 환자의 고통을 더 드러냈다.


날 때부터 또는 관절염 탓에 손이 마비된 사람을 안식일에 치유해도 되느냐를 다루는 이야기다. 바리사이에게 안식일에 병자 치유는 낯선 말이다. 그러나 쿰란 공동체와 후대 유다교에서 안식일에 병자 치유는 허용되었다. 후대 유다교는 그리스도교의 실행에 대한 반응으로 안식일에도 병자 차유를 허용한 것 같다.


마비된 사람은 이미 죽음의 영역에 속한 사람으로 여겨졌고, 마비의 치유는 죽음에서 구원으로 이해되었다.(시편 86,13) 오늘 단락에서 아무도 예수에게 환자의 치유를 부탁하지 않았다. 환자 자신도 치유를 간청하지는 않았다. 예수가 자발적으로 고쳐주는 이야기다. 유다교에서도 목숨이 위급한 경우에는 안식일 규정을 여기고 도움을 주는 일이 허용되었다.


유다인들에게 병은 그저 환자 개인에 해당되는 일은 아니었다. 하느님께 뽑히고 사랑받는 백성은 모두 건강한 백성이라야 한다. 병은 죄와 관계있다고 유다인들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건강한 백성에게 아픈 환자의 존재는 공동체 전체의 문제가 된다. 개인이 아프면 공동체도 아프다. 신자 개인이 죄를 지으면 교회 전체가 죄를 짓는 셈이다. 죄와 병에 대한 공동체적 생각이 우리 시대에 우리 교회에 있는가. 아쉽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의 치유 자체가 아니라 치유 날짜, 즉 안식일에 치유를 문제 삼았다. 안식일에 치유 사실을 예수에 대한 반대 논거로 삼은 것이다.(요한 5,9-16; 9,14)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와 제자들의 행동뿐 아니라 예수의 신분 자체를 문제 삼는 적수로 소개되고 있다.


10절에서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는 뜻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동사는 수동태로 쓰여졌다. 병을 고치는 유일한 분은 하느님이라는 말이다. 감기 같은 일상적인 병도 고치는 분은 결국 하느님이다. 11절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잔뜩 화가 났다. 11절에서 anoia는 무지 또는 분노로 번역될 수 있다. 루가는 그들이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여겼다. 예수를 미워한 사람들은 예수의 갈릴레아 활동 시절부터 있었다. 누가 왜 예수를 죽이려 했는지 정확히 아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과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느냐는, 초대교회에서 교리문답 형식으로 쓰이던 이야기다. 안식일에 지켜야 할 규칙에 대한 질의 응답에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진짜 주제가 담겨 있다. 루가는 안식일의 주인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가 아니라 예수라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해도 되느냐는 주제는 안식일뿐 아니라 모든 날에 좋은 일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넓혀졌다. 이 메시지를 우리가 자주 놓치고 있다. 나쁜 짓을 하는 일이 죄일 뿐 아니라,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도 또한 죄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좋겠다. 좋은 일을 게을리 하는 것도 하느님 앞에 부끄러운 일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의 선행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사소한 선행이 가난한 사람들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다.


10절 “손을 뻗으시오.”에서 일종의 ‘손 신학’을 전개하면 어떨까. ‘신의 손’이란 용어는 축구선수 마라도나가 손으로 한 헤딩슛을 가리키거나 뛰어난 골키퍼를 말하는게 아니다. 우리 인간의 사랑은 대부분 손으로 표현되고 전달된다. 따스한 손, 부드러운 손길에 우리 사랑이 담겨있다. 마더 데레사, 로메로대주교, 프란치스코교황의 손을 생각해보자. 우리 부모들과 우리 자신의 손에도 사랑이 있다. 그들의 손을 잡자. 우리 손을 내밀자. 손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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