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자꽃 필 무렵’ 주일 공소예절을 하러 공소에 내려갔다. 날씨가 더워지며 일들이 많아지고 다들 피곤한 모습이다. 감자꽃 필 무렵 보릿고개면 밭 일구랴 모 내랴 산골 사람들의 일손이 제일 바쁜 계절이다. 벌을 치는 사람도 이산저산 꽃이 피면 꽃 따라 벌들이 바빠지고 사람들도 덩달아 바빠진다. 대충씨네 처가 식구들이 한 무리 참석하여 공소 보는 숫자가 부쩍 늘었다. 공소예절 후에는 지난 달 세상을 떠난 마천 서베드로씨를 위해서 교우들이 위령기도를 바쳤다. 2019-05-27 전순란
- ‘용서란 원한이나 앙심으로 잃어버릴 뻔한 자유를 되찾는 것’ 어제 오후 보스코가 잠들 때 쓰는 양압기에서 날카로운 기계음이 나서 내가 한 시간에 한번은 일어나 기계의 공기압을 낮추어주다 보니 나는 밤새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었던 것처럼 피곤하다. 그러나 보스코는 그 소리가 전혀 안 들렸다니 복도 많다! 그가 건강한 이유는 필요 없는 일에 귀 기울이거나, 쓸데없는 일에 마음 쓰는 일이 없어서일 게다. 게다가 욕심도 없고 남에 대해서 좋게만 보는 눈을 가졌으니 그건 타인을 위해서보다 보스코 자신을 위해 더 좋은 일이겠다. 2019-05-22 전순란
- 은평성모병원에 기대하는 ‘국민사도직’ 보스코가 무호흡증으로 ‘철가면’을 쓴 게 벌써 3개월이 되어간다. 오늘 체크를 하러 병원엘 가는데 얼마 전까지 청량리에 있던 ‘성바오로병원’이 은평구로 커다랗게 집을 짓고 이사를 하며 ‘은평성모병원’으로 개명을 했다. 가는 길은 북악터널을 지나 구기 터널을 통과하였다. 17km의 거리를 가는데 한 시간 반이 걸린다. 구기동길은 내 동생 호천이의 가난한 신혼생활 애환이 골목마다 서리던 곳이라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이렇게 내 마음도 짠하니 정작 본인들은 그 산비탈과 터널을 지나는 일이 인생의 고달픈 과거가 회상되어 다시는 통과하고 싶지 않으리라. 2019-05-17 전순란
- 백마 탄 왕자님 대신 자전거 탄 울오빠 ‘지난번 심고 간 으아리가 어찌 됐을까?’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궁금했다. ‘일주일에 한번은 물을 좀 주라’고 총각들에게 부탁을 하고 갔기에 지금쯤 뿌리를 내려 자리잡고 줄기를 뻗고 있으리라 기대를 했는데, 물 한 모금 얻어먹지 못한 으아리 두 포기는 겨우 생명을 부지하고 있었다! 내게는 중요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 외의 상황일수도 있다고 스스로에게 타이르며, ‘그래, 좋게만 생각하자’고 다짐한다. 2019-05-15 전순란
- 산청 황매산 철쭉제 자다가도 일어나서 어스름에 데크 위를 걸어본다. 그만큼 고생하며 내 손으로 해냈다는 생각에 오지다. 노동을 해 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보람이다. 이번 주말 토, 일, 월요일에 연달아 손님이 오신다지만 이젠 걸릴 게 없다. 2019-05-10 전순란
- “물동일 머리에 이고”(Remo Bracchi) 팔이 쑤시고 손가락이 아파 눈을 떴다. 어젯밤 일어나 진통제를 먹었는데도 손가락 끝까지는 통증을 진정시키지 못하나 보다. 내 손을 들여다보니 사방이 상처고 류마티스기가 손가락을 괴롭히는 중이다. 한때는 내 손도 예쁘다는 소릴 들었는데… 보스코한테 시집와서 전업주부로 살다 보니 어쩔 수 없다. 2019-05-08 전순란
- 산칼리스토 카타콤바의 추억: 잔카를로 신부님 보스코가 읽다 두고 간 시집에 눈길 멈춘다. 내가 좋아하는 아우님 김유철 시인의 포토 포엠 에세이집 「그림자 숨소리」. “그가 오는 날 ‘산은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어 질 것’이라고 말했다. 아기 예수를 기념하는 성탄절이다. 예배하고 나오는 길에 아내에게 말했다. ‘이번 生에 말이야, 그분을 만난 것 하나만으로 충분해. 아니 넘쳐.’ 아내가 잡은 손을 꾹 쥐었다.” 김유철의 逢.봉! 2019-05-03 전순란
- ‘내가 거저 당신을 부리겠습니다’ 서울집 마당 대추나무는 볼품없이 가는 가지에 새싹을 올리려다 요즘 추위에 주춤하고 있다. 서울집에도 옛적에는 동쪽 담장으로 커다란 대추나무가 있어 매해 두세 말 대추를 수확해서 남도 줘가며 양껏 먹었는데 어느 핸가 대추의 암(癌)이라고 하는 ‘미친병’(점잖게 ‘빗자루병’이라고 부른다)이 우리 동네 대추나무를 훑고 지나갔다. 겨울 새벽에 ‘서리의 여왕’이 긴 망토를 끌며 지 2019-05-01 전순란
- 4.3 현장을 찾고 4.19민주묘지를 참배하는 교황대사라면… 손님이 오면 실상 음식하느라 힘들다기보다 준비하면서 겪는 스트레스가 더 크다. 음식이야 끓이고 굽고 졸여서 만들면 그만이다. 오늘 새벽에만도 ‘식전 칵테일을 하려면 얼음을 얼려야지.’ 해서 아래층에 내려가 얼음 그릇을 찾아 물을 채워 냉동실에 넣었다. 한참 잠이 들려다 ‘손님에게 전식으로 나가는 전복을 설명하려는데 이탈리아말로 뭐라고 했더라?’ 벌떡 일어나 찾아보니 abalone란다. ‘그럼 메인 접시 광어는 이탈리아말로 뭐라나?’ 하며 다시 일어나고, ‘빨강무를 삶아야 하는데’ 하며 또 일어나고, ‘실내 슬리퍼가 다 해져 손님에게 신길 슬리퍼도 사와야지.’ 하는 생각이 또 든다. 그러다보니 새벽까지 누웠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밤을 샌다. 2019-04-29 전순란
- '사람의 얼굴은 각자가 평생 그려온 그림'이라던데 덕성여대 뒷길에 늘어선 벚나무는 그 찬란했던 기억을 모두 땅 위에 떨구고 남은 시간을 보낼 장고에 들어갔다. 꽃잎이 떨어지고 작은 열매에 남은 꽃술은 작을 열매의 길잡이지만 마치 털빠진 병아리처럼 볼품이 없다.... 2019-04-26 전순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