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근수 편집장) 안녕하세요. 오늘 귀한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교수님께 깨달음에 대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 (우희종 교수) ‘깨달음’을 쉽게 얘기하자면 ‘거듭 태어남’과 유사한 개념인데요. 탐욕과 욕망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삶에서부터 진리와 함께하는 삶으로의 인식 전환을 말합니다.
- 그런데 한쪽에서는 ‘깨달음 지상주의’라는 비판이 나옵니다. 이런 비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러한 인식 전환을 통해서 자신의 삶도 풍요로워지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 더 나아가 생명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세를 말합니다. 사실 그것이 목적인데 한국 불교에서는 ‘인식 전환’이라는 깨달음을 최종 목표로 설정하다보니, 실제 삶이나 사회 속에 환원이 되지 않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자나 스님들도 깨달음을 얻기 위해 평생을 소비하느라 그것을 하기 위한 목적을 잊어버리게 된 거죠. 오프닝만 하고 끝나는 상황이 돼서 깨달음 지상주의라고 지적합니다.
- 그렇다면 깨달음 뒤에는 무엇이 남습니까?
▶ 깨달음 다음에는 삶의 모습, 삶의 현장 자체로 펼쳐져야 합니다. 이것을 회향이라고 합니다. 주변의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고통을 없애기 위해 자신의 삶을 던지는 겁니다.
- 그렇군요.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통, 고해 측면에서 보는 것 같은데 가톨릭에서는 인생, 욕심을 중립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 불교에서는 욕망을 두 가지 측면에서 봅니다. 생명체로서 생존을 위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욕망들, 그런 것들은 부정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 것을 빼앗기 때문에 스스로도 고통 받는다는 점에서 부정하지만 깨달음 다음에 주변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욕망은 긍정적으로 바라봅니다.
- 한국 불교에 깨달은 스님과 신자들은 많습니까?
▶ 한마디로 답하긴 어렵습니다만, 부처님은 늘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 삶의 모습, 행위로 바라보고 알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런 면에서 주변과 함께 하고 자신의 삶을 그런 모습으로 만들어가는 스님이나 재가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이 깨달았다고 외치고 승려라고 말해도 삶의 모습이 그렇지 않을 때는 깨달았다고 말하기 힘듭니다. 불자로서 삶의 현장에서 귀감이 되는 분들은 깨달았다고 봅니다.
- 불교에서 세 가지 보물이라고 해서 불(佛)‧법(法)‧승(僧) 이렇게 말하죠? 가톨릭 신자들은 승보(僧寶)란 단어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설명 부탁드립니다.
▶ 우리가 말하는 승은 승가입니다. 승가는 그러한 진리를 추구하는 집단을 말하죠. 그 집단을 소중히 여기고 의지하며, 그들을 항상 존경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승가라고 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승가가 스님을 뜻하는 의미로 변질되면서, 개인숭배가 되었고 그들의 전행이 시작되었습니다.
- ‘승가’를 그리스도교의 ‘교회’라는 말에 대입하면 어떨까요? 갑자기 교회가 성직자로 축소된 것이 승가가 승이 된 것과 비슷한 경우 같습니다. 우리나라 여러 현장에 가면 스님들이 잘 안 보입니다. 어떻게 된 일인가요?
▶ 깨달음 지상주의의 병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자신의 삶을 주변 그리고 고통 받는 곳에서 함께 한다는 것 자체가 수행이자 회향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한국 불교처럼 깨달음이 최고가 되니 사람들이 다 깨달음을 위해 자신의 삶을 소진시키면서, 삶 속 고통의 현장에서 멀어졌습니다.
- 깨달음을 위해서 하안거(夏安居), 동안거(冬安居)를 꼭 해야 하나요? 아니면 일상에서도 가능한가요?
▶ 보다 효율적이고 능률적으로 하기 위해서 하안거나 동안거처럼 수행자 집단의 형태로 살아가는 것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상적인 삶의 형태에서 수행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불교 자체에서 인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일상생활에서도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죠.
- 불교를 생각하면 ‘화쟁(和諍)’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화쟁이 무엇입니까?
▶ 원효스님은 비유로 말씀하셨는데요. 코끼리를 바라볼 때 각자의 위치에서 코끼리를 바라보면 다리를 보고 기둥 같다고 하고, 코를 보면 밧줄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모두는 자신의 한계 내에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알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들을 종합하고 보완했을 때에 큰 그림을 알 수 있다는 것이 ‘화쟁’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화쟁이 성립하기 위한 전제가 중요합니다. 제대로 된 코끼리를 알고 싶다, 혹은 이 상황의 전체 모습을 알고 싶다는 간절하고 순수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요즘 화쟁은 순수한 마음이 아닌 자신의 욕심, 입장을 고집하면서 화쟁할거냐고 말하기 때문에 진정한 화쟁이 이뤄지지 못하죠.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의도적으로 왜곡시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데 순수한 열정이 전제 된 화쟁을 들이민다는 것은 너무 순진한 겁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사회에서 말하는 화쟁을 싸구려 화쟁 이라고 말합니다. ‘화쟁’을 자기 입장에 맞춰서 스스로 합리화하고 포장해 싸구려 화쟁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 화쟁하면 ‘화해’라는 단어가 생각나는데 그리스도교에서 화해란 단어를 많이 발언할수록 의심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 지은 사람 입에서 화해란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불교는 어떻습니까?
▶ 옛날 봉은사에 명진스님이 있었고 정치권과의 연결이 문제 됐을 때 화쟁위원회가 만들어졌어요. 자승 총무원장 스님도 많은 의혹이 있는데 갑자기 화쟁하자고 하신 거에요. 그렇게 지금까지 한국 불교계에서 화쟁이 중요한 것처럼 뜨기 시작한 거죠.
- 최근 우 교수님이 ‘사실과 진실, 그리고 화쟁’(관련기사 보기)이라는 좋은 칼럼을 가톨릭프레스에 주셨는데요. 사실과 진실의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 특정 집단 내에서 다수가 믿는 것을 ‘사실’이라고 합니다. 과거에는 지구가 평편했지만 지금은 둥근 것처럼요. 과학이 계속 발전한다면 나중에 지구 모양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인 모양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집단이나 문화가 변하면 바뀔 수 있습니다.
‘진실’은 시대와 문화를 떠나서 여전히 우리가 공감하고 인정하고 삶의 가치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 말씀이나 2500년 전 부처님 말씀이 여전히 우리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죠. 100년, 200년 후에도 우리가 공감하고 인정할 수 있다면 이것은 ‘진실’입니다. 사실과 진실은 같을 수도 있지만 결코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가 인정해야 될 것 같습니다.
- 최근 용주사 사태, 봉은사 사태를 보면 스님을 개혁 대상으로 재가불자들이 개혁 주체로 나서는 모습이 보입니다. 정말 부럽습니다. 불교에서 어떻게 이런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습니까?
▶ 일단 어느 종교집단이나 부정부패한 사람들은 있죠. 현재 불교의 종단 형태가 가톨릭과 개신교의 중간 형태입니다. 가톨릭처럼 중앙집권제가 자리 잡지 못했고 개신교처럼 교회별, 다시 말해 사찰별로 진행되지 않아요. 문제 있는 승려들이 있을 때에 개신교처럼 그 문제가 한 사찰로 끝나지 않고 종단으로 비하되거나 가톨릭처럼 종단 차원에서 철저하게 가려지고 종교적 기능을 흔들림 없이 수행할 수 있는 체제가 아닙니다.
가톨릭과 같은 형태의 종단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각 사찰의 권한이 너무 큽니다(여기서 권한은 돈이 많다는 겁니다). 권한이 중앙에서 관리되지 않고, 힘 있는 사찰들이 내는 돈으로 종단이 운영되다보니 종단은 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또 각 사찰도 자기 운영방식에 따라 돈이 뒷주머니에 들어가다 보니 부정부패가 횡행하고 그 문제가 노출됐을 때 특정 사찰의 문제가 아니라 종단 문제로 번져가면서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 일반 시민들은 독신으로 사는 가톨릭 사제와 불교 스님들이 왜 그렇게 돈과 권력에 욕심이 많은지 의아해 합니다.
▶ 한국 불교 종단 내에는 눈 먼 돈이 많습니다. 전통적으로 한국 사찰에는 과거부터 내려온 땅이 많습니다. 문화재 관리라는 명목으로 정부에서 몇 백억이란 돈이 내려오죠. 유명 사찰은 신도들이 내는 돈도 굉장히 많아요. 그런데 그런 돈에 대해 사찰의 주지가 전권을 행사할 수 있어요, 세금 추적도 안 되죠. 이렇게 이권이 널려있어서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스님들이 계파를 만들고 계파를 만들기 위해서는 계파에게 이권을 나눠줘야 하겠지요. 그러다보니 권력을 갖기 위해(돈이 많이 들어오는 사찰을 갖기 위해) 서로 치고 박는 싸움이 일어나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돈’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집행부가 될수록 돈에 더 찌들고 권력싸움이 더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 다른 개신교나 가톨릭도 큰 차이가 없지만 불교는 전통적으로 정권을 지지해 왔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 앞서 말했듯이 정부에서 몇 백억이라는 돈을 주기 때문입니다. 불교 차원에서 주변과 고통을 함께하는 자세로 임했다면 당당히 거절할 수 있어야 하지만 돈에 눈이 먼 겁니다. 정권에 아부해서 돈을 받고 자기 세력을 키워놓으면 돈과 권력을 대대로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거죠. 차라리 개신교처럼 사찰이 독립하면 계파를 형성할 필요도 없이 사찰의 돈 관리로 끝나거나 가톨릭처럼 완전히 종단이 틀을 잡으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을 텐데, 현재 아주 애매한 형태로 정부 눈치를 보고 계파 형성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 94년 개혁운동의 시즌2라고 볼 수 있는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은처 스님들을 개혁 대상으로 보는데, 자승 스님 이야기도 나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한국 조계종단 내에서는 기정사실화 되어 있는 의혹입니다. 총무원뿐만 아니라 용주사처럼 본사급 주지에서 이야기되는 것은 스님들이 수행만 하면 문제 없지만 신도들과의 관계, 그들이 내는 돈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관계이니까 숨겨놓은 처들이 많아요. 사실 수행승이 아니죠. 심지어 총무원장까지도 그런 의혹이 있다는 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다보니 더욱 결함이 있는 사람들끼리 뭉쳐서 현재 집행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 가톨릭에 실망스러운 것, 조언을 주고 싶은 것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 한국 가톨릭은 독자적인 튼튼한 체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권에 너무 아부하는 신부님들이 많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한국 불교처럼 불안정한 종단, 문화재 관리라는 막대한 돈에 의존하는 집단이라면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그러나 가톨릭은 바티칸을 중심으로 잘 된 체제를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에 눈을 돌리는 신부님들이 많아서 안타깝습니다.
두 번째로 부정부패가 외부로 노출되지 않고 안에서 덮여지는 것이 아쉽습니다. 하얀 거짓말이라고 가톨릭이 사회에 눈물을 닦아주는 종교적 기능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내부 비리가 가려지는 것 같아서 아쉽죠.
- 불교나 개신교는 개인이나 단체의 비리가 많이 노출되어서 어떤 것을 고쳐야 하는지 잘 보이지 않습니까. 가톨릭은 은폐 전략을 쓰고 있어서 더 중병에 들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끝으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 존경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 성서 가르침에 충실하고 진정으로 목말라하는 것을 간파하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는 점에서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 오랜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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