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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칼럼] 프란치스코 교황, 해방신학자 소브리노 격려해 “계속 쓰세요!” 김근수 편집장 2015-11-16 11:2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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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쓰세요!”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청 마르타의 집에서 열린 아침미사 후에 해방신학자 혼 소브리노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고 라디오바티칸이 13일 소브리노의 말을 인용해 보도하였다. 소브리노는 50년 전 이날 결성된 카타콤베 언약 50년을 맞아 로마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던 중 13일 미사에서 교황을 만난 것이다. 


바르셀로나에서 1938년 태어난 그는 18살에 예수회에 입회하여 곧바로 스페인을 떠나 엘살바도르로 갔다. 그 뒤 그는 미국에서 공학을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엘살바도르로 돌아와서 예수회 친구 이냐시오 에야쿠리아 신부와 같이 중앙아메리카 대학을 세우는데(UCA) 관여하고 교수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1980년 암살된 로메로 대주교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으며 로메로 대주교의 사목서한을 쓰는데 도움을 준다. 1989년 11월 16일 내전 중이던 엘살바도르에서 정부군의 총에 6명의 예수회 사제와 두 평신도 직원이 살해되었을 때, 소브리노는 태국에 강연하러 가 있어서 목숨을 부지하였다. 


소브리노는 해방신학에서 그리스도론과 교회론, 해방의 영성에서 뛰어난 글을 꾸준히 발표하였다. 그의 대표작 “해방자 예수: 해방신학으로 본 역사의 예수” (김근수에 의해 최근 한국어로 번역되었다)와 “예수의 신앙: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는 글”이 주목받았다. 


그는 해방신학적 방법론으로 인하여 수차례 교황청에서 경고 서한을 받아왔다. 1999년 소브리노 연구실에서 내가 직접 읽고 확인했던 각종 경고 서류만 해도 수십 페이지가 넘었다. 결국 2007년 교황청은 해방신학자 소브리노를 비판하는 문서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소브리노의 저서들이 역사적 예수에 집중하면서 예수의 인간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그의 신성을 약화시킴으로써 예수를 왜곡한 점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에 영향을 받아 라틴아메리카에서 해방 운동이 일어나고 있기는 하였지만 이에 동참하는 사제들과 수녀의 수는 소수였다. 아르헨티나에서 ‘제3세계 사제 운동’이 최고에 달했을 때 이에 참여하는 사제는 500여 명에 불과했다.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활동하는 사제는 5,000명이 넘었다. 


그럼에도 해방신학에 동참한 사제들의 활약은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들 사제들은 학교나 교회를 넘어서서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한 삶의 현실과 현장에서 사목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해방신학에 거리를 둔 대다수의 사제들은 주로 가톨릭 학교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엄밀한 의미에서 해방신학자는 아니지만, 해방신학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소브리노는 밝혔다. 아르헨티나에는 교황의 스승 Juan Carlos 예수회 신부가 창안한 민중신학이 있었다. 맑시즘에 의거한 계급분석보다 민중들의 문화적 다양성과 활력에 기대하는 해방신학의 한 흐름이었다. 


교황은 민중신학에 심취해 있었다고 스칸노네 신부는 작년 봄 예수회 잡지 La Civiltà Cattolica에 발표한 글에서 분명히 밝혔었다. 스칸노네 신부는 작년 6월 이태리 예수회 잡지 La Civiltà Cattolica 건물에서 나와 인터뷰를 갖기도 하였다. 여기서 그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신학생 시절, 예수회 관구장 시절, 교구장 시절에 있던 여러 일화를 내게 전해주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학생 시절 Scannone 신부에게 그리스어와 문학수업을 받았다. 교황은 젊은 날 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쳤다. 


“계속 쓰세요!” 위축되지 말고 용기를 내어 해방신학을 계속하라는 뜻이겠다. 짧은 이 한마디에 소브리노의 지난 수 십 년 해방신학자의 삶과 행로에 있었던 슬픔에 커다란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내 스승 소브리노 뿐 아니라 해방신학에 투신해온 많은 신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쁨과 위로가 되는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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