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고위 관리의 구멍 난 구두와 이멜다의 3천 켤레 구두
옛날 소년 시절(중학생 때였지 아마…) 신문에서 보았던 사진 한 장에 대한 기억이 지금도 내 뇌리에 남아 있다. 이름이 생각날 듯하면서도 명확히 떠오르지 않는데, 미국 정부의 고위 관리(유엔 대사였지 아마…)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의 한쪽 구두 밑창이 카메라에 잡혔는데, 구멍이 나 있었다. 그러니까 밑창에 구멍이 난 구두가 그 사진의 포인트였다.
나는 그 사진을 보며 이상한 감동을 받았다. 미국 정부의 고위 관리가 밑창에 구멍이 난 구두를 신고 있다는 사실에서 정말 이상한 충격을 받았다. 그 고위 관리가 더욱 멋지게 보이고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내가 어린 나이에 그런 특이한 감정을 지녔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조금 신기하기도 하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입성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았다. 멋을 부린다거나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싶은 마음은 거의 없었다. 중학생 시절 교복 바지자락이 발목 위로 오르도록 짧게 입는 것이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는데, 유행에 휩쓸리는 것이 싫어 나만 유독 발목 아래까지 자락을 늘여 입었던 기억이 난다. 내게는 일찍부터 유행을 경멸하는 특이한 시각이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직접 옷가게에 가서 내 손으로 옷을 사 입은 경우는 몇 번 되지 않는다. 주로 어머니가 사다 주는 옷을 입었고, 아내에게 이끌려간 적들도 있었고, 누님이나 처형이 보내준 옷을 입기도 했다. 나이 마흔을 먹고 결혼할 때 맞춤양복 두 벌을 지었는데, 그 양복들을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새것처럼 입고 있다.
어른이 되어 처음 구두를 신었을 때는 소년 시절 신문에서 보았던 미국 고위 관리의 구두 사진을 떠올렸다. 공식 석상에서 카메라에 포착된 밑창에 구멍이 난 구두…. 나도 밑창에 구멍이 나도록 오래 구두를 신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싶다.
1986년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가 시민혁명에 의해 축출되었을 때도 나는 미국 고위관리의 밑창에 구멍이 난 구두 사진을 떠올렸다. 마르코스의 아내인 이멜다의 구두 3천 켤레가 세상에 알려져 화제가 된 탓이었다. 이멜다의 구두 3천 켤레는 지금도 마닐라의 말라카낭 궁에 전시되어 있다는데, 사치의 대명사가 된 이멜다의 3천 켤레 구두는 지금도 종종 내 뇌리에서 피어나곤 한다.
2002년이던가, 필리핀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4일 동안 필리핀에 머물며 여러 곳을 가보았는데, 가는 곳마다 가난한 행상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액세서리 등 수공예품을 사달라고 조르는 행상들 가운데는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손으로 만든 공예품을 한국의 라면과 바꾸기도 했다.
수많은 행상들의 꾀죄죄한 모습과 그들이 신고 있는 낡은 샌들을 보면서도 나는 이멜다의 3천 켤레 구두를 떠올려야 했다. 이멜다가 21년 동안 권좌에서 온갖 호사를 누리고 구두를 3천 켤레나 장만하면서 한 번이라도 가난한 민초들 생각을 했을지, 한없이 궁금해지는 마음이었다.
설빔에 대한 추억
요즘에는 설빔이라는 게 거의 없고 말조차도 사라진 것 같이 느껴지는데, 내게는 설빔에 대한 추억들이 있다. 물론 추석빔 추억들도 있다. 옛날에는 설이나 추석에는 꼭 명절빔이 있었는데, 추석빔보다 설빔 추억이 더 명료한 것 같다. 설은 새해가 시작되는 첫날이기에 설빔에 더 신경들을 쓰고, 신선한 느낌이 더욱 컸지 않았나 싶다.
옛날 내 부모들은 명절을 앞두고 자녀들의 명절빔에 신경을 많이 썼다. 명절에는 꼭 새 옷이 생기거나, 새 양말과 새 고무신, 새 운동화가 생겼다. 명절빔 때문에 명절날이 더욱 손꼽아 기다려지기도 했다. 명절날 아침에 새 옷을 입고, 새 양말을 신고, 새 고무신이나 새 운동화를 신고 차례를 지내려 큰집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설 때는 신선한 느낌으로 몸이 날아갈 듯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명절빔을 받은 기억들이 있지만, 언젠가부터 명절빔은 내게서 사라지다시피 되고 말았다. 내 아내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물론이고 학생 시절에는 아이들 명절빔에 신경을 쓰곤 했는데, 요즘에는 아예 생각도 않는 것 같다. 명절빔은 이제 우리 가족 모두에게 옛날의 추억거리로나 남게 됐다.
다른 집들도 거의 마찬가지일 것 같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입는 것도 넘치는 세상이고 항시 좋은 옷들을 입고 사니 굳이 명절빔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명절에 조상을 위한 합동위령미사를 봉헌하러 성당에 가서 보면, 하나같이 정갈하고 멋진 복색들이지만, 명절을 맞아 새로 장만한 옷을 입은 사람은 거의 없지 싶다. 그러니까 보편적인 생활수준이 명절빔의 필요가치를 제거해 버린 셈이다.
하지만 유난히 복색에 신경을 쓰고 사는 사람이라면 요즘 세상에도 명절빔에 신경을 쓸 것 같다. 옷이 없어서가 아니라, 새 옷을 입고 싶은 욕구 때문에 명절빔을 스스로 장만하는 경우도 있으리라는 얘기다. 복색에 유난히 신경을 쓰고 시시때때로 새 옷을 입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그런 사람에 해당될 것 같다. 박 대통령은 올해 설에도 십중팔구 설빔을 장만했지 싶다. 스스로 설빔을 장만했다면 이번에는 어떤 옷일지 궁금하다. 워낙 패션에 집착을 보이는 분이고 패션 감각이 뛰어난 분이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세계 모든 나라의 지도자들 중에 대한민국의 박근혜 대통령이 복색에 가장 신경을 쓰는 사람, 패션 감각이 가장 뛰어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 어쩌면 가장 많은 옷을 갖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로서는 정말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검소하거나, 패션 감각이 없는 지도자들
베트남(남 월남)의 초대 대통령이었다가 1963년 11월 군부쿠데타로 실각하면서 피살된 고딘디엠에게는 고딘누라는 제수가 있었다. 고딘누 마담으로 불린 그녀는 고딘디엠 독재정권의 실권자였다. 국정 전반을 40대인 그녀가 좌지우지했다. 그녀의 행차 장면 사진을 ‘뉴스위크’ 표지에서 보았던 기억이 지금도 내 뇌리에 남아 있다. 뉴스위크는 당시 태안성당 초대 주임 고대연 야고보(콜롬비아인) 신부가 구독하던 미국 시사주간지였다.
화려하게 장식한 커다란 코끼리 등 위에 높다란 의자가 있고, 그 의자에 고딘누 마담이 앉아 있었다. 코끼리 목덜미 위에는 마부가 앉아 있었고, 엉덩이 쪽에도 한 남자가 서서 고딘누 마담 머리 위로 양산을 받쳐 들고 있었다. 그리고 코끼리 주위에 총을 멘 병사들이 둘러서서 호위를 하고 있었다. 너무도 인상적인 장면이어서 나는 오래도록 그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1970년 나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베트남에 가면서도 고교생 시절에 보았던 뉴스위크의 그 장면 사진을 떠올렸다. 월맹의 지도자인 호지명(호치민)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들을 얻었다. 검소하게 생활하는 호치명은 신발도 한 켤레만 가지고 있다고 했다.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와 존경을 받고 있다고 했다. 나는 월남이 월맹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고인이 된 호치민의 그 검소함을 다시 볼 순 없지만, 오늘에는 우루과이 호세 페페 무하카 대통령에게서 검소한 지도자의 모습을 본다. 그는 대통령 집무실에서 넥타이도 매지 않고 흰 셔츠차림으로 생활한다. 월급의 90%를 시민단체에 기부하고, 화려한 대통령 관저 대신 농장에서 지낸다. 1987년에 생산된 낡은 하늘색 폭스바겐 비틀 자동차를 사용한다.
고급 브랜드가 아닌 평범한 몇 벌의 옷만 가지고 있고, 월급 1만2천 달러 중 10%만으로 생활하는 그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지만, 우루과이 국민은 물론이고 전 세계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도 검소한 지도자로 꼽힌다. 그녀는 옷을 못 입는 여성 정치인으로 악명(?)이 높다. 우선 패션 감각이 제로에 가깝다. 2013년 6월 미국 대통령 오바마의 독일 방문 때 메르켈이 입었던 ‘통바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독일의 유명 패션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는 “제발 신체 비율을 생각해서 옷을 입으라”고 빈정대기까지 했다.
영어와 러시아어에 능통하면서도 어느 나라를 가든 독일어로 연설할 만큼 모국어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가진 그녀는 자국 국민들에게 ‘엄마’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친근감을 주며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재임 중 몇 벌의 옷을 갖게 될까?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은 고급을 선호하고 화려함을 좋아한다. 유난스러울 정도다. 지난해 12월 국회 긴급 현안질의 때 새정련 최민희 의원이 조달청으로부터 받은 보고서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다. 청와대의 물품구입 기록부는 사치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699만원짜리 침대, 545만원짜리 책상, 213만원짜리 서랍장, 224만원짜리 의자, 90만2천원짜리 화장실 휴지통 등등.
이렇게 화려함을 즐기는 박근혜 대통령은 특히 패션 감각이 뛰어나 화려한 복색에 유난히 신경을 쓴다. 시시때때로 새 옷을 지어 입는 것을 즐긴다. 2013년 2월 취임한 아래 일 년 동안 착용한 옷만 122벌이었다. 그 후 또 2년이 지났으니 300벌이 넘었을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의 옷에 대한 집착은 병적인 수준인 것 같다. 취임 첫해부터 많은 국민이 그의 옷차림을 주시하며 걱정을 했다. 나 역시 청나라 말기의 서태후를 연상하며 걱정을 하면서도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 이후에는 좀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했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이들과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대통령이 화려한 복색을 착용하는 것도, 빈번하게 새 옷을 지어 입는 것도 많이 자제해주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지난해 11월 13일 프랑스 파리에서 이슬람국가(IS)의 테러로 130여 명이 사망하고 300명 이상이 다치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는데, 11월 30일 프랑스를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은 그곳에서 패션 전시회 행사를 관람했다. 자신이 외국 방문 때 입었던 한복 등을 전시하는 행사였는데, 남의 초상집에 가서 잔치를 하는 형국이었다.
지난해 10월 21일 청와대 사랑채에서 ‘한복 특별전’을 열고, 자신이 외국 순방 중 입었던 한복과 사진들을 걸어놓고 연예인들을 불러 손수 설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대통령이 할 일은 아닌 것 같았고, 어지간히 할 일이 없는가보다는 생각을 많은 국민들이 공유했다.
때와 장소를 구분하지 못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옷에 대한 집착은 한 시대의 불행을 반영하는 모습으로도 보인다. 새로 지어 시시때때로 갈아입는 수백 벌의 옷은 정신상태의 빈곤을 스스로 노출하는 것이기도 하고, ‘헬조선’으로 표현되는 오늘의 암울한 시대상을 역으로 상징하는 것으로도 여겨진다.
대통령은 그 이름만으로도 웅장함을 지닌다. 화려한 복색과 수백 벌의 옷이 아니어도 그 지위는 절로 빛이 난다. 검소할수록 더욱 빛이 나는 역설도 있다. ‘옷이 날개다’라는 속설은 가난한 서민들한테나 해당되는 용어이지, 대통령에게는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화려한 옷이 아니어도 대통령은 그 자체로 ‘용의 날개’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화려한 복색과 수백 벌의 옷에 파묻힌 대통령의 모습은 그 화려한 복색과는 달리 너무도 빈곤하고 초라하게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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