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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지요하] 애국할 자신이 없다…황교안 국무총리 때문에 ‘애국’의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했지만…무섭다, 획일화되는 애국심이 지요하 2016-02-17 09:5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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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지사들에 대한 공경과 불편


지나온 내 삶을 돌아보면 비애국적인 삶을 살아온 것 같지는 않다. ‘애국’이라는 것을 시시각각 철저히 의식하며 살았거나, 애국자가 되기 위해 특별하게 노력하며 살진 않았다. 하지만, 나는 비애국자보다는 애국자 축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나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존경하고 흠모한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일생을 헌신했던 광복지사들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나는 ‘독립투사’라는 말보다는 ‘광복지사’ ‘민족지사’라는 말을 선호한다). 더 멀리로는 한글을 창제해서 오늘 내가 한글로 글을 쓸 수 있도록 해주신 세종대왕님과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각별히 존경하고 흠모한다.           


그런데 일제에 저항했던 광복지사들을 공경하는 일에는 이상한 불안과 장애를 느낀다. 안중근 장군과 대한광복군사령관 지청천 장군에 대한 헌시를 지어 공식 행사장에서 낭송한 이력도 있고 해서 더욱 명확히 인식한 것인데, 광복지사들을 공경하는 일에서 모종의 불편을 느낀다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이다.


광복지사들의 일생을 살피거나 추적하다보면 친일파·민족반역자들을 만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육사 출신 관동군 장교로 광복군을 때려잡던 박정희도 만나게 되고, 친일파들의 수호자 이승만도 만나게 된다. 사람들은 이승만을 광복지사로 오해하는데, 미국에서 호의호식하며 광복운동에 한 다리를 걸쳤던 그는 광복 후 초대 대통령이 되자 친일파를 대거 등용했다. 또 친일파를 단죄하는 작업을 분쇄해버렸으니 결국 친일파의 범주에 들지 않을 수 없다. 


광복지사들을 공경하는 일에 있어서 민족반역자들을 만나지 않을 수 없는 현실, 경우에 따라서는 오늘에도 기득권 세력으로 존재하는 친일파의 눈치도 살펴야 하는 현상 앞에서 묘한 이율배반도 겪게 되고, 자괴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러니 얼마나 얄궂은 일인가.


무엇보다도 괴로운 일은 광복지사들 앞에서 죄스러움을 씻을 수 없는 일이다. 저 일제 때로부터 오늘에까지 굳건히 이어져 내려오는 친일파의 득세와 발호, 민족정기의 훼멸, 모든 악의 근원이 민족반역자들을 단죄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할수록 민족지사들 앞에서 민망함과 죄스러움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광복지사들을 공경하다 보면 자연스레 갖게 되는 ‘친일파 혐오’는 조심스러운 항목이다. 자칫 불만세력, 좌파로 몰릴 위험이 있다. 친일파는 독재세력과 동일체이기도 하니, 친일세력을 비판하는 일은 좌파로 오해받을 위험이 매우 크다. 


좌파로 몰리면 자신의 애국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순세력, 비애국자로 치부될 수도 있다. 그러니 광복지사들을 공경하는 일이 불편하지 않을 수 없다. 자칫하면 좌파, 비애국자로 몰릴 수 있는 상황이니 한마디로 난감하다. 애국지사들을 뜨겁게 존경하고 흠모하는 나는, 그러므로 애국자가 될 자신이 없다. 


병역의무를 완수한 애국시민의 시각


나는 병역의무를 완수했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병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베트남 전장에서 정글도 기었고, 최전방 철책선에서 북한 땅을 바라보며 잠복호 근무도 했다. 36개월 동안 후방과 월남과 전방에서 군대생활을 다양하게 했다. 


베트남 전장에 가기 위해 세 번이나 자원을 했다. 세 번씩이나 자원을 한 것에는 각별한 사연이 있지만 그 얘기는 하지 않겠다. 베트남에 간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미국으로부터 매월 전투수당을 받았다(그러니 용병일 수도 있겠다). 일등병 때는 월 41달러를 받았고, 상등병 때는 월 46달러를 받았고, 병장 때는 54달러를 받았다. 


▲ 베트남 전장에서 / 1970년 12월 대부대 작전에 참가했다. 치누크를 타고 정글 속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사진을 찍었다. ⓒ 지요하


미국으로부터 받는 병장 수당은 155달러라고 했다. 그 금액에서 2/3를 국가에서 가져가고 1/3만 병사에게 주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국가에서 가져가는 금액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국가경제발전에 쓰인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전투수당 2/3를 국가에 바쳐 애국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그 돈이 전부 국가로 가지 않고 일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비밀계좌로 들어갈지 모른다는 말도 돌았지만, 그런 말을 공공연히 하진 못했다. 


아무튼 나는 목숨 걸고 베트남 전장에 가서 애국을 했다. 전투수당 155달러 중 54달러만 받고 2/3를 금액을 국가에 바쳤으니, 그게 온전히 자의에 의한 것은 아니더라도, 피땀 흘려 애국을 한 셈이다.           

        

베트남에서 살아 돌아와 6개월 동안 최전방에서 생활했다. 중동부 전선 철책선을 지키는 부대의 분대장 근무를 했다. 병장 계급장을 달고 하사가 맡아야 하는 분대장 근무를 하면서 남다른 애환을 겪기도 했는데, 그 애환을 바탕으로 <내 마음의 철책선>이라는 중편소설을 지어서 <한국소설> 2011년 11월호에 발표하기도 했다.


철책선에서 분대장 근무를 하면서 민족의 분단 현실을 절절히 가슴 아파하기도 했다. 노상 북한 땅을 바라보며 분단의 실체물인 철책선을 지키는 일에서 겪은 자괴감은 지금도 가슴을 아리게 한다. 그 심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기는 어렵다. 비판적 시각이 결부될 터이므로, 자칫 좌파로 몰릴 위험도 있다.


충실히 군대생활을 했음에도, 전투수당 2/3를 국가에 바치며 애국했음에도, 최전방 철책선에서 감내했던 분단 현실에 대한 뼈아픔을 절절히 토로하지 못하는 것은 딜레마다. 자칫 통일지향의 좌파적 시각을 노출할 수 있으므로, 나는 애국자가 될 자신이 없다. 


평범한 소시민의 한계


나는 어언 60대 후반 세월에 이르도록 세금 체납도 한 번 해본 적이 없고, 위장전입이나 부동산투기 같은 것도 해본 적이 없다. 한마디로 오종종하게 살아왔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철칙을 철두철미하게 지켜온 셈이다. 


글을 써서 버는 쥐꼬리만한 고료에도 어김없이 붙는 원천징수로 세금을 꼬박꼬박 납부했고, 관청에서 세금고지서를 받으면 매번 납부 기일을 지키곤 했다. 교육공무원인 아내는 해마다 1월이면 연말정산을 하며 유리지갑임을 확인하곤 했다. 


자동차를 몰다 보면 가끔 단속카메라에 찍히기도 하는데, 서민 등골 빼먹는다고 불평을 하면서도 과태료를 한 번도 체납해본 적이 없다. 은행 창구 직원에게 속도위반 범칙금 통지서와 현금을 내밀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애국을 한다고 너스레를 떤 적도 있다.


나이 마흔에 결혼했을망정 두 아이를 얻어 잘 키웠고, 연세 아흔이 넘으신 노친을 잘 모시고 살면서 이런저런 단체들에 참여해 사회공동선을 위한 일들에도 함께하니, 나는 여러 모로 애국적인 삶을 살고 있다. 대한민국의 애국시민임을 자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 만리포 해변 / 태안 앞바다 원유유출 사고로 ‘기름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2007년 12월 13일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태안군지회 간부들이 만리포 해변을 찾아 해경 관계자에게 방제물품을 전달했다. 맨 왼쪽이 필자다. ⓒ 지요하


그런데 나는 요즈음 갑자기 애국자가 될 자신을 잃는 심정이다. 국무총리 황교안이 애국심과 애국가를 등치시키면서부터다.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를 수 있어야 애국자라는 그의 각별한 견해 앞에서 나는 돌연 애국심이 반감되고 말았다. 나는 애국가를 1절은 능숙하게 부를 수 있지만, 2절부터 4절까지는 깜깜 절벽이다. 그러니 어떻게 애국자일 수 있겠는가. 


국무총리 황교안의 지시로 모든 공무원의 면접시험에서 민주성, 공익성, 다양성에 대한 질문을 배제하고 오직 한 가지 애국심에 관한 질문만을 하기로 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나는 애국자가 될 수 없음을 확인했다. 나는 민주성, 공익성, 다양성이 애국심만큼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애국자가 되기는 그른 것 같다. 


민주성과 공익성과 다양성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어야 애국심이 제대로 함양되고 유지되리라는 생각을 고수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나는 애국자가 되기는 어렵게 됐다. 나는 국가보다 사람이 우선이고, 사람을 위해 국가가 있는 것이지 국가를 위해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고 굳게 믿는데, 틀린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국무총리 황교안은 ‘사람을 위해 율법이 있는 것이지 율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법한데, 율법과 국가는 다르다고 보는 것일까? 그는 태극기 앞에서 애국가를 부를 때는 가슴이 벅차게 끓어오르는 것을 느낀다고 하는데, 불행스럽게도 나는 그런 경험이 한 번도 없다. 


그는 고시에 합격해서 공안검사로 승승장구했고, 장관에다가 국무총리까지 됐으니, 태극기를 보며 애국가를 부를 때는 가슴이 벅차게 끓어오를 만도 하다. 하지만 나는 저 유신 시절 매일매일 태극기 하강식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에 가던 걸음을 멈추고 부동자세로 서서 애국가를 들을 때마다 외려 울분을 느꼈으니, 애초부터 애국자가 될 자질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황교안은 담마진이라는 희소병으로 병역의 의무를 피했고, 국무총리 인사청문회 때 여러 가지 부적격 사유가 세상에 노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태연히 국무총리가 돼 자신의 잣대로 애국심을 재단하고 있다. 그런 그의 잣대 앞에서 일개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준법을 생명처럼 알고 살아온 나는 애국자가 될 자신이 없다. 어디 가서 내 애국심을 찾아야 할지 그마저도 알 수가 없다. 






[필진정보]
지요하 : 1948년 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추상의 늪>이, <소설문학> 신인상에 단편소설 <정려문>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지금까지 100여 편의 소설 작품을 발표했고, 15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충남문학상, 충남문화상, 대전일보문화대상 등을 수상 하였다. 지역잡지 <갯마을>, 지역신문 <새너울>을 창간하여 편집주간과 논설주간으로 일한 바 있고, 향토문학지 <흙빛문학>과 <태안문학>, 소설전문지 <소설충청>을 창간히였다. 한국문인협회 초대 태안지부장, 한국예총 초대 태안지회장, 태안성당 총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충남소설가협회 회장,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 공동대표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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