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40%를 점유하는 성채
얼마 전 JTBC에서 방송된 후 유튜브에 걸린 영상이 하나 있다. 페이스북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영상인데, 울산의 한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60대 여성이 지난번 선거 때 투표를 했느냐, 누굴 찍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답변을 하는 모습이다.
1번을 찍었다고 한다. 왜 1번을 찍었느냐고 물으니, 자신이 대구 출신이라는 이유를 댄다. 앞으로도 계속 1번을 찍을 거냐고 물으니, ‘나라를 팔아먹어도’ 자신은 1번을 찍을 거라고 한다. 대구가 고향임을 재차 강조하며….
나라를 팔아먹어도 1번을 찍을 거라는 야무진 언성이 내 뇌리에서 오래도록 파장을 일으킨다. 그 60대 여인은 나라보다도 새누라당이, 박근혜 대통령이 더 중요하다는 본새다. 엄발난 콘크리트 조각임을 실감케 한다.
얼마 전 한때 정치인이었던 유시민 작가가 방송에서 한 말이 있다. 나라가 무너져도 새누리당을 찍어줄 큰크리트 지지층이 35%에 이른다는 발언이다. 그 후 2월 13일 더불어민주당 정은혜 부대변인이 자신의 트위터에 “새누리당은 51%만 있으면 된다. 나라를 팔아도 찍어줄 40%가 있기 때문에 그들과 약간의 지지자만 모으면 되겠죠. 대한민국을 반으로 자를 수 있는 이슈로 나누고 국민들을 싸우게 만든다. 그게 그들이 하고 있는 전략”이라고 썼다가 논란이 일자 해당 글을 삭제했다.
정은혜 부대변인은 “국민들을 서로 갈등하게 만드는 정치 환경을 비판하고자 쓴 글”이라며 “나라를 팔아도 40% 국민이 찍어준다는 것이 아니라 새누리당은 그렇게 생각한다고 쓰려 했던 것인데 의도와 달리 잘못 표현했다”고 해명했다. 어쨌거나 어떤 상황에서도 새누리당을 찍어줄 콘크리트 지지층이 40%에 이르는 현실을 명확히 짚어낸 셈이다.
그 40% 지지층은 너무도 견고하다. 그 콘크리트에 대한 집권세력의 믿음 또한 강고하다. 그 40%에 대한 믿음 때문에 집권세력의 오만과 독주, 난폭한 역주행이 자행된다. 그러다보니 40% 콘크리트 지지층은 대한민국의 명운을 좌지우지하는 성채 같은 형국이 되어 버렸다. 나라를 망하게도 할 수 있는 가공할 위력을 지녔음이 분명하다.
40% 콘크리트의 강고함
2월 15일(월) 오후 7시 광화문광장에서 거행된 ‘신종쿠데타, 신유신독재 타파를 위한 천주교 시국기도회’에서도 박근혜 정권 40% 콘크리트 지지율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미사를 주례한 살레시오수도회의 이준석 신부는 그리스도교의 40이라는 숫자가 갖는 의미를 설파하면서 박근혜 정권 40% 콘크리트 지지층을 연결 지어 논급하는 인상 깊은 강론을 했다.
“참으로 단단하고, 서글프고, 답답한 숫자입니다. 교회가 사순절을 지내는 이 시기 그 숫자는 더욱 아프게 우리 가슴을 파고듭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40은 광야의 메마름, 생명체가 살 수 없는 황무지, 악마의 유혹과 간계가 상존하는 곳, 목마름과 배고픔, 사나운 짐승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숫자입니다. 그래서 회피하고 싶고,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숫자입니다.”
이준석 신부는 콘크리트 40% 안의 국민들을 일상적으로 만난다고 했다. “왜 부자 아이들까지 학교에서 공짜로 밥을 주느냐? 정부에서 누리 과정 예산을 교육청에 줬으면 그대로 실행해야지 왜 돈을 더 달라고 생떼를 쓰느냐?”며 역정을 내는 어른들도 있다.
“복지가 많아지면 국민이 게을러진다. 성실히 벌어 먹고살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어린 손주가 딸린 50대 시간제 마트 여성근로자 자매도 있다. “나라님이 하시는 일 방해 말고 도와주어야 한다. 젊어서 부모를 흉탄에 잃고 얼마나 불쌍하냐”며 쌀 수매가를 인상하겠다던 공약 파기에는 분노도 하지 않고 자나 깨나 대통령 걱정만 하는 농촌의 어른들도 있다.
“우리 부모님도 징용 가셨다가 돌아가셨는데, 나라에서 알아서 협상 잘했으니 인제 그만 일본을 용서해 주자”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압박하는 ‘어머니봉사단’의 여인들도 40이라는 숫자 안에 갇혀 있는 부류다.
이준석 신부가 예로 든 그런 부류들 외로도, 내 주변에도 콘크리트 40% 안에 들어 있는 친구들과 교우들이 많다. 나 역시 40% 안에 들어 있는 콘크리트 조각들을 일상적으로 만나며 생활한다. 내 아내도 마찬가지다. 직장에서도, 친목모임에서도 40%에 포위되어 있는 형국이라는 말도 한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만나는 또래 교우 한 분은 ‘박근혜의 7시간’ 얘기를 들으면 지금도 발끈한다.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대통령의 7시간은 사생활에 속한다고 강변한다. 대통령도 사생활이 필요한데, 국민이 대통령의 사생활까지 시비를 하는 건 옳지 않다는 견해를 고수한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는 오로지 선박회사와 해경 탓이라고만 한다. 강고한 콘크리트 조각이다.
최근의 내 글 <박근혜 대통령의 패션 ‘애착’>(바로보기)을 읽은 중년의 자매 한 분은 일국의 대통령이 1년에 122벌의 새 옷을 입은 게 무슨 문제냐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금이 6·70년대 가난했던 시절도 아니고, 한류가 전 세계를 휩쓰는 이 시대에 국가 원수로서 외교 차원의 복식 예를 갖추는 것이므로 나무랄 수가 없다는 얘기였다.
대통령은 그 이름만으로도 ‘용의 날개’를 달고 있고, 검소할수록 더욱 빛이 나는 묘리도 지니고 있다는 내 글의 결론은 안중에도 없는 태도였다. 콘크리트 조각의 강고함이 더욱 도드라지는 모습이었다.
40%의 콘크리트는 분명히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특히 60대 연령층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지지난해 60대로 진입한 아내는 여고 동창 모임이나 친목 모임에 갔다 올 적마다 비애를 토로한다. 배웠다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콘크리트 같다며 한숨을 내쉬곤 한다.
껴안고 극복해야 할 대상 40%
현재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은 속죄와 회개의 시기인 사순절을 지내고 있다. 사순은 40일을 뜻한다. 사순절의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325년의 ‘니체아공의회’는 그 시대부터 이미 예수부활대축일 이전 40일 동안의 준비 기간이 있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사순절을 비롯하여 40이라는 숫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성서에는 40이라는 숫자와 관련된 사건이나 특별한 일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대개는 하느님께로부터 중요한 사명을 받거나 어떤 중대사를 준비하는 기간으로 40이라는 숫자가 결부되는 사건들이다.
구약시대 노아 홍수의 40일간의 정화 과정,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벗어나 약속의 땅으로 건너가는 40년 동안의 여정, 모세가 하느님과 함께 한 40일간의 체험, 예언자 엘리야의 40일 고행, 예수께서 광야에서 단식과 극기와 기도로 보낸 40일과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지상에 머무신 일 등등이 있다.
40이라는 숫자는 광야 또는 사막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광야 또는 사막은 하느님의 축복이 아예 없는 곳으로 느껴지는 장소다. 물이 귀하고, 풀과 나무도 드물어 도저히 사람이 거주할 수 없는 곳이다. 씨를 뿌릴 수도 없는 척박한 땅이다. 그곳에는 악귀들이 배회하고, 맹수와 독사와 전갈 등 해로운 동물들이 서식한다. 특히 모세 시대에 그랬듯이 온갖 불평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가혹한 공간이다.
하지만 광야는 배움과 극기의 장소다. 광야는 인간들이 침묵과 고독과 시련 속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곳이며, 어쩌면 가장 확실하게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고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기 전에 이 가공할 땅을 통과하게 하셨다. 이로써 시련의 광야는 하느님의 백성이 탄생하는 장소로 변모한다. 죽음의 땅이 생명의 땅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2월 15일 광화문광장 시국미사의 주례와 강론을 맡은 이준석 신부는 우리 앞에 40%의 콘크리트가 있다고 했다. “이스라엘 민족이 어느 정도 생존이 보장되었던 이집트를 떠나 광야에서의 40년이란 시간 안으로 힘차게 진입했던 것처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씩씩하게 광야로 가시어 40일간 머무셨던 것처럼 우리는 40이라는 숫자가 주는 두려움, 불편함, 메마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40이라는 숫자를 대면하고 용감하게 그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한결같은 마음으로 무능하고, 탐욕에 젖은 세력을 지지해 주는 우리 이웃들, 우리 형제·자매들에게로 나아감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마음을 열고, 그들 가슴 깊은 곳에 남아 있는 선한 의지와 상식을 일깨워 그 40이라는 숫자에서 탈출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저 단단한 40%의 이웃들이 변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들이 그 자리에 단단하게 머물러 있을 때 40이라는 숫자가 주는 메마름, 고통, 혼란, 유혹, 몰상식과 생명 파괴는 100이라는 숫자로 자라날지 모릅니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이웃들에게 나아갑시다. 그분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합시다. 싸우지 말고, 다정다감하고 유쾌하게, 즐거우면서도 감동적으로 그들의 마음을 녹입시다.”
광화문에서 다시 내 뜨락으로 돌아온 나는 이준석 신부의 강론 내용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탓에 40이라는 숫자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 40이라는 숫자는 우리 시대의 ‘극복의 대상’임을 다시금 뜨겁게 자각한다. 극복을 위해 더욱 지혜롭게 열정적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더불어 주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사순절과 또 40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좀 더 명확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더불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형제님과 자매님은 그리스도인으로서 40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다면 그 40은 무엇이며 어디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하는 40입니까? 아니면 콘크리트를 형성하고 있는 40입니까? 나라를 팔아도 찍어줄 그런 40입니까? 만약 그 콘크리트 안에 있다면, 생각의 문을 열고 그 40에서 벗어나십시오. 그래야 민주시민이 되고, 진실과 희망을 얻게 되고, 진정한 하느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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