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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수 신재식 인터뷰 : “신앙은 이성을, 이성은 신앙을 포용하면서...” 교회가 성장을 멈춘 이유, ‘비지성주의와 반과학주의’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리는 ‘주변부’여야 한다 김근수 2016-04-20 15:3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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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근수 편집장) 오늘 인터뷰는 호남신학대학교 신학과 신재식 교수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아퀴나스 : 신앙과 이성 사이에서」라는 책을 내셨는데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 (신재식 교수) 많은 개신교인들과 독자들은 ‘신앙’과 ‘이성’은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이 깊으면 비이성적, 비합리적인 것도 수용하고, 합리적‧이성적인 것을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신앙 안에 밀접하고 합리적인 측면들이 있고, 이성 안에서도 신앙과 관련된 믿음의 측면들이 상호관련 되어 있는데 개신교인들에게는 이러한 인식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신앙을 우선시 하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이성을 우선시하는 아퀴나스를 비교하지만, 기독교 전통 안에서 보자면 신앙은 이성을, 이성은 신앙을 포용하면서 마차의 바퀴처럼 동시에 굴러갑니다. 그런데 한쪽으로만 무게가 쏠린다면 비합리적·비이성적 신앙으로 왜곡 됩니다. 하느님을 바로 아는 것,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히 살아가는 것과 역사 속에서 신앙인, 사회인, 국민으로서 살아갈 때 신앙의 올바른 과정과 전개를 위해서 이성적·합리적인 측면이 중요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는 신앙이나 이성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고 적절한 균형을 갖고 있었어요. 저는 책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 전통이 갖고 있는 합리적인 측면을 강조해야만 오늘날 지나치게 비이성적·비합리적 신앙 몰입의 균형을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 중 합리적·이성적·지적인 측면은 하느님 형상에 따른 인간의 모습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것들이 기독교 신앙에서 신앙과 이성은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측면입니다. 


- 칸트는 이성이 잠에서 깨어나도록 하는 계몽을 강조했는데, 최근에는 너무 지나친 이성에 대한 회의가 있어요. 


▶ 계몽주의 이후 이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 우상화는 비판적으로 봅니다. 하지만 근대 계몽주의 이후에 지나치게 이성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감성적인 측면이나 다른 측면을 억압하거나 배제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한국 개신교 상황에서 이성에 대한 비판이나 비하 보다는 이성의 가치를 중요시하고 신앙 안에서 합리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한국 개신교에서의 계몽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000년의 역사 속에서 종교개혁 이후의 계몽주의적 전통까지 다 경험해온 서구 기독교나 다른 기독교에 비해서, 한국 개신교는 계몽주의를 거치지 않거나 계몽주의 이전의 기독교 상황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합리적 이성들이 강조되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한국 개신교나 가톨릭은 이성이 제대로 발동한 시기가 이미 지났을까요?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것이라고 보십니까?


▶ 이성이 발동되기 이전의 상황이라고 봅니다. 제가 신학대학 안에서 교육을 하다보면 한국 개신교의 지역교회는 프리모던(premodern)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이성시대를 넘어서 포스트모던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포스트모던시대를 살아가는 일반인이나 기독교인을 가르치고 함께 신앙생활을 해야 할 목회자를 양성하는 것은 철저하게 모던 방식인데, 그 콘텐츠는 프리모던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포스트모던시대에 포스트모던의 방법으로 포스트모던의 콘텐츠를 교육해야만 기독교가 더 나아질 거라 기대하지만, 여전히 모던 방식으로 프리모던의 내용을 강제 주입하고 있는 거죠.




한국 교회가 성장을 멈춘 중요한 이유는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대해 무관심한, 한국 교회 안에 만연하고 있는 비지성주의와 반과학주의


- 다음 질문입니다. 이성과 감성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진화생물학이나 인지과학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이 가진 감성이나 감정적인 측면은 보다 본래적이고 이성적 차원은 그 위에 얹혀 있습니다. 감성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서구 철학 전통에서 근대를 경험하면서 단순히 이성과 감정으로 분리되어있던 것이 아니라 원래는 ‘하나’인데, 인간의 인지과정이나 지적 활동, 인간 활동 등 총체적 활동의 특정 측면을 가리켜 ‘이성’이라고 이름 붙인 것뿐입니다. 또 다른 측면에는 ‘감성’이라고 이름 붙인 거죠.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보다 근원적이고 강력한 충동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감성입니다. 감성 이후에 이성적인 활동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 ‘한국 교회가 성장을 멈춘 아주 중요한 이유는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대해 무관심한 한국 교회 안에 만연하고 있는 비지성주의와 반과학주의’라고 밝히셨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 대부분의 기독교인, 특히 한국 개신교인들은 전근대에서 형성한 신학적 지식이나 교리를 기독교 신앙의 보편적·본질적인 진리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 안에서 유통되는 가르침의 내용들은 과학혁명 이전에 형성된 것들, 역사적으로는 과학혁명과 근대 계몽주의 이후에 개신교가 보여주었던 다양한 반응들 가운데, 특별히 근본주의적인 개신교입니다. 근대 자연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신앙생활에 있어서 합리적·이성적인 측면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던 신학 전통을 강조하는 신학의 흐름들이 한국 개신교에 들어와서 담론을 형성했습니다. 문제는 개신교가 지배집단 역할을 한 사회라면 주도적인 교리가 의무이거나 비판받지 않는 상황인데, 요즘처럼 다양한 종교 전통, 교파 전통이 다양한 통로로 유통되는 상황에서는 비판받고 있는 거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젊은 세대들이 공교육 과정을 통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현대 세계관, 과학 지식에 따른 것들과 교회 안 가르침들이 서로 동떨어져서 갈등이 생깁니다. 교회 안 비합리적·반과학적·비지성적인 신앙 태도와 그것을 계속 강요하는 상황에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개신교가 정체하거나 후퇴, 감소하는 첫 번째 이유는 개신교 리더십이 갖는 도덕적인 비율 문제가 매우 큽니다. 두 번째로 개신교 안에서 가르치는 교파주의적·반과학적·비지성적인 태도입니다. 


- 개신교에서는 진화론과의 공존에 대한 논의가 많이 이루어졌습니까?


▶ 한국 개신교 안에서 자연과학에 대한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로 목사님들이 종교, 기독교 신앙과 과학을 한꺼번에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교육의 기회가 없었습니다. 기독교와 과학의 관계를 포괄적인 측면에서 고민하고 가르쳐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이 없어도 저절로 교인들이 근대화 과정에 들어왔기 때문에 교인들을 목회하기도 바빴습니다. 전문적인 지식을 배울 기회가 없었고 종교과학이나 기독교과학문제가 일차적인 관심사가 아니었죠. 기독교와 과학, 신앙적으로 창조과학류의 근본주의적인 과학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교회에 들어왔는데, 이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올 수 있었던 건 이미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던 근본주의적인 형태의 신앙적 경향성에 과학을 수용하면서 기독교신학, 신앙, 성서의 내용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근대 이후 개신교도들이 근대과학이나 현대과학에 대해서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과학자라고 얘기한 기독교신앙인들이 신학적·신앙적·성서적으로 충분히 증명되고 성서의 내용이 과학적으로 증명된다고 말하니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거죠.


제가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 종교과학에 대한 과목이 간혹 개설됐지만 수강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들어와서 98년도부터 종교과학에 대한 과목들을 가르치기 시작할 때는 개신교 안에서 사용할만한 적절한 교재가 없어서 영어 텍스트로 수업했습니다. 지금은 상당수의 신학대학에서 현대과학을 받아들이고 포괄적인 관점에서 종교과학을 가르치는 과목들이 개설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여전히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의 입장을 반영한 창조과학류의 과학들을 여러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 자체가 주변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변부 사람들과 살았고 목회의 핵심이 주변부에 있었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리도 주변부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신앙과 정의의 관계’에 대한 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 한국 개신교는 해방 이후 과정에서 분열을 경험했습니다. 신사참배 문제로 고신교단이 분열해서 나갔고, 조선신학교 문제로 기장교단이, 후에 나온 장로교 안에서는 통합과 합동이 WCC문제와 에큐메니컬 운동 문제로 분열해서 나갔죠.


대부분 한국 개신교 교단들은 정교분리의 원칙을 군부억제로 삼아서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민주화 운동, 정치적인 문제, 사회정의 문제, 사회복음 문제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곳은 기독교장로회와 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일부였습니다. 한국 개신교 전체는 이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고 일부 극소수 개신교인들만이 관심 가졌습니다. 에큐메니컬 운동을 하는 분들은 사회정의문제, 사회복음문제가 중요하지만 대부분 개신교인들은 무관심하고 배울 기회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사회정의문제를 다루는 곳이 에큐메니컬 진영인데 신학대학 안에서 에큐메니컬 과목을 가르치는 학교가 몇 안 됩니다. 보수적인 개신교 학교 중 에큐메니컬 과목은 개설 자체가 불가능한 곳도 있습니다. 



- 최근 이정용 교수의 「마지널리티-다문화 시대의 신학」이라는 책에 옮긴이로 참여하셨는데요. 신학의 삶도 마지널리티지만 신학자 개인도 변방에 있는 것이 학문에 도움이 됩니까?


▶ ‘마지널리티 (Marginality)’라는 용어를 옮기는 문제가 중요했는데, 주변인, 변경, 경계 등 여러 한국말 중에서 가장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없어서 원제목인 마지널리티로 했습니다. 제가 배운 신학사에서 새로운 것은 늘 변두리에서 나왔어요. 관성처럼 느껴지지만 늘 중심부는 자신이 가지고 소유하고 있는 것을 지키고 확장시키기 위해 보수화될 수밖에 없었어요. 주변부는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중심부가 갖지 못한 문화나 경험들을 할 수 있어요. 기존의 것과 통합·융합할 수 있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기도 하고, 만들어 낼 수 있는 중요한 곳입니다. 그리고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늘 자신을 비울 수 있고, 비울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것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신학자는 주변부에 머무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 자체가 주변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변부 사람들과 살았고 목회의 핵심이 주변부에 있었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리도 주변부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에 마지널리티가 좀 더 소개됐다면 훨씬 좋은 방향으로 영향을 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한국에서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마지널리티 신학을 선포할 가능성은 없습니까?


▶ 대형교회가 갖는 장점을 다 포기한다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지널리티를 실천하려고 한다면 대형교회가 갖는 본질과 지향성 자체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대형교회 자체가 물적 속성을 강하게 갖고 있고, 물적 속성은 주변부에 있는 물질성을 안으로 끌어당기는 특성이 강하기 때문에 주변성으로 나아가기는 어렵습니다. 대형교회가 갖는 물적인 구성 자체를 해체시키지 않으면 주변성으로 나아가기 힘들죠. 


예언자로서의 예수가 갖던 기본적인 메시지들 중 기존의 체제, 가르침에 저항했던 메시지보다는 자신들의 체계를 유지하고 확대·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모습의 예수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 초대교회에서 예수에게 예언자라는 호칭은 주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에게 예언자라는 호칭을 주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 교회가 조직화·체계화되고 팽창하는 과정에서 예언자로서의 예수가 갖던 기본적인 메시지들 중 기존의 체제, 가르침에 저항했던 메시지보다는 자신들의 체계를 유지하고 확대·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모습의 예수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기독교에서 본래 예수가 갖던 운동성·현장성 대신에 조직화·체계화·교리화 속에서 예수라는 존재가 신이 되고, 우리 곁에 있는 분보다는 우러러 보는 대상으로 강화된 거죠. 


- 예수에게 예언자라는 칭호를 주지 않았다면, 교회도 예언자 정신을 놓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교회가 확대·재생산되거나 대형교회를 지향하고자 한다면, 소형교회라고 할지라도 대형교회의 속성과 정신을 갖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대형교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는 예수가 가르쳤던 예언자적·혁명적·비판적 측면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비판적·예언자적인 측면을 살펴보자면 기존에 갖고 있던 것들과 자리를 포기해야 하는데, 교회가 조직화 된 상황에서는 포기하거나 떠나고 싶어 하는 교인들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습니다. 


- 지금까지 선생님께서 공부한 분야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이제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따뜻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회적 관심사나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과거 권위적인 교황들의 모습과는 달라서,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종교사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몇 되지 않는 위대한 교황으로 평가받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대부분 종교들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줄어드는데 현재 교황이 영향력 감소에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 브레이크가 당분간 로마가톨릭교회가 영향력을 잃어가는 과정을 늦추거나, 현재의 영향력을 지속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개신교 대형교회가 갖는 순기능도 있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돈을 남기지 말고 다 쓰는 겁니다. 희년이 될 때마다 모든 재산을 환원하면 좋겠습니다.


- 개신교의 성도들을 관리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다단계 회사에서 직원을 관리하는 시스템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대다수의 교회들이 자체적으로 프로그램을 많이 만듭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에게 교회생활 외에 다른 생활을 할 여유를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교회 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교회생활의 대부분은 교회 자체를 위한 활동과 물적 투자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건전한 시민으로서 생각하거나 고민하게 하는 부분은 약한 편이죠.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교회 생활에 전념하도록 하는 것이 쉽게 목회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삶과 밖에서의 삶, 즉 건전한 시민과 국민으로서의 합리성과 비판적 성찰과 지성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게 하려면 목회자가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죠. 목회하는 입장에선 쉬운 길을 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죠. 


- 개신교의 원칙 중 하나로 정치와 종교의 분리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말할수록 정치와 결탁하는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는 미국 개신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미국 개신교 자체가 정교 분리를 주장해왔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정치와 교회가 분리된 문제와 개인이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정치적 발언을 하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정교 분리를 주장하는 많은 목사님들이 생각 밖으로 보수적인 입장입니다. 그러면서 정교 분리를 얘기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보수적인 정치 입장을 가지고 있는데 그에 대한 방패로 쓰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이 강하게 자신들의 정치적 판단과 생각을 표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정교분리를 얘기하면서 보수적·근본주의적인 신앙관과 친화력을 보수적인 정치적 입장에선 당연하게 생각하고,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는 발언은 정교분리에 위배된다고 말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 한국 그리스도교의 미래를 어떻게 보십니까?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종교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요?


▶ 가톨릭교회가 한국 사회를 이끌어갈 만한 추동력을 가지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몇 년 사이 한국 사회 수준은 후퇴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30년 전 더 뒤로 돌아갔습니다. 간접적인 방식이지만 체계적·조직적으로 민주화를 후퇴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교회와 가톨릭교회가 이 문제에 대해 적절한 발언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신교의 경우 대형교회는 기득권에 편입되어 기득권의 교회, 기득권의 집단이 됐기 때문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교회의 생존을 확대·재생산하는 과정 속에서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변화와 진보를 위한, 국민들을 위한 발언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돈과 하느님을 함께 섬기지 못한다는 겁니다. 종교 집단이 물적 토대가 많아지면 항상 돈에 온 정신이 집중되고 그 돈을 불리는 데에 에너지를 쓰지,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은 덜 하게 되죠. 목회자나 교회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돈을 주는 순간 교회는 망합니다. 본래의 정신을 잃고 타락합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와 종교인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개신교 대형교회가 갖는 순기능도 있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돈을 남기지 말고 다 쓰는 겁니다. 희년이 될 때마다 모든 재산을 환원하면 좋겠습니다. 이월금도 남기지 않아야 된다고 봅니다. 


- 네, 그렇군요. 오늘 이렇게 긴 시간동안 좋은 말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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