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천성적으로 ‘눈물’이 많은 편이다. 초등학생 시절 교실에서 국어책인지 도덕책인지를 읽던 도중 눈물을 흘려 놀림을 받았던 기억도 있다. 중학생 시절에도 단체 영화 관람을 하던 중 철철 눈물을 흘려 놀림가마리가 된 적이 있다. 그때 슬픈 장면을 보면서도 전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아이들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이상한 외로움 같은 것을 느꼈다.
드라마를 보거나 소설책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린 적들은 많다. 사회과학 서적이나 역사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린 적들도 있다. 최근에는 20여 년 전에 지은 소설(『작가와 문학』 제9호에 전반부가 발표된 중편소설 「바다 속 그리운 아빠」) 원고를 찾아 실로 21년 만에 읽어보면서 두어 번 휴지로 눈물을 닦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린 때는 1983년과 2000년, 2014년이었던 것 같다. 1983년 KBS TV의 ‘이산가족 찾기’ 방송으로 온 강토가 눈물바다를 이뤘을 때 나도 연일 눈물을 쏟으며 살았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뤄지는 장면과 ‘6․15공동선언’이 발표되는 장면을 보면서 내 온몸이 눈물 덩어리로 느껴지는 경험을 했다. 그때 나는 타고 난 눈물을 다 흘리는 줄 알았다.
하지만 눈물은 많이 남아 있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나는 또다시 매일을 눈물 속에서 살았다. 그때 나는 평생 동안 내 눈물주머니가 마르지 않을 것임을 예감했다. 그때의 그 예감대로 2014년 4월 16일 이후의 내 눈물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언제 이 눈물이 멎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오늘도 내 가슴에서 별빛처럼 빛나는 노란 리본은 과거완료형이 될 수 없는 내 눈물의 실체이며 상징이다.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하는 눈물도 여러 번 흘렸지만, 모두 한참 시간이 지난 뒤 광주 비극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흘리게 된 눈물이다. 1980년 당시에는 눈물을 흘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1980년과 관련하는 눈물은 ‘분노의 눈물’이기도 하다.
여기까지는 국가공동체와 관련하는, 즉 사회성을 지닌 눈물에 관한 이야기다. 이제부터는 지극히 사사로운 눈물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신장 기능을 잃다
2008년 태안 앞바다 원유유출 사고와 관련하는 큰 병고를 치르고 44일 만에 퇴원하면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을 쏟은 적이 있다. 그 병고 이전에는 대체로 젊은 모습이었다.
동창들 모임에 가면 내가 제일 젊다는 말을 듣곤 했다. 젊게 사는 비결이 뭐냐는 질문도 받았다. 특별한 비결은 없고, 늦게(나이 마흔에) 결혼하여 아직 아이들이 어린 덕이라는 말로 답하곤 했다.
그렇게 젊음을 유지했던 내가 44일 동안의 입원 치료를 마치고 환자복을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거울을 보는 순간, 모습이 폭삭 늙어 있었다. 이상한 행색의 노인이 서 있었다. 절로 눈물이 솟구쳤다. 하지만 그때는 길게 울지 않았다.
그때로부터 8년이 흐른 2016년 6월 20일, 다시 병상에서 눈물을 흘리게 됐다. 월남전 고엽제 후유증 환자들과 가족들이 많이 이용하는 서울 중앙보훈병원에서 복강에 도관을 넣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병실로 돌아와 복부에 노출되어 있는 연결관을 보자니 절로 눈물이 났다. 그것은 내가 신장 기능을 상실했다는 지울 수 없는 증거물이었다. 신장 기능을 잃어 앞으로 목숨을 부지하는 날까지(또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평생 동안 복부에 달고 살아야 할 물건이었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2008년 44일간의 병고를 치르고 퇴원할 때 내 신장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을 알게 된 연유로, 그동안 신장을 잃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왔다. 신장을 지키기 위해 갖가지 많은 공력과 시간과 비용을 투자했다. 하지만 세월 따라 몸이 전체적으로 늙어가면서 한계점에 도달해버리고 말았다.
그 모든 노력과 바램이 허사가 되어 버리고 복막투석을 하며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허망하고 슬프지 않을 수 없었다. 사는 게 뭔지, 꼭 이렇게 하며 살아야 하는지, 얼마나 더 살겠다고 이 고생을 하는지, 너무도 참담하고 번뇌가 무성하여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때 한 친구가 내게 ‘카톡’으로 보내준 노래가 있었다. 음악 전문가인 태안성당 출신 첫 사제의 형이 되는 친구였다. 그가 보내준 노래는 개신교 대규모 합창단이 부른 <본향을 향하네>라는 노래였다. 그 노래를 듣는 순간 다시 눈물이 솟구쳤다. 나는 심야의 병상에서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여러 번 그 노래를 틀었고, 거듭거듭 눈물을 흘렸다.
지금도 나는 틈틈이 그 노래를 듣곤 한다. 그 노래를 들을 적마다 눈물이 난다. 그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면 가슴이 정화되는 것 같은 신비한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그대로 내게 위안이 되고 어떤 ‘희망’이 된다.
과거 젊은 시절 베토벤의 제5번 교향곡 <운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는데, 합창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기는 이번이 처음이지 싶다. 아니, 언젠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눈물지은 적이 있었지 아마….
요즘 합창곡 <본향을 향하네>를 다시 들으며 눈물을 흘리면, 눈물은 내게 희망과 위안을 주고, 내 가슴을 정화해주는 것임을 절절히 실감하게 된다. 투석환자인 나는 노래를 들으면서도 눈물을 흘리는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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