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나이 68세, 황혼기에 접어든 시점에서 신장 기능을 잃었다. 그래서 투석환자가 됐다. 매일같이 ‘복막투석’을 하며 구차스럽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구차스럽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투지’ 같은 것도 지니게 된다. 매일 밤 ‘기계투석’을 시행할 때마다 이렇게라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활기차게 살아가리라 다짐하곤 한다.
투석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든 시각인 밤 10시 전후에 시작한다. 기계(컴퓨터)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대개 9시간 정도 걸린다. 다음날 아침 7시 전후에 종료가 돼서 뒤처리를 하게 된다.
기계와 내 복부 도관을 연결하는 선의 길이가 3미터가량 돼서 중간에 화장실도 갈 수 있고, 컴퓨터 앞에 앉을 수도 있다. 약물이 환자 몸에 주입될 때는 기계와 환자 몸의 높이가 거의 일정해야 한다. 약물 주입 때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 기계에서 알람 소리와 함께 ‘환자위치확인’ 표시가 뜬다.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다. 9시간 동안 행동반경이 안방 안으로 제한되긴 하지만, 방 안에서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잠도 충분히 잘 수 있고, 독서도 할 수 있다. 투석 중에도 스마트폰으로 세상 읽기도 하고, 지인들과 소통도 한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 감상도 할 수 있다.
대개는 아무 말썽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다음날 아침 7시 전후에 ‘치료종료’가 되지만, 가끔은 기계에서 에러가 발생하기도 한다. 수습이 되지 않아 심야나 이른 아침에 약물과 여러 가지 소모품을 대주는 회사의 직원간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받는 경우도 있다. 기계투석을 중단하고 다음날 아침 ‘손투석’으로 별도의 약물을 몸에 주입한 적도 있다. 그럴 경우를 대비하여 손투석용 약물도 늘 몇 개씩 비축해놓고 있다.
퇴원 후 며칠 동안은 손투석을 했다. 손투석은 기계투석에 비해 간편하고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지만, 여섯 시간 간격으로 하루 네 번씩 해야 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나는 아침 5시, 오전 11시, 오후 5시, 밤 11시로 정해놓고 투석을 실시했는데, 투석 시간이 금세 오곤 해서, 하루 종일 그 일에 매여 사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매월 10여 만 원의 기계사용료 비용발생을 무릅쓰고 기계투석을 선택했다. 자유롭게 활동하며 하루 생활을 마치고 나서 잠을 자는 시각에, 하루 한 번씩만 시행하는 기계투석이 처음에는 다소 번거롭기도 했지만, 사용법이 손에 익고 기계의 속성도 대략 알게 되니, 이제는 수월한 일상이 됐다.
신장이 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해주는 기계투석으로, 몸 안에서 매일 발생하는 노폐물과 잉여수분을 적절히 제거해내며 남은 인생을 잘 살아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갖게 됐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게 될지는 모르지만, 복막투석을 하늘의 배려로 여기며 살 수도 있을 것 같다.
노쇠했지만 지칠 줄 몰랐던 내 날개
매일같이 복막투석이라는 것을 시행하며 생활하니 하루 시간이 더 빨리 지나는 것 같다. 하루 네 번씩 하는 손투석보다 하루 한 번씩만 잠을 자는 밤 시간에 하는 기계투석이 훨씬 다행스럽긴 하지만, 역시 자유를 제약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어디 먼 곳을 가더라도 밤 9시 전후에는 반드시 집에 돌아와야 한다는 게 철칙처럼 돼버렸다.
그런 신세가 되고 보니 요즘 가장 그리운 곳이 서울 광화문광장이다. 내가 광화문광장을 마지막으로 간 날은 지난 5월 10일이었다. 조성만 열사를 추모하는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서였다(관련글보기). 그때로부터 벌써 석 달이 지났다. 무려 석 달 동안이나 나는 광화문광장에 가지 못한 셈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갈 수 없게 됐다.
가장 아쉽고 섭섭한 일이 서울 광화문광장에 가지 못하는 일이다. 내가 서울에서 사는 처지라면 광화문광장에 가는 일이 전혀 어렵지 않을 테지만, 충남 태안에서 사는 처지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차를 가지고 가서 저녁 7시 시국미사에 참례한 다음 곧바로 돌아와서 11시 이후에 투석을 시작할 수도 있지만, 그건 아무래도 무리가 될 것 같다.
민주주의의 숨결이 뜨겁게 생동하는 광화문광장 풍경이 사무치도록 그립다. 매주 월요일 저녁에 거행되는 ‘신종 쿠데타․신유신독재 타파를 위한 시국미사’, 매주 수요일 저녁에 거행되는 ‘세월호 희생자 304명을 기억하는 미사’ 풍경이 너무도 그립다. 내가 무수히 참례했던 미사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광화문광장 미사에 참례할 때마다 맨 앞자리에 앉곤 했다. 그런데 맨 앞자리에 내가 없으니 너무 쉽게 표가 난다는 말도 들린다.
2009년과 2010년의 ‘용산미사(용산참사 현장에서 매일 거행된 생명평화미사)’에는 몇 번 참례한 것으로 그쳤지만, 2010년 10월부터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매주 월요일 저녁 ‘4대강파괴공사 중단을 위한 생명평화미사’가 시작되면서 나의 매주 월요일 오후 서울나들이도 시작됐다. 나는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서울을 다녔다.
여의도 거리미사는 이듬해인 2011년 11월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 2012년 7월 1일부터는 서울 대한문광장에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생명평화미사’가 봉헌되기 시작했다. 나는 1년 동안 지속된 ‘대한문미사’에도 빠짐없이 참례했다. 매주 월요일 저녁 대한문광장에 가서 미사 전의 묵주기도 주송 봉사를 하곤 했다.
2013년에는 제18대 대선의 불법 문제가 크게 부각됐다. 불법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민주회복을 열망하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미사가 2013년 11월 23일 저녁 군산 수송동성당에서 거행된 것을 시작으로 전국 각 교구와 수도회 성당에서 거의 매주 시국미사가 봉헌됐다. 나는 시국미사가 봉헌되는 전국 각지의 성당에 원근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서 미사에 참례하곤 했다.
전주교구(군산 수송동 성당, 2013년 11월 23일), 대전교구(대전 봉산동성당, 2013년 12월 30일), 수원교구(화성시 기산성당, 2014년 1월 6일), 마산교구(거제 고현성당, 2014년 1월 27일), 수도회연합회(서강대 예수회센타, 2014년 2월 3일), 광주교구(광주남동 5.18기념성당, 2014년 2월 10일), 원주교구(원주 우산동성당, 2014년 2월 17일), 부산교구(부산 대연성당, 2014년 2월 24일), 인천교구(부평1동성당, 2014년 3월 10일), 전주교구(전주 전동성당, 2014년 3월 24일), 의정부교구(의정부주교좌성당, 2014년 4월 2일)
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미사 덕분에 나는 전국의 많은 성당들을 순례할 수 있었고, 수십 명의 사제들이 공동 집전하는 미사에 참례할 수 있었다. 평신도로서 나만큼 전국 각지의 성당에서 미사를 지내고, 수많은 사제들과 알고 지내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이후에는 대한문광장과 서울광장, 광화문광장 미사가 더욱 빈번해졌고, 내 발걸음도 더욱 바빠졌다. 나는 대한문광장과 서울광장 미사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시를 낭송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더욱 그 시절이 그립다. 용산, 여의도, 대한문광장, 서울광장이 그립고, 광화문광장이 그립다. 오늘도 매주 시국미사가 거행되고 있는 광화문광장에 가지 못하는 것이 너무도 안타깝다. 매일매일 복막투석을 해야 하는 신세가 못내 슬프다.
광화문광장에 몸은 갈 수 없으나, 오늘도 ‘마음’으로 간다
투석 환자가 되면서 많은 것을 잃게 됐다. 전에는 가족과 함께 야구장에 가서 야구 구경을 즐기곤 했다. 대전구장, 잠실구장, 목동구장, 수원구장 등을 가서 ‘한화’ 야구를 보곤 했다. 또 천안 유관순체육관에 가서 배구경기도 보곤 했다.
가족과 함께 경기장 관람석에 앉아서 음식을 먹는 재미, 경기장의 터질 듯한 응원 열기를 접하는 재미는 각별했다. 경기장 관람석에 앉아 있으면 운동선수였던 내 젊은 시절이 생각나기도 했고, 나이를 잊고 젊은이들과 동화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행복’은 다시 맛볼 수 없게 됐다.
가족과 함께 서울 ‘예술의 전당’에 가서 교향악단의 정기연주회를 감상하기도 했다. 교향악단의 연주를 볼 때마다 지휘자가 가장 부럽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절묘한 화음의 세계가 너무도 아름다워 이상한 슬픔 속으로 빠져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음악당에 가서 화음의 세계에 빠져드는 행복도 먼 추억이 돼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나는 경기장 관람석에서도, 또 음악당 관람석에서도 시국미사가 봉헌되는 거리와 광장 풍경을 떠올리곤 했다. 가족들에게 경기장과 음악당만 알고 민주주의를 뜨겁게 소망하는 그 ‘현장’들을 까맣게 모르고 산다면, 경기장과 음악당에 앉아 있는 것은 그것 자체로 죄가 될 수 있음을 일깨우곤 했다. 그래서 나는 과거 뜨겁게 사랑했던 그 ‘현장’들에 다시 가지 못하게 된 처지가 오늘 더욱 가슴 아픈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광화문광장의 모든 상황을 집에 앉아서도 훤히 보고 있는 사람이다. 비록 몸은 그곳에 가지 못하지만 늘 기도로 ‘동행의 삶’을 살고 있다. 나는 하느님을 믿고 기도를 하는 사람이기에 오늘도 기도로 광화문광장에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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