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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독립 운동은 복음정신 실행한 예수운동”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신성국 신부 인터뷰 염은경 2017-03-23 20:3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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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서울 용산구에 있는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신성국 신부를 만났다. 신성국 신부는 안중근 의사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23년째 활동 중이며 현재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 지난 21일, 안중근 의사 순국 107주기 추모제를 앞두고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신성국 신부를 만나 인터뷰했다.ⓒ 곽찬


- (기자) 오는 3월 26일이 안중근 의사 순국 107주년이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는 안중근 정신 계승 사업을 주도적으로 하는 단체인데, 우리가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신성국 신부) 우리는 안중근을 ‘의사’라고 부른다. 의사라는 사전적 의미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의로운 뜻을 품고 활동한 사람’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100년 전부터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혼란과 갈등 상황은 ‘정의로움과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 뒤죽박죽되었기 때문이다. 가치관이 전도된 시대에 안중근 의사는 정의의 표본으로 제시될 수 있는 인물이다. 파면당하고 쫓겨난 박근혜 정권은 이 나라의 정의를 파탄내고 불의가 판치는 세상을 만들었다. 국가적 불행이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다시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과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일이다. 이것이 안중근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일이다.


- 안중근 의사가 온 몸을 다해 추구한 '정의'는 무엇인가?


 안중근 의사의 ‘정의’는 ‘천명’을 따르는 길이었다. 천명은 하늘의뜻을 받드는 것이다. 하늘의 뜻을 내 안에 바로 세우는 것을 말한다. 안중근 의사가 남긴 유묵이라든지 시호 같은 것을 보면 천(天)자가 많이 나온다. 가령 경천(敬天)이란 글자도 남기셨다. 하느님을 공경하고 따른다. 그분이 독립운동 할 때 손가락 중에 하나를 잘랐고, 이를 ‘단지동맹(斷指同盟)’이라고 말하는데 본래는 ‘정천동맹(正天同盟)’이라고 한다. ‘하늘의 뜻을 올바로 세우자’,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칠 것을 결의 하면서 동맹을 맺은 게 바로 단지동맹, 정천동맹이다. 


이처럼 안중근 의사는 하늘의 뜻을 받들며 살아갔고, 이때 하늘의 뜻은 ‘인간에 대한 존엄성’이었다. 우리 인간 하나하나가 하느님으로부터 존재했고, 하느님의 생명이다. 그 하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선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중근 의사의 애국 독립 운동 바탕에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가치를 품고 있다.


우리는 ‘애국’이라는 말을 좀 왜곡시켜서 ‘국가를 사랑 한다’는 뜻으로 사용하는데 그 본 뜻은 국가 안에 있는 ‘국민을 사랑하는 것’이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애국이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순국선열들은 한편으로 순교자들이다. 또 순교자들은 한편으로 순국자다. 공통분모가 ‘인간’에게 있다. 순국자들은 자기 국민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고, 순교자들은 하느님이 주신 천명을 따르다가 순교했으니 그것도 인간을 위해서 죽은 것이다. 인간이라는 공통분모 안에 순국과 순교가 함께 섞여있다. 그래서 안중근 의사는 순국한 애국지사면서 동시에 가톨릭으로 말하면 순교자로서 살다 가신 분이다. 


- 안중근 토마스는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후에 황해도 지역의 선교사로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의 선교 활동과 신앙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하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신지 올해로 107년이 됐다. 100년이 넘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가톨릭 안에서 안중근에 대한 소개나 이해가 부족하다. 안중근 의사의 신앙생활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안중근 의사는 17살 때, 토마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됐다. 그 당시는 박해시대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파리외방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진출할 때다. 황해도 지방에도 선교사들이 들어와 활동을 하는데 안 의사 집안전체가 세례를 받고 독실한 신심활동을 한다. 신자인 안중근은 프랑스 외방 선교사들의 사목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황해도 지역의 평신도 선교사로 8년간 활동했고, 유명한 선교사였다. 복음 선포에 열성을 다한 모범적인 선교사였다. 


황해도 지역의 천주교 기록을 보면 신자 안 의사가 얼마나 혼신을 다해서 선교활동을 했는지 다 기록돼 있다. 황해도 지역에서 천주교신자 증가율이 한 해 600~800명이 됐다. 다른 지역에선 박해시대의 영향 때문에 천주교 입교가 잘 안 됐다. 그런데도 황해도 지역은 예외적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 남포공원 안중근 유적비(사진제공=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선교사 안중근의 활동이 열매 맺는 대목이기도 하다. 8년간 활동 했으니 상당히 긴 시간동안 선교활동에 전념했다. 안 의사의 직업을 쓰라하면, 애국지사 전에 가톨릭 선교사를 써야할 것이다. 


또 한 가지, 안중근 의사의 신심에 대한 일화가 있다. 여순 감옥에서 남겼던 글들을 엮은 책이 바로 이「안응칠 역사」다. 그분의 자서전인데 앞부분은 대부분 가톨릭교리를 기술하고 있다. 아무 참고 서적도 없이 혼자서 감옥 안에서 쓴 것이다. 천주교 교리에 대해 얼마나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는지 아주 일목요연하게 교리를 기술했다. 안 의사는 ‘주교요지’나 ‘상재상서’ 등 그 당시 천주교 교리책들을 이미 모두 이해하고 그것을 그것을 바탕으로 선교활동을 했다. 


끝으로, 우리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안중근 의사는 가톨릭교회의 발전을 위해 많은 구상을 했었다. 당시 서울교구장 뮈텔 주교를 찾아가서 ‘가톨릭 교육기관’, 가톨릭대학교를 설립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교육기관을 운영하는 해외의 좋은 수도회를 초빙해서 가톨릭 대학을 세우고 평신도 지도자를 양성하면 가톨릭교회 발전에 좋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또, 안 의사는 공과대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과학 분야의 산업발전이 일어나고 있으니 우리 가톨릭교회도 할 수 있다면서 공과대학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뮈텔주교가 이를 거절한다. 안 의사는 오히려 성직자들보다 더 교회에 대해 고민하고 사랑했던 진정한 가톨릭인물 이었다고 생각한다. 


- 나라가 위기에 처하고 일본의 침탈에 맞서 싸운 안 의사의 독립 저항 운동에 특색이 있다면 무엇을 들 수 있는가?


 안중근 의사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는데 조상대대로 양반 부호 가문이었다. 일제 강점기가 들어서면서 고관대작들, 양반 부호들은 신분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독립 운동에 소극적이거나 일제에 협력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는 '을사늑약'을 맺고 일본이 침탈을 하니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집안의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와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독립 운동을 위해 헌납했다. 민족 학교도 설립하고, 국채보상운동에 가담하고, 무장 투쟁을 위한 군자금으로 활용했다. 개인의 욕심을 다 내려놓았다. 


그분이 남긴 유묵에 ‘견리사의견위수명’이라는 글자가 있다. ‘이익을 보거든 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를 먼저 실천하신 분이다. 그분의 독립 운동은 예수님처럼 자신을 온전히 던지고 희생한, 복음이 그대로 담겨있다. 그래서 그분의 독립 운동은 복음정신을 그대로 실행한 예수 운동이었다.


- 안중근 의사의 독립 저항 운동이 단순히 애국 운동을 넘어선 ‘복음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김수환 추기경께서 “안중근 의사는 진정한 가톨릭 신자였다, 의거의 모든 바탕에는 가톨릭 신앙이 스며들어있다”고 말씀하셨다. 조선후기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 전쟁이 많았다. 우선 러일전쟁(1904년)과 청일전쟁을 겪었는데 청일전쟁을 겪을 때 안중근 의사가 십대 중반이었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보면서 생명의 존엄을 깊이 생각한다. 안중근 의사의 바탕에는 인간 생명을 지켜야한다는 십계명 사상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고, 그것이 독립운동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분의 ‘동양평화론’을 보면 일본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이 없었다. 인간생명을 존엄히 여기다 보니 한국인이나 일본인이나 중국인이나 다 똑같이 하느님 안에서 생겨난 인간들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조선을 침략하고 수많은 조선 사람들을 학살하는 침략자들에 대한 저항과 국민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일본을 잘못 이끄는 이토 히로부미 같은 불의한 지도자들의 범죄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한 것이다.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나 복수심 같은 것은 없었다는 사실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안중근은 복음 정신에 충실한 인물이었고, 성서의 기본 정신인 ‘생명’과 ‘평화’에 대한 신념이 강한 분이었다.


▲ 안중근 의사가 독립계몽운동을 위해 설립한 삼흥학교, 현재는 남흥중학교로 이름이 변경됐다. (사진제공=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 안중근 의사가 처형당할 때, 수의에서 '예수님 상본'과 '가족사진'이 발견됐다.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안중근 의사를 생각하면 마음에 감동도 있고 짠하다. 그분의 마지막 사형과 순국 장면이 예수님과 오버랩 되는 것이 많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나라를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또 인간의 존엄성과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분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같이 연상 된다. 마지막 처형을 당하고 나서 수의 안에서 발견된 두 개의 사진이 예수님의 상본 그리고 가족사진이다. 


안 의사는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 4년 동안 가족을 못 만났다. 그 당시 독립운동은 해외, 주로 러시아 연해주지방과 중국 상해지방에서 했는데 어린 자녀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겠는가. 아빠로서 자녀들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지만, ‘민족’이라는 또 하나의 가족, 짓밟히고 빼앗기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이 내 형제고, 내 어머니고, 내 자매들이었다. 내 혈육만 생각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가족을 생각했던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예수님을 알게된 후 일대기가 새롭게 전환된다. 큰 부호집안이고 양반이다 보니 음주가무도 즐기고 호방한 시골청년이었다고 스스로 고백했다. 자기의 삶을 고백하고 신자가 되면서 세속적인 즐거움이나 생활 습관을 바꿔서 예수님께 향하는 삶을 살게 되는데 안중근 의사는 예수님을 품에 안고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사랑하고,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뜻을 잘 구현할 수 있을까를 고민 하면서 살았던 분이다. 그래서 예수님 상본을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안중근을 사람을 죽인 살인자로 규정하여 파문당한 인물로 취급해왔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일제 강점기 때 가톨릭 지도부는 일본 총독부와 친분이 두터웠다. 조선 총독부에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표하고 실제로 협조를 많이 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은 당시 가톨릭 지도부 입장에서는 매우 곤란한 일이었다. 일본사람들이 얘기하듯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고, 살인자로 여겼다. 특히 뮈텔주교나 프랑스 선교사들은 그 당시 이토 히로부미와 아주 가까운 사이었다. 이토가 자기 생일파티에도 초대하고 서로 교류가 잦았다. 친분이 두터웠던 사람을 죽였으니 안중근 의사에 대한 평가를 좋게 할 수 없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하얼빈 의거에 대해 "가톨릭교리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이미 말씀하셨다. 교리에 보면 '상황윤리'라는 게 있다. 전쟁 중이나 부당한 폭력이 장기화 될 때는 거기에 정당방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긴다. 


안중근 의사에게 적용된 살인자라는 누명은 가톨릭 교리적으로도 어긋난다. 그 당시 상황을 보면 1905년부터 시작된 을사늑약으로 일본이 강제침탈 해왔으니 결국 투쟁할 수밖에 없었고 국가를 지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일본법정에서 왜 이토를 죽였냐고 묻자 안중근 의사가, “나는 대한독립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군인이다. 나는 전쟁 중에 적 장군을 처단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군인으로서 이 행위를 한 것이다. 적들과의 전투 중에 일어난 사건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15가지의 죄악을 범했다. 그가 통감으로 있을 때 십만 명을 죽인다. 독립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을 이토가 다 사형시킨다. 수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더 이상 죽음을 막기 위해서는 이토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 가톨릭교회가 2000년에 과거사 반성문을 냈다. 


“우리 교회는 열강의 침략과 일제의 식민 통치로 민족이 고통을 당하던 시기에 교회의 안녕을 보장받고자 정교 분리를 이유로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제재하기도 하였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2000년 12월 3일 대림절) 


바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안중근 의사에 대해 살인자라는 낙인을 찍는 것은 엄청난 모순 이라고 생각한다.


- 17년 전, 한국 천주교회는 과거사 반성문을 통해 참회하고 쇄신하겠다는 의지를 선언했다. 과연 그것을 얼마나 이행하고 있다고 보는가?


 반성문에 진정성이 있으려면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것이 실천되지 않으면 휴지조각에 불과하다. 지금 박근혜 정권을 보면 국정을 농단하고 국민들을 불행에 빠지도록 했다. 불의가 판치고 정의는 실종된 이 같은 상황에서 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돌아보아야 한다. 17년 전 과거사 반성문을 내고 ‘쇄신하겠다, 참회 하겠다’고 했지만 정말 교회가 그렇게 했더라면 박근혜 정권 같은 국정 농단 세력이 국민을 탄압하고 민족을 파탄 내는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일본 주교회의에서는 1995년, 우리보다 5년 일찍 반성문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어떤 역사적인 범죄를 저질렀는지 구체적인 사실들을 책으로 묶어 일본 신자들에게 배포했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책인데 보면서 참 놀랬다. 진정한 반, 진정한 참회를 그 책을 통해서 봤다. 그런데 우리 한국 가톨릭은 신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사실을 반성해야 할지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는 알려주지 않고 추상적인 언어로 뭉뚱그려서 '일제강점기 때 민족과 함께하지 못 했다'고만 했다. 


반성문에 보면, “우리는 광복 이후 전개된 세계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빚어진 분단 상황에 극복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에 적극적이지 못하고 소홀히 한 점을 반성하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마음아파 합니다” 라면서 분단문제를 얘기한다. 우리는 아직도 분단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럼 17년 동안 분단극복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는지 반성해야한다. 현재 미국 트럼프 시대, 사드가 들어온다고 해서 북한과 중국이 여러 갈등을 겪고 있는데 교회가 한목소리로 사드를 반대하고 있는가. 

 

교회가 과거사 반성을 제대로 했다면 안중근 의사를 시복 시성해야 한다. ‘우리 신앙인의 모델이시다, 우리 신자들도 안중근 의사를 본 받아서 민족 고통에 동참해야 한다’고 상징적으로 내세워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교회는 안중근 의사에 관심도 없다. 이미 민족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분이기에 교회가 아니더라도 이미 하느님께서 아들로서 받아주었으니 위안을 삼고 있다. 



- 안중근기념사업회에서 안중근 의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가?


 기념사업회가 설립된 지는 얼마 안 됐다. 2000년도 즈음에 시작해서 17년 정도 됐는데 ‘천주교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잘 계승하자’ ‘신앙인으로서의 안중근, 평화의 정신을 계승하자’는 뜻에서 사단법인이 만들어졌다. 다양한 활동을 하는데 주로 안중근 의사 일대기에 중요한 사건들을 기념하고 있다. 우선 매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를 기념해 직접 현장에 가서 남과 북 공동행사를 한다. 남북통일에 길도 같이 열어가고 교류도 한다. 매년 3월 26일 순국일에는 안중근 허묘가 있는 효창공원에서 순국 추모행사를 한다. 올해도 준비 중이다.


분단극복을 위한 남북교류사업도 많이 하고 있다. 남북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을 17년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안 의사의 고향이 황해도이기 때문에 북한에서도 ‘안중근 열사’로 추앙한다. 안중근 의사를 매개로 남측과 북측이 서로 만나고 있다. 


또, 안중근에 대한 연구작업을 한다. 안중근 의사 자료집도 내고 학술 심포지엄도 하고, 안 의사와 관계된 해외자료 뿐만 아니라 각종 언론, 재판자료와 같은 자료들을 수집하고 연구 분석해서 자료집을 냈다. 현재 21권정도 된다. 


「안응칠 역사」가 안중근 의사 자서전인데 안중근 의사의 삶이 생생하게 기록된 자서전이다. 기념사업회 한정판으로 1000부 우선 만들었다. 필요한 분들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사무실로 연락하면 된다. 


- 이번 안중근 의사 순국 107주기 추모제에서 '안중근 의사 생가 복원식' 선언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취지는 무엇인가?


▲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에 있는 안중근 의사 집터. (사진제공=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안중근 의사는 황해도 해주와 신천군 청계동에 생가가 있다. 생가 부근에는 청계동 성당터도 있다. 우리 기념사업회가 2012년도에 북한을 방문하여 조선가톨릭 협회와 함께 생가와 청계동 성당 복원 사업을 추진하기로 협의하고 왔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면서 남북 관계가 파탄 나고, 교류 지원사업이 끊기면서 복원 사업이 중단된 상태였다. 안중근을 통한 남북 관계 개선과 통일 운동이 다시 전개돼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생가 복원 사업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고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러기 위해선 정권교체가 선행되어야 한다. 


1995년부터 안중근 의사 계승운동을 시작했는데 벌써 23년 정도 됐다. 외롭고 힘든 지난한 과정이었지만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니 지치지 않고 지금도 꿋꿋하게 이어오고 있다. 2017년은 국가적 운명이 갈리는 중요한 시기다. 어떤 사람들은 100년 만에 돌아온 기회라 하는데 나는 1000년 만에 돌아온 기회라고 본다. 이 중대한 시기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안중근 의사의 정의를 따라서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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