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여의 긴 투쟁을 끝으로 지난 8월 27일, 드디어 용산 화상경마도박장 폐쇄 협약식을 갖고 올해 말로 경마장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현장에서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자리를 지켜낸 성심여자중고등학교 교장 김율옥 수녀를 만나 그간의 여정과 오늘의 심정을 들어봤다.
“제가 2013년 3월에 성심여자중고등학교 교장이 됐습니다. (화상경마장)건물이 수녀원 공동체 방에서 너무 잘 보였어요. 처음에는 ‘용산에 멋있는 건물이 생겼구나, 지역이 세련되게 바뀌려나 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건물 지상 18층, 지하 7층 전체가 화상경마도박장이라고 해서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 김율옥 수녀
용산 화상경마장은 주택밀집지역, 그것도 성심여중고 학교 앞에서 불과 215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았다. 주민들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지어진 괴물 같은 건물을 앞에 두고 학부모와 지역주민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주말동안 서울과 부산, 제주 세 군데 오프라인 경주장에서 말이 뜁니다. 그걸 화상으로 중계 해주고 배팅을 하는 것이죠. 세 군데서 매일 11~16회 정도 말이 뛰고 전국에 화상경마장이 30군데가 넘으니까 한 번 말이 뛸 때마다 몇 백 억 짜리 도박경기가 되는 것이죠.
주택가 밀집지역, 더구나 학교 앞에 화상경마도박장이 들어선다고 하니 학부모와 주민들이 모여서 2013년 5월 주민대책위원회를 만들고 반대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청와대 게시판에 성심여자중학교 2학년 학생이 ‘제발 봐주세요!’라면서 민원을 올리기도 대책위 대표가 한국마사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마사회의 부당함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반대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전혀 움직임이 없으니까 2014년 1월에 천막을 치고 천막노숙농성을 시작했습니다. 그 와중에 마사회는 기어이 6월에 화상경마장 기습개장을 했습니다. 그러고선 계속 버티기죠. 우리가 기자회견도 하고 아이들이 청와대, 국회에 가서 청원하고 그랬는데 나중에 보니 소용없는 일이란 걸 알았습니다.
저희는 사실 처음부터 ‘폐쇄’가 아니면 답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건물을 마사회가 가지고 있으면 언제든지 화상경마장으로 다시 들어올 수 있고, 주변 환경이 오염되는 것은 시간문제니까요.
상처받고 힘든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많은 분들이 함께 해 주셔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서울시장이 대여섯 번 오시고 교육청에서도 지지해주고 참여연대에서 꾸준히 도와주시고, 국민TV, 주권방송, TBS 등 많은 단체들이 도와주셨습니다.” - 김율옥 수녀
“그동안 수녀님께서는
‘정치교장’이라며 여러 모함과
비난을 겪으셨습니다.
어떻게 5년의 시간을 버틸 수 있었나요?”
“그런 비난과 모함이 힘들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지난해가 어려웠습니다. 제가 교장이 되기 전에 특강을 하나 들었는데 경희대 김민웅 교수의 강의가 마음에 남았었습니다. 「동화독법」이란 책을 쓰셨는데 여러 동화를 설명하면서 우리가 초등학교 때 늘 듣던 양치기 소년이야기를 새롭게 해석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들어온 이야기는 소년이 양을 지키다 심심하니까 늑대가 나타났다고 거짓말을 해서 주민들이 달려왔다가 돌아가고, 두 번째 또 그렇게 거짓말을 해서 주민들이 속았습니다. 그러다 세 번째에는 주민들이 오지 않죠.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거짓말 하지 말라’는 교훈을 얻는데 김민웅 교수님은 ‘그 양이 누구의 양인가’라고 새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양은 주민들이 맡긴 주민들의 양이잖아요. 양치기와 주민들의 사이에 계약이 있었다는 겁니다. ‘양이 위험해지면 우리가 너를 도우러 올게’, 이 계약에서 오작동이 생겼어요.
늑대가 오지 않았음에도 소리를 쳤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죠. 주민들은 그 원인을 살피지 않고 마음대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를 땐 가서 돕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는 거예요. 늑대가 나타났을 때 결국 누구를 물어 죽였을 거냐는 거죠.
제가 교장이 되고 이 이야기를 생각하며 싸움을 시작했는데,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게 무엇인지 그 본질을 생각했습니다. ‘생명을 지키는 일’, 화상경마장이 들어왔을 때 생기게 될 일들을 생각하면 우리가 할 일이 분명해졌습니다.” - 김율옥 수녀
“우리는 이 싸움을 멈출 수 없습니다. 지칠 수도 없습니다. 무너지는 무릎을 바로세우고 넘어지는 이를 일으켜 세우며 화상경마도박장이 우리 동네를 떠나도록, 더 이상 지역을 황폐하게 하지 않도록 우리의 힘을 모아 싸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지켜야 할 생명이 있고, 아직 사랑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 김율옥 수녀
투쟁 600일 기념 문화제에서 수녀님이 쓴 편지입니다. 기억하십니까?
"저희 학부모 대표들 중에는 아이들이 ‘너희 엄마는 빨갱이야’ 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어른들은 견딜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이들은 깊은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학부모님들께서 스스로 결정하실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랬더니 ‘여기서 멈추면 후회할 것 같다’면서 계속 해주셨습니다. 그런 시간들을 몇 번이나 보냈지요.
주변 지역 본당을 돌면서 서명을 받기도 했는데 어떤 신부님들은 힘들다면서 이제 오지 말라고 하는 분들도 계셨어요. 도박의 문제점들을 설명했는데 사실 경마장, 마사회와 관련해서 이익을 보는 사람들도 신자들 중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 본당 안에서 분열이 생긴다는 얘기셨죠.
천막농성은 시작했고 미사는 해야 하니 남자수도회사도생활단에 도움을 청했어요. 마침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이 예수회 김정대 신부님이셨어요. 그래서 예수회 신부님들이 주로 오셨고 빈민사목 팀에서 같이 오시고 의정부 정평위에서도 오시고 해서 미사를 지내왔습니다.
저야 학교장으로서 버텨야하는 것도 있고 신앙으로 버티는 힘도 있었지만, 주민대책위의 정방 대표는 꿋꿋하게 버티면서 큰일을 해줬습니다. 정방 대표는 신자가 아님에도 기도회를 같이 하고 미사도 지내고 하면서 필요한 때에 필요한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을 매우 신기하게 생각했어요. 제가 ‘야훼이레’라고 얘기하면 ‘수녀님 그거 미신과 별로 차이가 없다’고 하면서 웃었어요.
2014년에는 세월호 사고가 있었죠. 2015년에는 메르스 사태가 있었고, 2016년엔 가습기 사고 문제가 커지면서 우리 엄마들도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졌습니다. 지역사회와 연대하고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양해진 것은 그래도 우리가 이 싸움을 통해 얻은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 김율옥 수녀
“이런 투쟁을 할 때는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기고 지는 싸움을 전제로 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기운이 빠지고 자금은 떨어지고 동시에 사람들도 나가떨어집니다. 수녀님이 하셨던 것처럼, 아이들과 생명 그리고 교육환경과 지역사회 환경을 지키기 위한 마음이 우리 안에 생명력으로 작용해서 투쟁의 시간을 버티고 이어갈 수 있다고 봅니다.
또 한 가지, 외롭고 막막했던 순간에 꼭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계기가 되곤 합니다.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면서 그 안에서 더욱 굳건한 믿음이 생기고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는 체험을 하기도 하지요. 긴 시간, 수녀님께서 이 투쟁의 현장에서 버팀목처럼 딱 중심을 잡고 있었던 것이 참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 신성국 신부
15년째 KAL858기 사고의 진실을 파헤치고 있는 청주교구 신성국 신부는 김율옥 수녀의 용산 투쟁여정을 함께 돌아보며, 긴 시간 중심을 잡고 자리를 지켰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승리하게 된 데는 주민들이 계속 버틴 힘이 있었고 그것들을 지지하는 힘, 촛불혁명이 있었다고 봅니다. 정권이 바뀔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촛불혁명의 힘이었잖아요. 그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시민운동하고, 노동조합 투쟁하고 협동조합을 만들면서 노력했는데 우리는 늘 지는 싸움만 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학부모님들은 이제 우리 아이들이 보는 세상이 달라질 거라고 이야기 합니다.” - 김율옥 수녀
"성서에서 말하는 탈출기 체험, 해방 체험입니다. 그 체험을 우리는 기억하고 기념하면서 살아가잖아요. 엄밀히 말하면 아이들에게 있어 탈출기 사건의 체험입니다. 실제로 현실 안에서 체험하지 않으면 교회가 말하는 성서는 관념 속에서 만나는 세계입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투신하고 참여했을 때 겪는 체험이 실제 성서적 사건입니다. 여기서 얼마든지 신학적 의미를 해석하고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관한 일이 아닙니다."
- 신성국 신부
"2013년 싸움을 시작했을 때는 저도 그렇고 대표들도 마이크 잡고 앞에서 말하는 것도 떨리고 어색했는데 한 해 한 해 지나면서 익숙해질 때쯤에 세월호 광장 집회에 함께 갔습니다. 세월호 엄마들이 그 큰 광장 한 가운데서 마이크를 잡고 떨면서 이야기 하는 모습을 보는데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엄마들의 모습이 처음 싸움을 시작한 우리들의 모습인 것 같았습니다.
도박피해자모임 정덕 대표가 원래는 상장기업 회장이었는데 정선 카지노에 갔다가 몇 십억을 날리고 몇 번 자살시도까지 했던 사람인 거예요. 그래서 도박 피해에 대한 증언도 해주셨는데 결국 가난한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어 마사회가 농축산발전기금이란 이름으로 농촌에 차 몇 대 주고 냉장고도 사주고, 세탁기도 사주고 하는 것이죠.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경제 구조에 대해 다시 질문해야한다는 생각도 하게 되고 여러모로 생각이 커지는 시간들이었습니다." - 김율옥 수녀
“앞서 잠깐 말씀하셨지만, 누구보다도 지역 가톨릭교회가 한목소리를 냈어야 했는데 신자들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은 깊이 반성해야한다고 봅니다. 지나간 일이니까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 앞에서 쇄신된 모습, 시대의 징표를 읽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 신성국 신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성심의 교육이념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 정의의 개념으로 발전됐다. 교회전체가 동의하고 지향하는 바인데 지역교회가 너무 소극적 이었던 게 아니냐는 반성이었다.
“저희가 교회 몇 군데에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가톨릭 학교 재단 교육위원회에도 도움을 청했고 서울교구 주교님들께도 도움을 청했습니다. 물론, 신부님들 주교님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아쉬운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앞서 바티칸 공의회를 언급하셨는데, 예수성심에 대한 흠숭과 보상이 우리 수도회에 대한 기본적 두 가지 은사의 방향입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여성교육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계급이 있었기 때문에 귀족층과 가난한 아이들을 함께 교육할 순 없었지만 귀족아이들이 낸 학비로 무상 학교를 동시에 운영했습니다.
유럽에서 시작해 1818년에 미국으로 넘어갔다가 미국에서 남미로 많이 이동했습니다. 해방신학의 영향도 있었고 총 원장 수녀님이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일찍 살리셨죠. 그래서 수도복도 그 시대에 여성들이 입는 단순한 복장으로 바꿔 입기 시작했고, 1975년 총회에서 ‘신앙에 기초한 정의교육’으로 성심교육을 정의했습니다.
성심학교 교육 목표에도 신앙교육, 학문교육, 공동체교육, 사회정의교육, 인격형성교육 등 사회정의가 들어 있습니다. ‘교육’이라는 것이 단순히 현재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하고 성찰하며 바른 가치를 찾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이 수도회 안에서도 공유되고 지지를 받은 부분이 있습니다.” - 김율옥 수녀
“앞으로 건물이 어떻게 쓰이면 좋을까요?”
"12월 31일 까지 폐쇄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용산구에 도서관이 많이 없습니다. 실제로 용산구에 공식적인 도서관은 중구에 남산 도서관과 남산 도서관 길 밑에 있는 것 말고는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청소년수련관이 하나 있는데 그것도 가장 부유한 지역인 동부이촌동에 있어요. 전체적으로 도서관도 없고 청소년들을 위한 시설이 없어서 그런 것들이 들어서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최근에 청년 일자리를 위해 젊은이들 창업 단지 같은 것들을 많이 만들잖아요. 그런 허브센터로 만들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1579일 만에 용산화상경마도박장 폐쇄 협약식을 했는데 그동안 우리가 노숙농성 천막을 쳤던 자리가 구유지였던 터라 서울시에서 그 자리에 기념비를 하나 세워주겠다고 했습니다. 오는 1월 3일이나 4일쯤 천막을 걷을 계획인데 아마 그 즈음 기념비도 함께 세우게 될 것 같습니다." - 김율옥 수녀
“아직도 긴 싸움을 하고 있는
전국 각지 투쟁현장에
어떤 말을 해 주고 싶나요?”
"제가 좋아하고 기억하는 동화가 있습니다. 필리핀 신부님이 쓰신 동화책인데 어떤 마을에 나병이 번졌습니다. 부자 한 명과 사목회장과 신부님까지 세 명이 나병에 걸려 마을에서 떨어져 살게 됐습니다. 그런데 한 달 만엔가 부자가 제일 먼저 병이 나은 거예요. 몇 달 후엔 사목회장이 나았죠. 그때까지도 신부님은 안 나았어요. 너무 궁금해서 사목회장이 하느님께 기도를 했더니 한 달 이상 놔두면 신앙을 버릴 것 같아서 빨리 낳게 했다는 거였습니다. 그러면서 사목회장은 신부님을 부러워하죠.
저는 지난해가 가장 어려웠습니다. 일상을 살아가는데, 선생님들도 지치고, 학부모들도 지치고, 우리도 지치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결국 하느님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때에 마침표를 찍으신 겁니다.
아마 더 길어졌다면 저는 그 일상을 못 살아냈을 것 같아요. 하느님을 그만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설령 우리 때 그 열매를 못 볼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것들이 분명히 씨를 뿌리고 자라나서 남모르는 사이에 열매를 맺는 것처럼 말이죠." - 김율옥 수녀
“수녀님의 승리가 지역주민들의 승리가 저에게도 또, 제가 함께 싸우고 있는 KAL858 사고 가족들에게도 큰 힘이 됩니다. 우리도 저런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줍니다. ‘우리가 이겼습니다!’라고 써 붙인 저 현수막이 각 진영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큰 힘으로 다가오는지요.”
- 신성국 신부
“현수막에 써 붙인 ‘우리가 이겼습니다!’ 저 문구가 경마장에 올라가면 너무 잘 보인다고 하네요. 함께 해주는 많은 분들이 계셔서 가능했습니다.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 김율옥 수녀
김율옥 수녀는 15년째 진실을 위해 싸우고 있는 청주교구 신성국 신부에게 “그 만큼의 내공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죠. 견딜힘이 있는 거에요“라며 연신 격려의 말을 전했다.
여전히 지켜야할 생명이 있어 자리를 지키고 버티다보니 일상이 되었고, 그것에 지쳐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 마침표를 찍어주셨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김율옥 수녀의 말 속에서 시간이 만들어준 내면의 힘과 믿음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김율옥 수녀는 ‘용산’이라는 지역은 사방으로 뻗어나가기 쉬운 서울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 어느 현장이든 여러 방식으로 연대할 수 있을 것 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