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3·1운동백주년종교개혁연대가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며 종교에 주어진 과제를 짚어보는 세미나를 열었다.
천주교, 불교, 유교, 천도교, 개신교 5대 종단이 참여한 이번 세미나는 ‘한국천주교회의 3·1운동 ± 100년’이란 주제로 천주교가 세미나의 첫 시작을 알렸다.
첫 번째 발표자로 나선 경동현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실장은 ‘한국천주교회가 공적 영역에 해당하는 공론장에서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3·1운동을 중심으로 전후 시기의 한국천주교회 모습을 살폈다.
3·1운동이 시작됐을 시기, 조선천주교회는 파리외방전교회 출신 프랑스 주교들이 관리하고 있었는데 교회 중심주의, 선교 우선주의, 선교지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보수적인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정책은 민족문제를 외면했다고 설명했다.
정교분리원칙 채택한 조선천주교회는 일제 정책에 부응하면서 동조에서 협동으로, 봉사로 나아가 충성으로 치달았다.
국권 강탈 이후 10년간(1910~1919) 교회 신자 증가율은 2.10%로 그 이전 시기보다 증가율이 현저하게 낮았는데 이는 “교회가 ‘반봉건’, ‘반제국주의’라는 당대 우리 사회의 공론장에 부합하지 못하고 공공성을 상실했던 것이 주된 이유”라고 말했다.
프랑스 선교사들과 조선인 성직자들은 신자들의 만세운동 참여를 금지했지만,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서울 용산예수성심신학교 학생들은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이를 알게 된 뮈텔 주교와 드망주 주교는 만세운동 참여를 금지시켰다. 뮈텔 주교는 만세를 주도한 신학생들을 퇴학시키기도 했다.
반봉건, 반제국주의 운동이라는 당대의 가장 중요한 공론장 안에서 성직자와 신자들 간의 괴리감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
경동현 실장은 3·1운동에 참여한 천주교 신자 대부분이 성직자들의 영향이 작은 공소의 신자라면서, “천주교 신자들도 당시 시민들과 의식을 같이 공유했지만, 제도교회에서는 공식적인 활동을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해방 이후 반공 이데올로기를 고수하고 이승만 정권 초기 동맹세력 역할을 하기도 했던 한국천주교회는 비판적 입장으로 선회했다. 1970년대에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돼 저항의 현장에서 시민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욕구의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하면서 공공성을 지닌 종교로 인식됐다고 말했다.
경동현 실장은 “한국천주교회 주류가 공공성을 상실했던 일제시기, 해방정국, 군사독재정권 시기에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이들은 하위 성직자를 포함한 평신도들이 중심이었다”고 말했다.
종교 내부 적폐를 외면하면서 세상을 향해서만 정의와 개혁을 논한다면 누가 동조할 것인가
“먼저 평신도들이 중심에 서고, 교회 권력 일부를 나눠 갖고 있는 각성된 사제들과 함께 종교의 공공성 회복 운동 전면에 서야 한다”고 경동현 실장은 강조했다.
3·1운동과 식민지 한국에서 천주교회 여성들에 대해 살펴본 최우혁 서강대학교 교수는 안중근 의사 가문의 여성들에 초점을 맞췄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 마리아는 투철한 독립정신을 가지고 안중근의 민족운동을 격려했고, 안중근의 아내 김 베로니카는 1920년대 후반 상해로 이주해 시어머니와 함께 그들의 자리를 지켰다.
식민지 시대 천주교 여성들의 활동에 관해 안중근 가문 여성들을 제외하고는 크게 알려진 것이 없다면서, 서구식 천주교회로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여성들은 급속히 공적인 자리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천주신앙을 기반으로 활동한 출중한 여성 독립가가 있다 할지라도 그의 이름을 밝히기 위해선 더 깊은 역사적 발굴과 신학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짚었다. 또한 일제 강점기 후반 천주교 여성들이 의지한 성모신심과 신앙의 성격은 어떠했는지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발표가 끝난 후, 참석자들의 다양한 의견도 제시됐다. 대구대교구 평신도 임성무 씨는 천주교회의 어떤 교리가 독립운동을 할 수 없게 했는지를 봐야 한다면서, 여기에는 ‘순명’과 순명에 대한 오해가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김선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상임대표는 1970년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결성 이전에 1960년대에 이미 가톨릭노동청년회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에 큰 영향을 끼치고 밑거름 역할을 했다며 가톨릭노동청년회의 언급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유철 삶·예술연구소 대표는 천주교회는 ‘안중근 토마스’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가 살인자라면서 종부성사도 주지 않았는데 그에 대한 사과를 했느냐고 일갈했다.
또한 뮈텔 주교가 조선인들이 전개한 3·1운동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뮈텔 주교는 3·1운동이 무엇인지 식민지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베트남을 식민지로 만들었고 프랑스혁명을 겪었던 그들은 “일제강점기에 식민지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제국주의자들이었다”고 설명했다.
김유철 대표는 “종교가 예수의 종교, 부처의 종교, 깨달음의 종교가 아니라, 직업 종교인들의 종교가 됐다”고 지적하면서 “종교의 근본성을 회복하자는 의미에서 해방하고 독립된 백년의 선언서가 나와서 각 교단에 전달되고 그들도 함께 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는 9월 20일에는 불교, 10월 25일 유교, 11월 22일 천도교, 12월 20일 개신교에서 세미나를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