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장을 시작하기에 앞서 ‘성서는 나에게 과연 무엇인가?’를 되새겨 본다. 많이 아는 것보다 꼭 알아야 할 것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나 싶다.
성서의 지식을 나누기 보다는 생명의 진리를 나누고 싶다.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은 오늘의 나에게 남는 것이 거의 없다. 세상을 살면서 부딪치고, 깨지고, 아파하면서 몸소 겪은 체험 안에서 주님 말씀을 깨닫게 된다. 책꽂이 수북하게 쌓아놓은 신학서적들은 나에게 주님의 현존을 눈뜨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주변 가난한 사람들과의 만남과 관계를 통해서, 촛불 광장에서 만난 시민들의 뜨거운 마음을 통해서, 거리에서 만난 시민들의 애환을 나누면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났다. 성서의 현장은 더 나은 세상, 더 정의로운 세상, 더 평화로운 세상을 바라는 사람들의 삶 속에 있다.
형식과 예배 안에서 틀에 박힌 예수를 발설하는 종교인들로부터 살아있는 예수는 결코 만날 수 없다. 내가 만난 예수는 세상의 밑바닥에 있다. 거친 들판을 걷고 있다. 무더운 여름철 주방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새벽녘, 건설 현장에서 하루 품을 벌기 위해 인부로 일하고 있다. 힘겹게 리어카를 끌고 폐지를 줍고, 병을 모으며 하루 1500원을 벌고 있다. 억울한 사람들 곁에서 손을 붙잡아 함께 울고, 가슴 아파하고 있다.
예수는 단 한 번도 성직자로 산 적이 없다. 그냥 사람이 되셨고, 사람 속으로 들어 오셨고, 사람들 틈에서 더불어 울고, 웃고, 마시고, 일하고, 분노하고, 투쟁했다. 예수는 종교적 인물이 아니라 ‘세상사람’이다.
당신을 구세주로 받들라고 그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는다. 사람들을 조건 없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여준다. 종교가 메시아를 강조할 때마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멀어지고 거부감만 생긴다. 예수는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려고 하는데 종교는 사람들과 그분을 멀리 떨어지게 만든다. 예수는 교의와 성서를 통해 구세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 구세주가 되신다. 온갖 감언이설로 예수에 대해 설교한다고 해서, 예수가 현존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을 사랑하고 예수처럼 실천하는 자를 통해 예수는 고백될 뿐이다.
예배당과 성당이 대형화되고 화려한 성전일수록 예수가 빛나는 것이 아니다. 실천 없는 설교와 강론은 예수를 팔아먹는 종교사기다. 한국에 예배당만 7만5천개, 천주교 성당은 1700개 정도가 된다. 전국에 동네 마트 숫자가 2만 5천개다. 교회 숫자가 마트 숫자보다 무려 세배나 많다. 10만 명이 넘는 목사와 신부들이 매주일 좋은 말씀을 선포하는데 과연 세상은 어떤 상태인가 생각해보자.
종교가 종교 마트로 변질되지 않았나? 예수가 축복을 주는 상품으로 포장되지 않았나? 좋은 말만 난무하고 삶이 없는 종교는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장사치가 아닌가? 눈앞의 이익과 속물근성에 빠져있다면 사람들로부터 불신과 외면을 당하고 마침내 쇠퇴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다.
교회가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개혁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예수는 교회를 넘어서 세상 가운데서 역사하신다. 사람들은 실천이 없는 교회를 떠나 세상 안에서 예수를 만나고 있다.
세상과 우주 안에 살아계신 예수를 만나는 일이 새로운 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다.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다.
[신부열강]은 ‘소리’로 듣는 팟캐스트 방송으로도 업로드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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