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열> 속 조선인 박열은 ‘일본 황태자 폭탄 암살 계획’ 주범으로 몰리지만, 재판에서 일본인 변호사의 도움을 받는다. 어떻게 식민지 시대에 조선 피고인이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까?
독립 운동가의 변론을 맡았던 인물을 항일 변호사라고 한다. 그러나 대중에게 이 이름은 낯설기만 하다. 실제로 지난 6일부터 9일까지 전국 대학생 90명을 대상으로 한 자체 설문조사에서 피설문자 68%는 '항일 변호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반면, 항일 변호사가 변론한 3·1운동과 의열단 사건에 대해 ‘알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각각 43%, 36%였다. 수많은 애국 투사 중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는 한정적이다. 항일 변호사도 그러하다. 그들의 재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러한 법적 투쟁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그들의 법으로 조선을 통치했다. 귀화하는 조선인을 일본 신민으로 간주하는 법령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차단했다. 조선인 판·검사의 경우 업무 범위를 제한하여 조선인의 정당한 재판권을 빼앗았다. 일제에 유리하게 수정된 법은 항일 운동에 큰 제약을 주었다. 항일 변호사는 무료 변론을 통해 애국 투사들의 거사를 도왔다. 허헌, 김병로, 이인이 그 주축이었다. 이들은 3·1운동, 의열단 사건 등 굵직한 역사적 재판에 참여했다.
허헌, “나는 일생에 이 재판 하나만은 이겨 놓고 죽는다”
3·1운동 재판은 절차상의 허점에 주목하여 경형을 받아낸 재판이다. 일본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배포한 행위를 폭동으로 여겨 민족대표 33인을 포함한 주역 47인에게 ‘내란죄’를 적용했다. 그러나 고등법원은 내란죄가 아니라며 지방법원으로 사건을 송치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그 과정에서 송치한다는 단어를 명시하지 않은 것이다. 허헌은 이 실수에 주목한다. 판결문에 ‘사건을 송치한다’는 문장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으니 사건은 무죄로 종결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재판이 진행될 수 없다며 ‘공소불수리’를 신청한다. 결국, 송치 과정에서 허점을 인정한 재판부는 47인에게 경형을 선고한다.
이는 단순히 일본의 실수로 운 좋게 승리한 재판이 아니다. 이 재판에 그의 전문성과 열정 모두를 쏟아냈다. 그의 부인이 “육법전서를 손에 들고 밤을 새워가며 미친 사람 마냥 법정에서 할 이야기를 떠들고 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일제에 유리하게 개정되는 법 속에서도 애국 투사들을 구하겠다는 그의 의지는 꺾일 수 없었다. 이 재판으로 항일 변호사들은 독립투사와 같은 자주독립 정신을 지니고 있음을 대외적으로 알리게 된다.
물론, 이들의 항일변호 활동에는 수난도 따랐다. 변호 자체는 합법적이었기 때문에 일제는 징계 제도를 무기 삼아 그들을 처벌하기 시작했다. 조선 총독의 권한으로 징계하는 ‘변호사 징계처분권’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 법으로 인해 이인, 김병로는 변호사의 품위와 신용을 훼손했다는 징계를 받아 6개월 정직을 당하고, 허헌은 민중대회 계획을 세우다가 사전에 발각돼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한다. 이는 일제하에 변호사가 변론내용으로 징계 처분을 받는 첫 사례였다.
1923년부터는 이전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항일변호를 시작한다. 당대에는 조직을 형성해 활동하는 반향이 불었는데, 그 대표적인 기구가 '형사공동연구회'다. 형사공동연구회는 5명이 함께 연구하고 변호하는 조직이다. 주목할 부분은 변론 이외의 항일 운동도 있었다는 점이다. 형무소에 구금된 애국 투사들에게 사식을 넣어주고, 그들 가족의 안위를 살폈다. 당시 법조계는 일제의 눈치 때문에 가혹한 사건들도 다수 지나쳐야 했는데, 애국 투사들에게 실용적인 도움을 주며 애국적 유대감과 물적 기반을 다졌다.
이인, “내가 법률을 공부하기로 한 것은 억울한 국민을 구해보자는 의분이 뭉쳐서였다”
무릇 법이란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다. 가진 자가 법을 쥐고 악의를 품을 때, 법은 그 즉시 무기가 된다. 일제의 경우가 그러하다. 하지만 항일 변호사는 일제의 손아귀에 넘어간 우리의 법을 포기하지 않았다. 역으로 나라를 구해낸다. 항일 변호사의 투지로 일제의 무기였던 법은 그 끝이 무딘 창이 된다.
현대는 어떠한가? 민족 변호사들이 닦아놓은 약법의 토대를 잘 이어가고 있는가? 우리는 질문을 던져봐야 할 때다.
안중근 청년기자단 - 박영은, 공도영, 김연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