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족끼리 헐뜯고 미워하고 죽였던 그 자리에 (세워진) 참회와속죄의성당에서 뉘우친다. 미국인으로서 선교사로서 한국인들을 사랑하셨던 선교사 시노트 사제는 평화의 사도였다. - 추모미사 중, 함세웅 신부의 말
‘대한민국 최악의 사법살인’으로 꼽히는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인혁당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고 제임스 시노트(한국명 진필세) 신부 선종 4주기를 맞아 추모 미사가 봉헌됐다.
22일, 파주 참회와속죄의성당 지하 납골당에서 봉헌된 이번 미사에는 대한민국 민주화를 위해 오랜 세월 함께 투쟁해온 함세웅 신부와 안충석 신부를 비롯해 고 시노트 신부의 사목지였던 용유성당 신자들과 현재 성당 주임 지성용 신부가 참석했다.
특히 이 자리에는 고 시노트 신부가 함께 투쟁했던 ‘인혁당 사건’ 피해자와 희생자 유가족, 그리고 박정희 군부독재의 압력에 의해 해직된 이후 동아일보 기자들이 조직한 ‘동아투위’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인혁당 사건’은 당시 박정희 군부독재에 대항하던 이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고 규정, 관계자 8명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겨우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한 전형적인 용공조작 사건이다. 고 시노트 신부는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했고, 이를 계기로 한국에서 추방되었다.
이날 미사 중에는 시노트 신부의 육성이 담긴 영상이 공개되기도 했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고 선교사로 한국에 와 최선을 다 한 아름다운 시노트 사제를 기리며, 예수처럼, 사무엘 예언자처럼, 시노트 신부처럼 이웃을 위한 헌신의 삶, 증언의 삶을 살게 해달라.
함세웅 신부는 미사 중에 이같이 기도하며 특히, 이날 복음에 나온 마리아 찬가(Magnificat, 마니피캇)를 묵상했다. 함 신부는 ”해방신학에 따르면 마리아 찬가는 갈릴레아 민중의 해방을 위한 기도”라며 “늘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 시노트 사제의 마음을 기억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함 신부는 “공동선을 위해, 공동체를 위해 민족의 겨레를 위한 주님의 창조주, 아들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박정희, 전두환을 비롯한 민족사의 악인들, 그 후예들을 물리치고 아름다운 평화, 진실, 정의의 공동체를 이루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했다.
인혁당 사건 피해자 유족들 중에서 특히 고 김용원 씨의 아내와 자녀, 고 이수병 씨의 아내 이정숙 마틸다 씨가 참석했다. 이정숙 씨는 “시노트 신부님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며 “그분의 큰 키에 우산처럼 매달렸다”고 회고했다. 이정숙 씨는 “(시노트 신부님이) 돌아가실 때쯤 찾아갔을 때 힘드신데도 마지막으로 우리를 붙들고 (반가워하셨다)”며 “저는 항상 기도할 때마다 시노트 신부님을 위해 ‘당신의 거룩한 빛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말했다.
인혁당 사건으로 억울하게 8년의 옥고를 치른 이창복 씨도 미사에 참석했다. 이창복 씨는 시노트 신부와의 인연을 떠올리며 “시노트 신부님은 하느님의 이웃 사랑을 하나도 거짓 없이 마음을 전부 비우고 실천하신 분이다”라며 “거룩한 사랑을 저도 어떻게 따라 살 수는 없을까”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아투위 사태를 대표해 미사에 참석한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은 “제가 시노트 신부님을 처음 뵌 것은 74년 11월 2일이었다”면서 “박정희 정권이 언론탄압을 하고, 인혁당 사건 등에 대해 한 줄도 쓰지 못하게 했다”고 회고했다.
김종철 이사장은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한 이후 시노트 신부가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을 위해 6개월 동안 매일 아침 9시부터 회사 앞에서 항의했다”고 말했다. 시노트 신부는 당시 새벽에 영종도에서 배를 타고 인천에서 기차를 타고 동아일보로 오갔다고 회고하며 그 노력에 감사를 전했다.
용유본당 주임사제 지성용 신부는 “나는 사제로서 얼마나 진실을 위해, 진실을 말하며 살아왔는가 반성해본다”며 미사에 참석한 이들 역시 “‘약자들과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삶이다‘라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오셨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성용 신부는 “이스라엘 땅에 있던 작은 종교가 어떻게 2000년이 지나도록 이 모든 세상에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것은 ’인권‘과 ’평등‘때문”이라고 말했다.
지 신부는 “복음의 중요한 가치가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권리이며 이를 지키기 위해 예수께서 희생하셨기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인권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노트 신부는 인권과 평등을 위해 목숨을 바친 하느님의 예언자이자 하느님의 사제였다.
지성용 신부는 “공동체와 사회 안에서 부족하고 미약하지만 작은 목소리라도 낼 수 있는 사제로서 살아야겠다는 작은 다짐을 했다”고 고백하며 참석한 신자들에게도 “주님 안에서 죽는 날까지 일치하고 연대하며 평화와 인권을 위해 싸울 수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시기를 함께 마음모아 기도”한다고 말했다.
1929년 미국에서 태어난 제임스 시노트 신부는 메리놀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961년 한국에 왔다. 천주교 인천교구에서 일하던 중 인혁당 사건을 접한 그는 이 사건이 고문 등으로 조작됐다고 폭로했고 사형선고 당한 이들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1975년 4월 9일 사형은 집행됐고, 항의하던 시노트 신부는 그해 4월 말, 강제 추방당했다.
20년이 흐른 뒤에야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시노트 신부는 재입국 이듬해인 2004년 10월 『1975년 4월 9일』이란 책을 내고 인혁당 사건에 대해 알렸다.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는 이들과 그의 헌신적인 노력이 더해져 인혁당 사건 희생자 8명은 2007년 재심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끝까지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제임스 시노트 신부는 2014년 12월 23일 오전 3시 30분, 향년 85세로 선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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