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검색
전순란의 ‘4.23 사태’ [휴천재일기] 2019년 4월 23일 화요일, 맑음 전순란 2019-04-24 11:16:34
  • 폰트 키우기
  • 폰트 줄이기


2019년 4월 23일 화요일, 맑음



잠자리에서 일어난 보스코의 이마엔 사방에 도깨비 뿔 같은 두드러기가 불쑥불쑥 솟아 있다. 저렇게 되면 우선 ‘어제 무엇을 먹었나?’하며 애꿎은 음식에 혐의가 간다(‘빠다 먹으면 안 돼! 튀긴 것 먹으면 안 돼! 달고 고소한 것 먹으면 안 돼!’ 아내의 잔소리가 끊임없다). 그 다음은 스턴트라는 심장시술 후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먹는 약 가운데서 오는 과민반응인가?(‘마누라가 챙기지 않으면 100% 잊어요?’ 하면서 아예 물잔에다 약봉지를 들고 따라다녀야 한다, ‘챙겨 줘서 잊나? 잊어서 챙겨주나?’). 마지막으로는 ‘긁어 부스럼!’ 밤새 일 없이 긁어 대니 멀쩡한 어디라도 성이 나리라는 생각인데 ‘가려워서 긁느냐?’ 아니면 ‘긁어서 가렵냐?’는 나로서도 결론을 못 내리겠다(‘당신 손엔 장갑을 끼워둬야 해, 임실댁 남편처럼!’).


여하튼 또다시 온통 ‘얼굴에 뿔이 났다. 그러나 도깨비는 아니다’라는 현실만 남았다. 아마 밤새 두통약 찾아먹으랴, 알러지약 찾아먹으랴 드나들어선지 그가 CCK에 회의를 하러 가는데 힘이 들었던지 자기를 차로 실어다 주고 거기서 한 시간쯤 기다리다 회의 끝나는 대로 같이 돌아오잔다.



하도 힘없고 가련한 버전으로 얘기를 하니 ‘순함 그 자체’(la bonta’ in persona)인 내가 어찌 마다하랴, 내 이름이 順할 순자, 가련한 난초 蘭자인데! 더구나 一日五食의 남편(‘뭐라고 부른다더라?’)이 오늘따라, 아니 생전 처음으로, 아침도 안 먹겠다며 미루네 팔보효소 한잔만 먹었으니!


그를 태우고 중곡동으로 떠났다. CCK에 보스코를 내려주고 거기에 차를 놓아두고 전철을 탔다. 지난 주 으아리 두 포기를 사다 마당에 심고서 그 식물이 넝쿨을 올리는 버드나무 파티션을 사러 그제 장암동까지 갔지만 구하지 못했었다. 꽃가게 주인에게 물으니 왕십리 중앙시장에 가면 다 있단다. 



CCK 접수실 아저씨가 ‘찻길을 곧장 내려가 대로로 왼편으로 꺾어 가다 지하철역 1번으로 들어가 5호선을 타라’고 일러주는 대로 가서 왕십리에서 신당역에서 내렸다. ‘황학동 재래시장!’우리나라에서 찾을 게 있다면 다 찾을 수 있는 곳이 거기라는데…. 정말 많은 물건이 너저분하게 널려있고 쓰레기장 가야 할 물건들이 가격이 매겨지고 흥정이 되는 신기한 곳이었다! 그러나 파티션은 그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얼마 전까지도 팔았는데 더 이상 찾는 사람도 없고 생산자도 힘들어서 더는 안 만드는 것 같다’는 가게 주인. ‘인터넷 들어가면 찾을 수 있을 테니 몸품 발품 팔고 싸돌아다니지 말고 집에서 눈품 손품으로 찾아보시라’라는 친절한 충고까지. 과연 그 아저씨말대로, 인터넷에는 다 나와 있었다! 아마 동남아에서 버드나무로 만든 120cm의 자바라는 10,000원이 채 안 됐고 곧 도착한단다. 장암동 꽃단지에서 35,000원에 팔았다는 파티션이 인터넷에서는 16,000원이었다! 소비자에게는 큰 이득이다. 다만 유통하는 사람들 수고는 어쩌나?



보스코가 한 시간만에 회의를 마쳤는지 전화로 호출했다. 헌데 내가 왕십리의 만물상 시장경제를 생각하다가 그랬는지 그가 기다리는 곳 전철역을 까먹었다. 보스코에게 전화로 물어보니 ‘장안평’이라고 한 것 같아 무조건 그 장안평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갔는데 그가 말한 곳은 ‘군자역’이었단다. 한 시간 넘게 치매노인처럼 장안평 일대를 돌고 또 돌고, T맵이 2.3km였다가 3.2km으로 늘어나고… 하도 지친데다 전화로 들려오는 보스코의 성화에 택시를 타고 CCK를 찾아갔다, 전철 10분 거리를 1시간 30분만에! 


보스코는 하필 내 생일에 영화 ‘아이리스’처럼 치매 걸린 아내가 잠옷바람으로 빗속을 헤매는 장면이 떠올라 무척이나 불안하고 애가 타서 5분 간격으로 핸드폰 전화를 울렸다. 그래도 돌아오는 길로 4.19탑에서 꽁보리밥을 먹으니 내 정신이 돌아왔고, 보스코는 점심 후 선내과에 가서 주사 한 대를 맞고 나니 얼굴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는 ‘아이리스를 기념하여’ 어젯밤에 아래층 총각 자훈이가 사온 케이크에 꼽으라고 69개로 맞춰온 촛불을 켜고서 두 늙은이가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다, 생일 축하한다고! 이렇게 해서 2019년의 나니의 ‘4.23’ 사태는 일단락 됐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TAG
관련기사

주소를 선택 후 복사하여 사용하세요.

뒤로가기 새로고침 홈으로가기 링크복사 앞으로가기